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85

2003.05.22

“삶의 천국을 원해? … 위선을 걷어내”

  • 강성률/ 영화평론가 rosebud70@hanmail.net

    입력2003-05-14 14: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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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천국을 원해? … 위선을 걷어내”
    토드 헤인즈 감독이 돌아왔다. ‘벨벳 골드마인’ 이후 4년 만이다. 이번에 그가 갖고 온 것은, 1970년대를 풍미했던 글램 록(Glam Rock)을 독특한 미스터리 기법으로 다루어 호평을 받았던 ‘벨벳 골드마인’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파 프롬 헤븐’.

    그가 이 영화에서 카메라를 들이댄 곳은 1950년대 미국 남부지역이다. 토드 헤인즈는 이 영화를 통해 1950년대의 미국을 재현하기 위해 상당히 애쓴 것으로 보인다. 영화를 보노라면 화면 구성이 당시의 분위기를 살렸음은 물론, 심지어 1950년대의 영화와 비슷한 분위기가 재현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엘머 번스타인의 슬픈 음악과 샌디 파웰의 원색 위주의 의상도 그런 느낌을 더한다. 도대체 그는 그때 그곳에서 무엇을 찾고자 한 것일까?

    ‘벨벳 골드마인’이 잊혀진 스타를 찾아가면서 삶의 허구와 진실을 찾는 영화였다면, ‘파 프롬 헤븐’은 1950년대의 단란한 중산층 가정을 통해 성공신화의 그늘에 가려진 미국사회의 위선에 대해 묻고자 한다. 멜로드라마의 귀재 더글러스 서크의 영화에서 영감을 받아 이 영화를 제작했다는 그는, 그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독특한 멜로드라마를 완성했지만 실상 그보다는 모순으로 가득 찬 미국에 대해 일침을 가하고 있다. 여전히 인종차별의 벽이 높고, 동성애가 용인되지 않는 그 시기를 통해 토드 헤인즈는 지금의 미국을 해부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여기 단란한 한 가정이 있다. 남편 프랭크(데니스 퀘이드 분)는 잘나가는 회사의 중역이고, 부인 캐시(줄리언 무어)는 지역 사교계의 여왕이며, 자식들은 착하고 건강하다. 여기서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물론 이런 얘기에 그친다면 영화로 만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당연히 아름다운 나날을 깨뜨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야근하는 남편을 찾아간 캐시는 남편이 다른 남자와 관계하는 것을 목격한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은 의도적이지는 않았지만 캐시를 구타하게 된다. 자신이 가장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캐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충격을 받는다.

    그런데 영화는 이 부분에서 놀라운 반전을 준비한다.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캐시를 위로하는 인물은 사교계의 그 많은 귀족들이 아니라 다름 아닌 그녀의 정원사인 흑인 레이먼드(데니스 헤이스버트 분)였다. 흑인을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하지 않았던(지금도 그리 나아지지는 않았지만) 1950년대이니 어찌 놀랍지 않겠는가. 같이 차를 타고 카페에 간 것을 본 귀부인들이 쑥덕거리는 것도 당연지사. 이런 가운데 남편은 이혼을 요구한다. 이제 그녀는 어떻게 될 것인가.



    “삶의 천국을 원해? … 위선을 걷어내”
    ‘파 프롬 헤븐’은 여성 감독이 만든 여성영화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여성의 미세한 감정의 결을 잘 따라가고 있다. 그래서 영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남편에게 충격을 받은 캐시가 자신을 위로해준 흑인 정원사에게 호감을 갖게 되는 과정이 상당히 매끄럽다. 사교계의 여왕에서 외톨이로 전락하는 처절한 과정을 차분히 관찰하면서도 그녀의 감정을 잘 따라가는 카메라는 마치 의식이 있는 듯 날카롭다. 그런 캐시의 심리를 표현하는 줄리언 무어의 연기 또한 대단하다. 무어는 이 영화로 2002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이런 결과는 단순한 듯하지만 생각보다 꼼꼼한 영화의 서사구조에서 발생한다. 한 가정이 파탄에 이르는 원인이 남편의 동성애와 아내의 흑백 문제라는 상황이 다분히 작위적으로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것을 넘어서고 있다. 남편을 위하는 아내의 마음과 아내를 윽박지르는 남편의 심리, 귀부인들의 편견과 사회의 냉대 등이 간접적으로 잘 대비되면서 그려지고 있다.

    요즘 대부분의 영화가 사랑을 다루고 있어서 웬만한 사랑 이야기에는 감동받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티격태격하다 결국 화해하고 마는 로맨틱 코미디에서도, 억지 울음을 짜내다가 정해진 결말로 향하는 멜로드라마에서도 감동을 받기란 쉽지 않다. 다행히도 ‘파 프롬 헤븐’은 그런 영화들과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영화 속 인물들에게 ‘천국은 너무나 멀리(far from heaven)’ 있지만,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한 편의 아름다운 이야기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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