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00

2011.08.16

카프카 독서실

  • 입력2011-08-16 11: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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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프카 독서실
    카프카 독서실

    벽이다.

    엎드려 잘 때마다 이곳은

    바닥이 아니라 무른 껍질이라 생각했다.

    배에 힘을 주면 지그시 열릴 것 같은



    그 껍질을 깨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몸을 마음껏

    비벼 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주장해야 했다.

    쿵, 말문이 열리면 긴 오솔길이 펼쳐지곤 했다.

    한참을 걸었을 때 울창한 숲이 보였다.

    나는 구름을 먹고,

    신성한 사랑에 대해 논했다.

    풀숲에는 소리가 고여 있었다.

    풀을 헤치니 소리가 서로 밥을 먹고 있다.

    갑자기 구역질이 나서

    나무의 텅 빈 몸에 구름을 토했다.

    검은 말들이 꿈틀댔다.

    가련한 밤,

    문신을 새기는 꿈을 꾸었다.

    팔뚝 위에 피리를 새겨 넣자

    내 몸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창밖엔 십자가가 흐른다.

    가로등이 떠다닌다.

    감정 없이 장단만 있는 노래.

    이 방은 어둠이 몸 푸는 자리,

    얼굴도 없고 가슴도 없다.

    빗방울도 없이

    빗소리가 내리는 방.

    엎드려 자고 있으면

    살포시 몸에 감기는

    빈 말들의 뼈.

    ― 이재훈 ‘명왕성 되다’(민음사, 2011)에서

    빈말을 채워야 할 시간이 닥쳤다

    재수 시절, 나는 학원 대신 독서실에 다녔다. 유독 아침잠이 많았던 나는 오전 10시에 출근해 오후 11시에 퇴근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독서실도 일부러 집에서 좀 먼 데로 잡았다. 그래야 마음이 덜 흔들릴 것 같아서였다. 컴퓨터, TV, 그리고 침대와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 있어야만 했다. 독서실은 밤낮으로 어둡고 습했다. 스탠드를 켜면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에어컨에선 물이 뚝뚝 떨어졌다. 눅눅해진 책장을 넘기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퍽 서글퍼졌다. 시간 가는 줄도 알고, 시간이 잘 안 가는 줄도 알던 시기였다.

    혼자서 저녁 먹고 들어와 식곤증에 고개를 끄덕거리다 보면 “창밖엔 십자가가 흐”르는 게 예삿일이었다. 어떤 종교도 나를 붙잡아주지 못할 것 같았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으면 눈앞에 둥둥 “가로등이 떠다”녔다. 가로등은 점멸등처럼 자꾸 깜박거렸다. 그만큼 나는 불안했다. 기약 없는 일을 남들보다 일 년 더 해야 한다는 사실은 나를 움츠러들게 만들기 충분했다. 자책하는 날이 늘어났다. 나는 왜 이토록 유약한가. 나는 왜 사소한 것에 쉬 휘둘리는가. 카프카가 아니어서 나는 감히 ‘성’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사방에 덫이 깔린 것 같았다.

    어느 날이었다. 저녁 먹고 들어왔더니 어김없이 졸음이 쏟아졌다. 정신이 좀 들까 해서 독서실 창문을 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후 8시, 여느 때처럼 가로등이 켜지던 순간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뜬 것처럼 소스라치게 놀랐다. 머릿속에 빛줄기가 흡사 빗줄기처럼 내리쳤다. 그날이었다. 내가 독서실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나는 줄기차게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면서도 그게 시라고는, 시가 될 수 있다고는 단 한 번도 생각지 않았다. “오솔길”과 “울창한 숲”을 요리조리 헤치고 나가는 게 그저 즐거웠을 뿐이다. 계절이 바뀌고 히터 돌아가는 소리가 귀를 자극했지만, 이미 나는 마음속으로 시원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할 말은 아직도 “풀숲”처럼 곱슬곱슬 우거져 있었다.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독서실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됐다. 하루가 점점 짧게 느껴졌다. 인수분해를 하고 판구조론에 대해 공부해야 할 시간에 나는 말을 처음 배우는 심정으로 단어들을 장난감 블록처럼 가지고 놀았다. “팔뚝 위에 피리를 새겨 넣”으면 “내 몸에서 노래가 흘러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독서실은 무한한 가능성의 공간이 됐다. 어쩌면 나는 그곳에서 내 운명을 발견한 셈이다. 그래서 오늘도 “완성되지 않은 몸”들은 기꺼이 독서실에 간다. 시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기 위해서 스스로 ‘자기만의 방’을 찾아든다. 지금도 분명 “빈 말”들이 “뼈”가 돼 누군가의 “몸”에 “감기”고 있을 것이다. 빈말을 채워야 할 시간이 또다시 닥친 것이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종이를 꺼내야겠다. 더는 창백할 수 없는, 더없이 새하얀 것으로. 그리고 나는, 곧, 너를 채울 것이다.

    카프카 독서실
    오은 |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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