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96

2011.07.18

유희경의 ‘珉’

  • 입력2011-07-18 11: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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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희경의 ‘珉’
    유희경의 ‘珉’

    옆에 선 여자아이에게 몰래, 아는 이름을 붙인다 깐깐해 보이는 스타킹을 신은 아이의 얼굴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긴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끝이 하얗고 가지런하다 버스가 기울 때마다 비스듬히 어깨에 닿곤 하는 기척을 이처럼 사랑해도 될는지 창밖은 때 이른 추위로 도무지 깜깜하고 이 늦은 시간에 어디를 다녀오는 것일까 그 애에게 붙여준 이름은 珉이다 아무리 애를 써봐도 아득한 오후만 떠오르고 이름의 주인은 생각나지 않는다

    ― 유희경, ‘오늘 아침 단어’(문학과지성사, 2011)에서

    우연히 만난 그녀가 민이었으므로

    버스를 탄다. 간발의 차이로 자리에 앉는 데 실패한다. 아무래도 나는 절박함과 날렵함이 부족한 모양이다. 리시버를 귀에 꽂고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버스가 출발한다. 버스는 답답할 정도로 정확하다. 정거장을 거르는 법이 없다. 나는 시계를 보고 한숨을 내쉰다. 그때,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다. 사뿐사뿐 계단을 밟으며 한 여자아이가 버스에 올라탄다. 하필 내 옆에 서서 하얗고 가느다란 손으로 도넛 모양의 손잡이를 잡는다. 운명적으로.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필연적으로. 가수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개연적으로. 버스가 출발한다. 필사적으로.



    나도 모르게 흘끔흘끔 그녀를 쳐다본다. 이따금 헛기침을 하며 나라는 사람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걸 어필하려 애쓴다. 그녀는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 옥돌같이 반질반질한 피부가 창에 비친다. 나는 아까보다 그녀가 더 좋아진다. 버스가 코너를 돌 때마다 내 어깨와 그녀의 어깨가 서로 스친다. 부딪친다. 스파크가 인다. 우리는 멋쩍게 웃으며 목례를 한다. 그녀의 볼우물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 같다. 아찔하다. “버스가 기울 때마다” 한 가지씩 그녀의 다른 면이 보인다. 목에 있는 점, 까만 머리칼 사이에 듬성드뭇한 갈색 머리칼, 귀 밑에 있는 오래된 상처 자국…. 바로 그때, 마치 예정돼 있던 일처럼 버스가 급정거한다. 나와 그녀의 예기치 않은 충돌이 일어난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 죄송하다는 말을 입 밖에 낸다. 목소리가 드맑다. 나는 벌써 머릿속으로 옥구슬이 또르르 굴러가는 장면을 상상하고 있다. 아무래도 그녀를 사랑하게 된 것 같다.

    나는 어떻게 운을 뗄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저…… 근데 어디 가는 길인가요?”라고 슬쩍 물어야 하나, “이름이 뭐예요?”라고 대놓고 물어야 하나. 우유부단한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리시버 볼륨을 높였는데도 가수의 목소리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손잡이 하나에 온몸을 의지한 채 꾸벅꾸벅 졸고 있다. 나는 창을 통해서 그런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버스는 열심히 달리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시간은 멈춰버린 것 같다. 이름도 잘 모르는 어떤 호르몬이 내 몸에서 분비되는 상상을 한다. 그녀의 손을 잡고 거리를 누비는 광경을 떠올리자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약속시간에 늦었다는 사실은 벌써 잊어버렸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녀는 어느새 창밖에 있었다. 만원버스 안인데도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말 한 번 붙여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끝끝내 그녀의 이름을 알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이 몹시 서글펐다. 나는 그녀에게 민(珉)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별수 없었다. 그녀가 다름 아닌 민이었으므로. 입때껏 그 이름이 어울리는 사람을 그녀 외에는 본 적이 없으므로. 그녀는 내게 그야말로 옥돌이었던 것이다. 옥돌 같은 피부와 옥구슬 같은 목소리, 천연의 힘으로 어찌하기에는 그 자체로 이미 오롯했던 그녀, 민. 나는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 약속 장소로 향한다. 또 한 번의 ‘오늘 아침’이 밝아 있었다.

    잠에서 깨고 나니, 나만 ‘단어’처럼 침대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문득 그녀의 얼굴이, 그녀의 목소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절박함이 생겼다. 오늘은 분명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 이런 예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충분히 좋은 일이다. 나는 날렵하게 침대를 박차고 나온다. “이름의 주인”을 만날 생각에 기분 좋게 어지럽다. 심장이 뛴다.

    유희경의 ‘珉’
    시인 오은

    *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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