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97

2003.08.14

위태로운 일탈 … 엽기 가족 해체기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3-08-07 16: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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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태로운 일탈 … 엽기 가족 해체기
    온통 바람난 사람들이다. TV에서는 ‘앞집 여자’들과 그 남편들이 바람나 온 동네가 시끌벅적하고, 극장에서는 ‘바람난 가족’이 2대에 걸쳐 ‘뻔뻔하고 섹시하게’ 노는 중이다. 그러나 양상은 너무나 다르다. TV 드라마 ‘앞집 여자’가 오페라 부프(우왕좌왕하는 희가극)라면, 영화 ‘바람난 가족’은 한 중산층 가족의 해체에 관한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웬일인지 ‘바람난 가족’은 ‘앞집 여자’와 ‘비스끄름한’ 코미디물로 알려졌다. 당신의 어머니가 바람을 피고, 아내가 옆집 ‘고삐리’ 양아치와 섹스한다는 것을 코미디 이상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는 영화 홍보담당자의 ‘적확한’ 관객 분석이 작용한 것일까. 남자 주인공 영작(황정민 분)이 아버지의 시신이 차가워지기도 전에 “나 남자 있다”고 고백하는 어머니의 말에 귀를 틀어막듯 말이다. 확실히 시사회장에서 나온 상당수 남성 관객들의 첫 반응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역설적이지만 ‘바람’은 이 가족을 하나로 묶고 있는 끈이다. 어머니 병한(윤여정 분)이 평생을 술로 보내고 중환자실에서 식구들에게 더러운 피를 쏟아내는 아버지 창근(김인문 분)의 병상을 지키고 있는 것은 초등학교 동창과의 관계를 통해 평생 처음으로 오르가슴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궂은일을 마다 않는 인권변호사 영작이 그나마 부인 호정(문소리 분)을 상대로 ‘의무방어전’이라도 치르는 건 젊은 사진작가 연(백정림 분)과 열정적인 섹스를 나누는 이중생활이 있기 때문이다. 위선적인 남편이 한심한 호정은 자위와 자신을 따라다니는 옆집 학생 지운(봉태규 분)의 시선을 통해 허전함을 채운다. 이들은 위태롭지만 그럭저럭 시어머니, 며느리, 장남, 남편, 아내의 역할을 해나간다.

    표면적으로나마 윤택하고 고상했던 이 집구석이 파탄나는 건 영작과 호정이 입양한 어린 아들 준영의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서다. 준영이 죽은 건 영작 때문이지만 그 죽음으로 인해 모든 것이 분명해지고, 호정은 자유를 얻는다. 남편이 분질러놓은 손을 붕대로 감은 호정과 지운의 마지막 섹스 장면은 너무 노골적이어서 에로틱하지 않지만-감독의 의도다-너무나 절박하다. 그것은 피가 섞이지 않았으나 호정에겐 유일하게 진정한 가족이었던 준영의 죽음과 맞바꾼 섹스이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온 호정은 소파에 앉아 아이스케이크 하나를 우적우적 씹어 먹는다. 그녀가 다 먹을 때까지 카메라는 고정된다. 배우 문소리가 빛을 발하는 장면이다.

    위태로운 일탈 … 엽기 가족 해체기
    준영의 죽음을 통해 계층적 갈등까지 보여주려 한 것이 욕심 같다면, 창근과 영작이 장자로서의 콤플렉스로 고민한다는 암시나 남자의 역할을 배제한 호정과 연의 섹스 방식, 바람난 중산층 부부의 결벽증처럼 자주 등장하는 양치질 장면 등은 임상수 감독(‘처녀들의 저녁식사’)의 세심한 설정이다.



    어떤 관객들은 ‘영화가 과장됐다’고 말할 것이다. 시어머니, 아들, 며느리가 공개적으로 바람난 집이야 드물 테니. 그럼에도 이 영화가 ‘과장된’ 설정을 한 것은 오래 전부터 영화와 드라마에서 있어왔던 불륜의 합리화나 자유로운 섹스를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마지막 폭압을 가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가족제도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덧붙인다면, ‘바람난 가족’의 제작비를 댄 것은 명필름의 심재명씨(박신규 공동투자)고, 제작을 맡은 사람은 심보경씨다. 두 자매가 없었다면, 이 영화는 우리에게 더 늦게 왔을 것이다.



    영화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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