주간동아 481

2005.04.19

우연한 살인, 계획된 웃음

  • 듀나/ 영화평론가 djuna01@hanmail.net

    입력2005-04-15 13: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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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한 살인, 계획된 웃음
    극저예산 컬트 영화로 시작한 감독들은 대부분 주류화의 과정을 거친다. 팬들은 실망하겠지만, 그들이라고 언제까지 극저예산 영화만 만들고 싶겠는가. 열성팬들이나 비평가들이 초기작들에 퍼붓는 극찬은 어떻게 보면 그들에게 감옥이기도 하다. 결국 예술가는 팬들이나 비평가들이 뭐라고 하건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해야 한다. 돈이 더 생기면 돈이 더 많이 들어가는 영화를 만들어도 좋고.

    알렉스 드 라 이글레시아 역시 컬트에서 주류의 길에 접어들고 있다. ‘액션 뮤턴트’ ‘야수의 날’ ‘커먼 웰스’ ‘800 블렛’ ‘퍼펙트 크라임’으로 이어지는 그의 행보를 보면 일관된 변화의 흐름이 보인다. 극단적으로 치우친 소수의 팬들을 위한 괴팍한 비전의 싸구려 SF와 호러에서 보다 일반적인 관객들을 위한 정통 블랙코미디로 이어지는 과정이 그것이다.

    당연히 그의 신작 ‘퍼펙트 크라임’은 ‘액션 뮤턴트’보다 ‘커먼 웰스’에 가깝다. 아니, 주류의 감각을 따진다면 ‘커먼 웰스’보다 더 나아갔다. 그래도 ‘스타 워즈’ 팬들 같은 폐쇄된 영화광들에게 호소하는 측면이 있었던 전작과는 달리, ‘퍼펙트 크라임’은 영화광들의 닫힌 감성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영화의 설정은 모범적인 도서추리물 형식을 취하고 있다. 주인공 라파엘은 비교적 잘나가는 백화점 영업사원이다. 하지만 승승장구할 것 같던 그의 삶은 경쟁자인 돈 안토니오가 그를 밀쳐내고 지배인이 되면서 틀어지기 시작한다. 그에겐 천국과도 같던 여성복 매장에서 쫓겨난 데다 해고당할 위기에까지 몰린 그는 몸싸움 끝에 돈 안토니오를 죽이고 만다. 이것만으로도 끔찍한데, 그가 지금까지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못생긴 말단 점원 루르드스가 그 현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한다. 간신히 살인범으로 체포되는 일은 면했지만, 이제 라파엘은 비밀을 알고 있는 루르드스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다.

    심각하다면 ‘이중배상’처럼 엄청 심각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드 라 이글레시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얄미운 코미디를 고집한다. 사람이 죽고 시체의 사지가 절단되고 주인공이 완전 범죄를 꿈꾸는 동안에도 영화는 이 모든 피투성이 소재들을 농담거리로 삼는다. 심지어 제목 자체도 농담이다. 한국어 제목 ‘퍼펙트 크라임’에서는 드러나 있지 않지만 원제 ‘Crimen ferpecto’는 맞춤법까지 틀려 있다.



    ‘퍼펙트 크라임’이 집중적으로 놀려대는 건 주인공 라파엘이 대표하는, 책임감 없고 여자들의 외모에 집착하는 얄팍한 독신남들이다. 이런 남자가 못생긴 점원의 손아귀에 들어가 고생한다는 내용의 소동은 외모 중심 사회에 대한 비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핵심은 누군가의 외모가 아니라 피상적인 삶의 쾌락에만 매달리는 정신상태 자체다. 하지만 누가 이런 경박함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키득거리며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 드 라 이글레시아 감독 역시 예외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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