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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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 빈곤의 현장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4-01-30 10: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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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험!  빈곤의 현장
    요즘 우리 사회는 평행선을 달리는 기차레일처럼 부유층과 빈곤층으로 나뉘어 갈수록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다. 평당 가격이 3000만원을 넘어서는 아파트에 살며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이가 있는 반면, 카드 빚 몇 백만원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이도 있고, 돈이 없어 자식을 안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이도 있다. 소비와 향락에 몸을 맡긴 부자동네 사람들이 더욱더 많은 부를 축적하고 있는 동안 죽어라 일해도 안정된 삶을 꾸려갈 수 없는 사람들, 대물림되는 가난 앞에서 절망하는 ‘밑바닥 인생’들은 더 나은 삶으로 가는 길을 좀처럼 찾지 못하고 있다.

    최근 한국개발연구원(KDI) 조사에 따르면 외환위기 이후 최저생계비 미만의 절대 빈곤층이 2배로 늘어 전체 인구의 11.4%나 되고, 무직자 가구도 18.8%에 이른다. 또 빈곤의 대물림 현상이 각종 조사에서 드러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우리에게만 나타나는 게 아닌 모양이다. 선진국이자 복지의 모범국가인 영국에서도 같은 현상을 겪고 있다. 영국의 진보적 신문 ‘가디언’의 칼럼니스트이자 방송인인 폴리 토인비는 그 실상을 파헤치기 위해 2002년 직접 런던 빈민가인 클래펌 파크로 뛰어들었다. 그는 빌딩 청소원으로, 병원 잡역부로, 빵공장 노동자로, 텔레마케터로, 간병인으로 ‘위장취업’해 살면서 빈곤의 악순환에 갇혀 희망을 거세당한 채 살아가는 영국 저임금 노동자들의 실상을 파헤쳤다. 그 기록이 ‘거세된 희망’(원제:Hard Work)이다.

    먼저 토인비는 자신의 고임금 직업을 그만두고, 신분을 위장했다. 그리고 클래펌 파크의 ‘수십년 동안 방치된 채 역한 냄새가 나는’ 아파트로 들어갔다. 그러나 오랫동안 중산층으로 살던 그가 빈곤층의 일상을 자연스럽게 ‘연기’하기는 쉽지 않았다. 빈 아파트를 채우기 위해 돈이 필요했던 그는 국가가 운영하는 사회기금을 타기 위해 보조금 지급소를 찾아갔다. 욕지거리가 난무하는 가운데 그가 통사정을 하고 받은 돈은 400파운드(당시 환율로 한화 약 70만원). 거기에서 그는 약자를 위해 존재한다는 사회기금도 가난할수록 대출을 적게 해준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다.

    일자리가 급했던 그는 용역회사를 통해 병원 잡일을 구했다. 환자 이송 등 힘든 일임에도 임금은 시간당 4.35파운드(약 7000원)에 그쳐 대출금 등으로 수도·가스·전기요금, 아파트 임차금 59파운드(약 11만원) 등을 주고 나자 앞이 막막해졌다. 첫 2주 동안 그는 4.04파운드로 살아야 했고, 도리어 70.09파운드의 빚을 졌다.



    그는 이전에 자신이 썼던 기사를 떠올렸다. 보조금을 받고 생활하다가 취업을 하면 도리어 엄청난 금전적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것은 모르고 무조건 실직자에게 일을 찾아줘야 한다고 주장한 기사였다. 그는 임차료도 내지 않고 구직자 수당 53.05파운드를 받으며 밑바닥 생활을 하는 쪽이 빚더미에 허덕이며 일주일에 최저임금 164파운드를 받고 일하는 쪽보다 더 낫다는 것을 깨닫고 부끄러워했다.

    모순은 계속됐다. 일은 노동자가 하지만 돈은 용역회사가 더 많이 챙겼고, 돈이 없으면 직장 옮기기도 어려웠다. 병실보조원 같은 저임금 노동자는 같은 노동에 대해 30년 전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았다. 물가상승 등을 감안해 당시 임금을 계산하면 일주일에 210파운드였지만 현재는 174파운드에 불과했다. 저자는 스스로의 노력으로 빈곤에서 벗어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상류층과 하류층 사이의 소득격차가 벌어지면서 사회적 상승이동은(그리고 하향이동까지도) 돌연 멈춰버렸다. 에스컬레이터가 느려졌을 뿐 아니라 포화상태에 이르러 밑에 있는 사람은 결코 위로 올라가지 못했다.’

    저자는 빈곤층에서 중산층으로 올라가는 사다리는 일찌감치 끊어졌다고 단정한다. 전반적으로 모든 사람이 이전보다 풍족해졌지만 빈곤층은 평범한 생활을 꾸리기도 힘들어진 게 사실이다. 빈곤선(국민 전체 소득 중앙값의 60% 이하) 아래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이 1970년보다 3배나 증가했다.

    온몸으로 영국 빈민층의 현실을 체험하는 일은 애초 책을 쓰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몇 달 만에 끝났다. 그리고 저자는 자신이 살던 옛집으로 돌아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삶과는 다른 삶을 좀더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 기쁘기도 했지만 그보다 “저곳이 아닌 이곳에서 태어난 게 얼마나 행운인가 하는, 안도감에서 오는 형언하기 힘든 기쁨” 때문이었다.

    이 책은 국내 통계를 곳곳에 집어넣어 영국과 한국의 현실을 비교할 수 있도록 했다. 문제의 근본은 같기 때문. 결국 저자가 제시하는 바는 기회와 보상이 균등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성장과 분배는 양립 가능하기 때문에 ‘선성장 후분배’보다 사회정의 실현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이다.

    폴리 토인비 지음/ 이창신 옮김/ 개마고원 펴냄/ 384쪽/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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