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95

2003.07.31

살인에 얽힌 진실을 찾아라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03-07-24 15: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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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에 얽힌 진실을 찾아라
    오랜만에 역사와 추리가 옹골지게 만난 작품이 나왔다. 김탁환의 ‘방각본 살인사건’에는 사건의 전모가 밝혀질 때까지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추리소설의 매력이 흠씬 풍긴다. 게다가 1778년 조선 땅을 무대로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백동수 등 젊은 실학자들과 홍국영, 채제공과 같은 당대의 정권 실세들이 살아 움직이는 역사소설이다.

    때는 정조 즉위 2년째인 1778년, 의금부 도사 이명방이 장안을 어지럽히는 연쇄살인사건의 수사를 맡는다. 유력한 용의자는 인기 매설가(소설가) 청운몽. 그는 아홉 건의 살인을 저질렀다고 자백하고 능지처참형을 선고받는다. 형장으로 가는 청운몽, 그러나 거짓말을 할 수 없을 것 같은 청운몽의 붉은 입술을 보며 형 집행을 맡은 이명방은 마음이 흔들린다. ‘범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닐까.’ 애초에 그는 범인일 수 없다. 그때부터 독자들의 시선은 바빠진다. 형을 집행하는 의금부 관원들, 그리고 형장 주변을 가득 메운 수많은 구경꾼들 가운데 진짜 범인은 누구인가.

    청운몽은 허망하게 죽지만 평소 그를 아끼던 이들이 그의 누명을 벗겨주기 위해 나선다. 바로 젊은 실학자 그룹 ‘백탑파’다. 이 소설의 일인칭 화자인 이명방은 마상무예의 달인 야뇌 백동수에게서 검술과 궁술을 배운 인연으로 백탑파와 교우한다. 청운몽의 형이 집행된 후 연암 박지원의 집에서 백탑파를 만난 이명방은 그들의 도움을 받아 사건의 진실에 다가간다.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쓰여진 이 소설에는 이명방 외에 또 한 명의 가상인물이 등장한다. 조선팔도에 피는 진귀한 꽃을 기르는 화광(花狂) 김진. 이름 그대로 꽃 미치광이다. 학문에 조예가 깊은 그는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로 중인이나 상민을 가리지 않고 교우했던 백탑파 서생들의 특징을 응축해놓은 존재다.

    ‘방각본 살인사건’의 추리 기법은 ‘셜록 홈즈’를 연상케 한다. 김진이 홈즈라면 이명방은 홈즈의 친구이자 조수인 와트슨이다. 김진이 뛰어난 관찰력으로 의금부 관원들이 놓친 단서를 찾아내고 이명방이 행동대원으로 나선다. 나중에 사건의 전후 관계를 속시원하게 해설해주는 것은 다시 김진의 몫이다. 여기에 탁월한 무예 실력을 갖춘 야뇌 백동수가 곤경에 빠진 이명방을 수차례 구해내면서 소설에 박진감을 더한다.



    등잔 밑이 어둡다 했던가. 진범은 그들 가까이에 있었고 소설의 하권이 시작되자마자 범인은 의외로 쉽게 의금부의 오랏줄에 묶인다. 다소 맥이 빠지는 듯하지만 사건은 이제부터다. 살인사건 뒤에는 인기 매설가의 명예와 돈을 노리는 것 이상의 음모가 있었다. 남인·서인·노론·소론으로 갈려 싸우던 당시의 복잡한 정치구도가 얽혀들고 ‘탕평’을 위해 칼을 빼든 젊은 왕의 존재가 때로 독자들을 헷갈리게 만든다.

    정조는 즉위 직후 쿠데타의 위기에 몰리지만 홍국영과 채제공을 좌우에 두고 백탑파를 기용해 어지러운 정국을 절묘하게 풀어나간다. 저자는 여기에 현실정치를 대입했다. 386세대에 대한 기대와 우려를 백탑파을 통해 드러냈다. 홍국영과 채제공은 수시로 백탑파에게 부족한 정치적 감각과 연륜을 보태는 역할을 한다. 결국 백탑파가 보수세력의 방해를 뚫고 규장각에 진출하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사건의 중심축이 매설가와 방각소설이라는 점도 놓치지 말자. 저자는 ‘방각본 살인사건’에서 18세기 후반 상업의 발달과 함께 필사소설이 방각소설로 바뀌는 과정을 상세히 묘사했다. 민간인 방각업자가 이윤을 남기기 위해 매설가로부터 작품을 사면서 서책의 판각, 인쇄, 유통이 이뤄지며, 세책방(도서대여점)을 통해 일반 독자들에게 서책이 전해진다. 당시 소설은 하찮고 허황된 글이라 폄하되고 때로는 사회 전복을 꾀하는 내용 때문에 정치적 탄압을 받았지만, 민중은 소설을 사랑했다. 소설 마지막 대목에서 정조는 살인사건의 원흉으로 지목된 방각소설을 모두 불태워 없애라고 명한다. 그러나 작은 이야기(小說)는 지금도 우리 곁에 있지 않은가. 저자가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바로 이 대목이라 생각한다.

    사건의 추리과정을 둘러싼 다양한 문헌을 통한 고증이 겉도는 느낌을 줄 수도 있으나, 역사소설의 장중하고 화려한 맛을 충분히 즐겨볼 것을 권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복잡한 미로 속을 헤매는 듯한 지적 유희가 결코 싫지만은 않았던 것처럼 그 자체가 소설의 맛을 풍부하게 해준다. 조만간 백탑파 시리즈 두 번째 이야기 ‘열녀문의 비밀’이 이어진다.

    방각본 살인사건/ 김탁환 지음/ 황금가지 펴냄/ 상권 324쪽, 하권 304쪽/ 각 권 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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