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33

..

찌든 세상 희망을 심는 사람들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4-04-29 15:2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찌든 세상 희망을 심는 사람들
    미국의 가톨릭 사제 토머스 베리(86)는 종교와 생태학을 결합한 종교생태학 운동의 창시자다. 그는 산스크리트어, 단테, 불교, 융, 유교, 아메리칸 인디언 문화, 동양예술, 진화과학에 통달한 학자이기도 하다. 이런 그가 자신의 사고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지금껏 자신이 읽은 책이나 학술연구가 아니라 어린 시절 마주쳤던 애팔래치아 산맥의 외딴 풀밭이라고 한다.

    “열 살 때 처음 그 풀밭을 발견했다. 백합꽃이 만발한 풀밭 아래로 작은 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작은 풀밭이 세상 만물의 기준이라는 걸 깨달았다. 좋은 경제학은 그곳을 보존할 것이고, 좋은 과학은 우리들이 그곳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고, 좋은 종교는 그곳에 담긴 메시지를 해석할 것이다.”

    물질과 영혼, 인간과 자연을 구분하는 이분법을 거부하고 대지와 문명에 대한 전체론적인 접근을 지지하는 토머스 베리는 우리에게 낯선 인물이다. 그의 책은 아직까지 국내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고, 일부 생태학 전공자들에게나 알려져 있는 정도다.

    그러나 그와 비슷한 생태주의적 사상을 갖고 그것을 묵묵히 실천하고 있는 이들은 전 세계에 수없이 많다. 성장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더 이상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지속 가능한 개발을 추구하고,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모든 생태계가 연결돼 있다는 생태주의적 관점을 이 사회에 퍼뜨리고 있는 이들. 그 가운데 특출나게 창조적인 대안운동을 실천하고 있는 이들 61인이 ‘틱낫한에서 촘스키까지’(원제 Visionaries)에 소개되고 있다.

    미국의 대안잡지 유튼 리더(Utne Reader) 편집자들이 ‘과연 우리에게 영감과 희망을 주는 인물인가, 우리에게 진정한 감동을 주는 메시지를 지닌 사람인가’를 기준으로 검토해 인물을 선정했다. 그리고 모두 일일이 찾아가 인터뷰하고, 그들의 저서와 자료를 모아 61명에 대한 짧은 전기 형태의 글을 만들었다.



    등장 인물들은 승려, 랍비, 가톨릭 사제, 신비주의자처럼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 실천하게 하는 정신적 스승에서부터 풀뿌리 지역운동가, 정치운동가, 도시공동체 회복과 환경보호를 위해 일하는 사회운동가, 댄서, 재즈가수, 공상과학 소설가, 라디오 토크쇼 진행자, 레스토랑 경영자, 대형광고 제작자, 심지어 게으름을 옹호하는 이들까지 다양하기 이를 데 없다.

    잡지 편집자이자 평화순례자인 사티시 쿠마르는 9살 때 자이나교 수도회에 들어갔고, 간디 후계자 비노바 바베가 이끄는 토지개혁운동에도 참여했다. 이후 틈틈이 생명평화운동을 기치로 내건 생태학 잡지 ‘리서전스(Resurgence)’ 의 편집자로 일했는데, 아침에 편집 일을 한 뒤 뜰로 나가서 점심에 먹을 야채를 따고, 명상하고 산책하는 삶을 통해 주변 사람들에게 영성(靈性)을 전파해왔다. 그에게 영성은 “행동의 결과보다 현재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에서 황홀감을 느끼는 일”이다.

    1971년 발간된 철학논문과 요리책을 결합한 ‘작은 지구를 위한 다이어트’라는 책으로 육식 중심의 미국인들에게 채식주의의 중요성을 알린 프랜시스 무어 라페, 미네소타 지역자립연구소의 데이빗 모리스와 영국의 사회비평가 존 팝워스 같은 이들은 일반인들에게 공동체 의식을 불어넣는 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이념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고 경제, 인권, 여성, 문화 등 여러 영역에서 저마다 창의적인 활동을 하는 이들의 면면도 흥미롭다. “사실상 인간을 위해 무언가 해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누구나 좌파다”고 주장하는 언어학자이자 진보적 지식인 노엄 촘스키, “흑인들이 해방을 위한 투쟁에서 성과를 올리려면 아직 해소되지 않은 슬픔이라는 유산을 떨쳐버려야 한다”고 말한 작가 벨 훅스, 방글라데시 빈민은행인 그라민 은행을 창립한 무하마드 유누스 등이 있다.

    또 ‘동양사상과 물리학’이란 책으로 잘 알려진 생태철학자이자 물리학자인 프리초프 카프라, “환경의 위기는 사실상 욕망의 위기”라고 문제의 핵심을 짚고 있는 빌 맥키벤, 조화로운 공동체를 만들자고 노래하는 ‘돈 워리, 비 해피(Don’t Worry, Be Happy)’의 가수 바비 맥퍼린이 눈길을 끈다.

    인물들에 대한 소개가 간명하고 핵심이 잘 드러나 있지만, 인물의 무게에 비해 너무 짧은 글이 단점이다. 그러나 이 책을 토대로 각 인물 소개 글 뒤편에 첨부된 주요 저작과 출전을 참조한다면 더 깊은 그들의 진면목을 읽을 수 있을 듯하다. 영미권 중심의 인물 선정도 아쉽다. 그러나 번역자의 말처럼 ‘세상을 늘 어둡고 불우한 곳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대를 듬뿍 불어넣어주는 책’ 중의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존 스페이드·제이 월재스퍼 지음/ 원재길 옮김/ 마음산책 펴냄/ 612쪽/ 2만4500원





    화제의 책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