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18

2002.01.17

이것이 ‘포트폴리오 인생’ 지침서

  • < 김현미 기자 > khmzip@donga.com

    입력2004-11-05 15: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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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이 ‘포트폴리오 인생’ 지침서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진리가 3단계를 거친다고 했다. 첫째 조롱을 받고, 둘째 반대를 받다가, 셋째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20여년 전 찰스 핸디가 주장한 ‘포트폴리오 인생’도 그 과정을 거쳐 이제는 자명한 현실이 되었다.

    1981년 대처 총리 시대 초창기인 영국에서, 핸디는 앞으로 2000년이 되면 종신계약이라 불리는 전일제 직장에 근무하는 영국 노동자가 전체 노동력의 절반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로서는 황당무계한 소리였다. 핸디는 나머지 절반의 노동력은 자영업자, 파트타임 근무자, 임시직 노동자, 실업자가 될 것이라면서 앞으로 생계를 유지하려면 서로 다른 고객이나 거래처의 일감을 받아 일하는 포트폴리오 인생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인생의 포트폴리오에는 돈 버는 일뿐만 아니라 자원봉사, 공부, 부부가 함께 하는 가사 등 서로 다른 범주의 일들로 채워지며 직장과 가정의 경계가 모호하고 직장 분위기는 여가와 즐거움이 있는 다른 형태의 일로 대체될 것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코웃음을 쳤다.

    20년 뒤 핸디의 예측대로 영국에서 종신계약 전일제 직장에 근무하는 노동력은 40%로 떨어졌다. 94년에는 5명 이하를 고용하는 초미니 회사가 전체 영국 회사의 89%를 차지했고, 96년 영국 회사의 67%가 1인 회사였다.

    “예측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내가 가르쳐온 것을 몸으로 실천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대기업의 보금자리를 떠나 나 혼자 바람찬 들판에서 풍찬노숙하는 것이 무엇인지 느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20세기 고용문화의 큰 기둥이었던 대기업, 그 코끼리들의 세계에서 벗어나 벼룩처럼 나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고 결심했다. 여기서 벼룩은 프리랜서를 가리키는 말이다.”

    1981년 7월25일 핸디는 자신의 예측대로 자발적 실업상태, 즉 포트폴리오 인생을 시작했다.



    사실 그에게도 독립은 두려운 것이었다. 첫해 크리스마스는 고독했다. 날아오지 않는 파티의 초청장을 그리워했고, 어쩌다 행사장 같은 데 참석했을 때 자신의 이름 밑에 아무런 기관명도 붙어 있지 않은 것을 보고 발가벗은 느낌을 받았다. 그것이 코끼리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벼룩의 인생이었다. 그때 그는 이렇게 자문한다. “만약 내가 아무 곳에도 소속되지 못한다면 과연 내가 남들에게 가치 있는 사람일까?”라고.

    핸디의 최근작 ‘코끼리와 벼룩’은 회고록의 성격을 띤 경제·경영서다. 그는 솔직하게 자신이 살아온 길을 예로 들어가며 사회의 변화, 그 변화 속의 기업과 개인들의 관계, 공동체와 개인의 성숙을 논한다. 무엇보다 이 책의 특징은 에세이 형식으로 씌어졌지만 자본주의의 과거와 미래를 돌아보게 하는 문명비판서이자 학교와 종교, 가족의 변화를 분석하는 문화론, 조직의 변화와 대응을 진단하는 비즈니스 진단서, 직업과 사회적 삶의 변화를 예측하는 미래학, 불확실한 상황에서 성공을 거두는 자기 혁신의 원리를 일러주는 성공·처세학 등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만약 ‘성공’에 방점을 찍은 독자라면 이 책의 제3부 ‘독립된 생활’부터 읽어도 좋다. 3부는 독립 직후 감수해야 하는 고립감에서 벗어나는 방법(스스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든다)과 ‘남들보다 낫기보다는 남들과 다르게’ 되려는 과정, 마감 없는 인생이 된 후 돈 버는 일과 가정일(그동안 아내가 일방적으로 맡아왔던 일), 자원봉사, 학습, 운동 등을 어떻게 구획 지으며 병행할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세상의 ‘변화’를 따라잡고 싶은 독자에게는 2부 ‘인터넷 시대의 기업문화(자본주의의 과거, 현재, 미래)’가 적합하다. 철저한 위계질서와 열차 시간표처럼 업무가 진행되는 기업을 그는 아폴로형 회사라 명했다. 20년 전 일본의 회사들은 아폴로 원칙에 충실했다. 그러나 21세기 문턱에서 그들은 뒤떨어지고 있다.

    물론 조직에는 논리와 질서를 상징하는 아폴로 외에도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갖고 있는 제우스와, 팀워크를 상징하는 아테네, 창조적 개인을 상징하는 디오니소스가 함께 존재한다. 지금까지 거대한 코끼리들이 아폴로의 모습을 추구했다면, 이제 디오니소스와 같은 연금술사들이 실력을 발휘하는 시대라고 했다.

    핸디는 자본주의가 구축한 문명에 대해 비판적이지만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는다. 자본주의는 현재 시장에서 통용되는 유일한 게임이며, 설혹 그것을 멈추고 싶더라도 우리에게는 방법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다만 “좀 덜 피곤한 형태의 자본주의는 없을까”라는 인간적인 물음을 던질 뿐이다. 그래서 그의 문명비판은 대책 없는 공허한 메아리가 아니다.

    IMF 시대에 우리에게 많은 위안을 주었던 그의 또 다른 저서 ‘헝그리 정신’이나 ‘홀로 천천히 자유롭게’를 통해 핸디의 팬이 된 독자라면 유년시절 기억으로 출발한 1장 ‘시작으로 되돌아가서’부터 차근차근 읽기를 권한다. ‘코끼리와 벼룩’은 전문용어를 늘어놓으며 ‘경쟁’에서 ‘살아남기’를 강요하는 처세학에 질린 독자들에게 따뜻한 감동과 함께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준다.

    코끼리와 벼룩/ 찰스 핸디 지음/ 생각의 나무 펴냄/ 384쪽/ 1만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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