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58

2002.11.07

남편의 사형 집행인…알고 보니 내 사랑

  • 강성률/ 영화평론가 rosebud70@hanmail.net

    입력2002-10-30 15: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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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의 사형 집행인…알고 보니 내 사랑
    정말 영화는 왜 보는 것일까? 어느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가장 고독하고 경건한 이 가을에도 ‘조폭 코미디’를 보면서 낄낄거려야 하는 것일까? 팝콘을 씹으면서 그렇게 낄낄거리다가 종영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극장문을 나서며 즐거웠다고 자위해야 하는 것일까? 만약 이런 의구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그래서 깊어가는 가을 분위기에 맞는, 감정의 결이 풍부하게 살아난 영화를 보고 싶다면, 더불어 ‘스피드’에 묻혀 살아가는 이 세상에 대해 반추해보고 싶다면, 이 영화가 제격이다.

    마크 포스터 감독의 ‘몬스터 볼(Monster’s Ball)’. 겉보기에는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 기존 영화와 별반 다를 것 같지 않지만, 영화의 포장을 살포시 벗겨보면 전혀 다른 계열의 영화임을 알 수 있다. 두 사람이 사랑에 이르는 과정이나 그것을 다루는 방식이 주류 할리우드 영화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먼저 ‘몬스터 볼’은 무엇을 나타내는 말인가? 사형 집행 전날, 사형수들에게 마지막으로 베풀어주는 잔치를 영국에서는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제목이 이러하니 사형수가 등장하는 것은 당연지사.

    그렇다고 이 영화가 기존의 사형수를 다룬 영화처럼 사형수의 삶에 휴머니티를 더하거나(‘그린 마일’), 사형도 하나의 형법 살인(‘데드 맨 워킹’)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예상과 달리 사형은 영화 초반에 진행되며, 그 과정을 보여주는 장면도 지나칠 만큼 차분하다. 그래서 오히려 더욱 사실적으로 보이며, 사형제도의 문제점을 다시 한번 새기게 만든다.

    영화의 본격적인 진행은 사형이 집행되고 나서부터다. 남편을 형장의 이슬로 떠나 보낸 레티샤(할리 베리)와 그 사형을 집행한 교도관 행크(빌리 밥 손튼)가 영화의 주인공이다. 이들은 사형 집행 뒤 더 어려운 일을 겪는다. 흔히 말하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데, 그 계기는 아들의 죽음이다. 같은 교도관이었지만 유약했던 행크의 아들은 행크가 보는 앞에서 자살해버리고, 감옥에 있던 아버지의 빈자리를 왜곡된 초콜릿 애호로 메웠던 레티샤의 아들은 레티샤가 보는 앞에서 교통사고로 숨을 거둔다.



    아들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행크는 교도관 생활을 그만두게 되고, 레티샤는 혈혈단신이 되어 희망 없이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레티샤가 일하는 카페에 행크가 들르면서 둘은 가까워진다. 이제, 서로의 비밀을 알게 될 그들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남편의 사형 집행인…알고 보니 내 사랑
    ‘몬스터 볼’이 단순한 사랑 이야기를 넘어 깊이 있는 사랑 이야기가 되고, 다시 동시대의 호흡까지 담아내는 ‘작품’으로 승화된 것은, 이 영화가 인생을 관망하는 망원경적 시각을 갖추는 동시에 삶의 미세한 감정의 흐름까지 예리하게 포착하는 현미경적 촉수마저 갖추었기 때문이다.

    인생을 관망하는 망원경적 시각을 갖추었다고 평가하는 것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두 사람의 사랑을 다루는 사이사이에 흑백 갈등(특히 흑백 갈등에 대한 문제 제기는 파격적이기까지 하다. 행크는 레티샤를 모욕한 자신의 아버지를 양로원으로 보내버린 뒤 레티샤를 집에 들인다), 남녀차별, 세대 갈등, 가정 문제까지 폭넓게 다루었다는 점 때문이다. 그렇게 다양한 스펙트럼을 형성하면서도 산만하지 않는 균형감을 유지했다는 것 또한 이 영화의 미덕이다.

    미세한 감정의 흐름을 포착한 현미경적 시각은 매우 섬세하게 그려져 있는 두 인물이 만나게 되는 과정에서 느낄 수 있다. 이 영화에는 두 인물이 만나 친하게 되고, 결국 함께 살게 되는 과정에 이르는 동기와 복선, 감정의 결이 살아 있다. 특히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지나쳐 값싼 눈물을 자아내지도, 너무 건조해서 감정이입을 방해하지도 않았다.

    여기서 마크 포스터 감독이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이라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카메라는 대상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멀리 떨어지지도 않는다. 적당한 거리에서 대상을 응시하며 관객과 더불어 생각하기를 희망하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가장 격정적이라는, 두 사람의 단 한 번의 섹스 장면조차 관음증과는 거리가 먼 카메라 포즈를 취한다. 그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대상과의 적당한 감정 조율을 통해 영화를 이끌고 가는 감독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아무래도 그가 할리우드 주류에서 시작한 감독이 아니라 독립영화의 대명사인 선댄스 영화제를 거쳐서 온 감독이기 때문인 듯하다. 비슷한 내용을 다루더라도 감독에 따라 영화는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

    특히 할리 베리는 이 영화로 올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렇게 말하면 별일 아닌 것 같지만, 흑인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은 74년 역사의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영화제 심사위원들의 선택이 탁월했다는 것은 이 영화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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