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77

2003.03.27

인간 진화부터 현재까지 ‘걷기의 모든 것’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03-03-20 13: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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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 진화부터 현재까지 ‘걷기의 모든 것’
    근육이 긴장한다. 한쪽 다리는 지상과 하늘 사이에서 몸을 지탱하는 기둥이다. 다른 쪽 다리는 뒤에서 앞으로 흔들리는 진자다. 발꿈치가 닿는다. 체중이 온통 발바닥에 쏠린다. 엄지발가락이 땅바닥을 밀어내자 정교하게 균형 잡힌 무게중심이 다시 한번 흔들린다. 양쪽 다리가 위치를 바꾼다. 리듬에 맞춰 북을 치는 것 같다. 걷기의 리듬이다. 걷는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가장 모호한 동작이다.

    한 발을 내딛는 동안 일어날 이처럼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분석해본 적이 있는가. 문화비평가이며 환경운동가인 레베카 솔닛의 ‘걷기의 역사’는 단순히 이동을 위한 걷기가 아니라 종교, 철학, 자연경관, 도시정책, 해부학, 알레고리, 심장박동과 관련을 맺고 있는 걷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가 걷기의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1980년대 네바다 핵실험기지에서 열린 반핵시위에 참가하면서부터. 사막을 지나 도랑을 넘어 출입금지 구역으로 걸어가는 행동 그 자체가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임을 깨닫는다.

    때론 쉬기 위해 걷는다. “생산지향적 문화에서 생각하는 것은 대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아무것도 안 하기는 어렵다. 아무것도 안 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뭔가를 하는 척하는 것이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에 가장 가까운 일은 걷는 것이다.”

    저자는 언뜻 보기에 비생산적인 걷기에서 사유의 리듬을 발견한다. 그리고 공상하기, 구름 쳐다보기, 거닐기, 윈도쇼핑 등 걷기와 관련된 즐거운 행위들에 의미를 찾아주기로 한다.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의 1부는 걷기와 생각하기의 역사다. 먼저 사유의 방법으로 걷기를 택한 철학자들이 등장한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걸으면서 강의했다고 하는 아테네 학당의 복도와 산책로에서 ‘소요(逍遙·주변을 걷는다는 의미)학파’가 탄생했다. 걷기를 좋아했던 철학자들은 많은 일화를 남겼다. 걷기 예찬론자로 혼자 걷기를 즐겼던 루소는 ‘고백록’에서 “나는 걸을 때만 명상에 잠길 수 있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고 했고, 토머스 홉스는 걷다가 떠오르는 생각을 기록하기 위해 휴대용 잉크병이 장착된 지팡이를 가지고 다녔다. 키에르케고르는 어수선한 도시를 걸으며 인간을 연구했다.



    걷기는 순례를 통해 종교적 행위로 자리잡는다. 순례는 한 발자국씩 육체를 움직여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영혼의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 순례의 길을 떠날 때 사람들은 세상 속에서 자기가 차지했던 복잡한 위치(가족·인연·지위·위무)를 뒤로 한다.

    현대사회에서 순례는 축제와 행진, 집회, 시위, 봉기, 혁명 등 또 다른 걷기 속에서 재현된다. 간디의 유명한 ‘소금행진’ 이래 걷기는 비폭력 시위의 가장 보편적인 수단으로 자리잡았다. 마틴 루터 킹 암살 30주년 추모행진, 네바다 핵실험기지까지의 반핵 평화행진, 근위축증협회의 오래 걷기대회, 에이즈 퇴치 걷기대회 등은 내면의 투쟁을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한 걷기 사례다.

    2부 ‘정원에서 세상 밖으로’는 걷기의 공간이 확장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정원과 산책로를 오가던 걷기에서 들판과 숲, 그 너머 새로운 세계를 찾아가는 여행(물론 도보여행)이 유행하면서 ‘산책문학’과 ‘기행문학’ ‘등정기’가 출현했다.

    3부와 4부에서 저자는 도시에서의 걷기를 예리하게 관찰한다. 사실 현대 거대도시들은 걷는 자의 공간이 아니라 운전자의 공간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하나의 실내에서 다른 실내로(집·자동차·사무실·상점·헬스클럽) 왕복할 뿐 건물 밖으로 나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심지어 미국 남부 캘리포니아에서는 목적 없이 거리를 어슬렁거리려면 의심의 눈초리를 감수해야 한다.

    이제 도시인들은 걷기 위해 돈을 지불한다. 헬스클럽에서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거리, 시간, 경사가 잘 조절된 러닝머신 위를 달린다. 하지만 180cm 길이의 고무벨트 위에서 자연풍경과 지형을 느끼는 체험으로서의 걷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걷는 것은 살을 빼기 위한 운동으로 전락했다.

    ‘걷기의 역사’는 연대기적으로 잘 정리된 역사책이 아니다. 직립보행을 가능하게 한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부터 도시설계, 미로, 성문화, 걷기 클럽 등 다양한 걷기 행위에 대한 설명이 개인적 체험과 맞물리며 다소 산만하게 전개된 측면이 아쉽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동안 걷기와 생각하기는 어느새 하나가 된다. 창 밖을 보라. 걷기에 썩 좋은 날씨다.

    걷기의 역사/ 레베카 솔닛 지음/ 김정아 옮김/ 민음사 펴냄/ 480쪽/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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