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13

2013.11.18

70세 독재자 센티멘털 訪中 청와대 정보력 낙제점

김정일과 함께 김정은 열차 탑승 대형 오보…남부 양저우 들른 7박 8일 강행군

  • 김승재 YTN 기자·전 베이징 특파원 sjkim@ytn.co.kr

    입력2013-11-18 10: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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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0세 독재자 센티멘털 訪中 청와대 정보력 낙제점

    2011년 5월 23일 중국 양저우 서우시 호수를 유람하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일행의 유람선. 중국 누리꾼이 촬영해 인터넷에 올린 사진이다.

    필자가 경험한 고(故)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4차례 방중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단연 7번째 방중이다. ‘김정은 단독 방중’이라는 한국발(發) 오보가 전 세계를 시끄럽게 했기 때문이다. 오보의 중심엔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가 있었다. 대북 정보력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였다. 필자 역시 이러한 오보의 양산에 한몫한 가해자임과 동시에, 그로 인한 정신적 피해자이기도 했다. 이번 호에서는 이때의 방중에서 김 위원장과 장쩌민(江澤民) 전 중국 국가주석이 만난 내용도 함께 전한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김정일-장쩌민 회동은 성사되지 않았다는 분석을 내놓은 바 있다.

    한국발 오보의 시작은 청와대

    2011년 5월 20일 아침 국내 한 유력 언론사가 ‘김정은, 투먼 통해 방중’이라는 기사를 긴급 타전했다. 곧바로 당시 이명박 정부의 청와대 핵심 관계자가 기자들에게 이를 확인해주는 발언을 했다. 국내 언론을 비롯한 전 세계 언론은 김정은의 단독 방중 소식을 긴급 타전했다. 북한의 어린 후계자가 처음으로 국제무대에 데뷔한다는 점에서 김정은 방중은 전 세계의 관심을 끌 만한 빅 이슈였다. ‘지는 해’인 김 위원장의 방중보다 파괴력이 훨씬 더 큰 사안이었다.

    5월 20일 아침 기사를 작성하면서 필자는 ‘김정은 탑승 추정 열차 중국 진입’이라고 썼다. 기사에 ‘추정’이라는 단어를 붙인 것. 당장 데스크로부터 전화가 왔다. “타사 모두 단정적으로 ‘김정은 탑승 열차’라고 나가는데 우리만 ‘추정’이라고 어정쩡하게 기사가 나간다. 우리도 단정적으로 쓰자.”

    필자의 답은 이랬다. “김정은이 탔는지 본 사람이 있습니까. 확인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현 상황에서는 추정일 뿐입니다. 심지어 김정일 위원장의 전용열차가 들어왔을 때도 만일의 가능성 때문에 ‘추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추정’을 붙이는 게 옳다고 봅니다.”



    하지만 “청와대가 확인해준 사항”이라는 데스크의 말에 더는 할 말이 없었다. 필자의 정보력이 청와대보다 나을 리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청와대의 확인으로 ‘김정은 방중’이 전 세계 언론을 달구는 중이었다. 필자는 결국 ‘김정은 방중’을 기정사실화하고 생방송에 참여했다. 5월 20일 아침 10시 뉴스부터 오후 4시 뉴스까지 ‘김정은 방중’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이날 오후 휴대전화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우리 측 외교 소식통이었다. “김 기자, 고생 많네요. 그런데 김정은이 탄 거 확인한 겁니까?” 그가 대뜸 꺼낸 이 한 마디에 아차 하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온몸을 휘감았다. “그러게요. 저도 신중하게 가려고 했는데 청와대에서 확인해줬다니 도리가 있나요. 김정은이 방중한 게 아닌가요?”

    상대 목소리에 짐짓 힘이 들어갔다. “글쎄, 모습을 봤다거나 확인된 바가 아무것도 없는데, 왜 그리 단정적으로 보도하는지 궁금해서 그렇지….” 느낌이 묘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서울 데스크에 연락을 했다. “김정은이 탄 거 확실합니까? 아무래도 아닌 거 같은데 청와대 쪽에 한 번 더 확인하시죠.” 그리고 30분 후 우리 정부는 김 위원장의 탑승은 확인됐지만 김정은의 탑승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발표해야 했다. 청와대 관계자 발언을 그대로 받아썼던 모든 언론사가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됐다.

    외교 소식통은 시간이 흐른 뒤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와서 말이지만, 김 기자에게 전화한 것은 ‘김정은 단독 방중’이 아니란 사실을 확인한 뒤 이를 우회적으로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청와대 얘기라 해도 그대로 믿어선 안 된다. 1차 잘못은 청와대에 있지만 한심하기는 언론사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멋대로 보도해놓고 김정은이 아니니까 뒤늦게 자신들은 숨은 채 정부만 욕하는 거 아닌가.”

    또 다른 고위급 외교 소식통은 격앙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김정일 방중이건 김정은 방중이건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결정적으로 확인되기 전까지는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다. 그런데 어떻게 청와대가 직접 나서서 그렇게 경솔한 판단을 할 수 있나. 아침에 이렇게 말했다가 오후에 뒤집는다는 건 정말 엄청난 이슈다. 더는 말하고 싶지도 않다. 중국이 우리를 얼마나 비웃었겠나.” 그가 그렇게 흥분한 모습을 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열차 내 숙박하며 사흘간 강행군

    70세 독재자 센티멘털 訪中 청와대 정보력 낙제점

    7번째 방중 당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방문한 장쑤성 최대 슈퍼마켓 체인점 내부.

    김 위원장의 7번째 방중 가운데 가장 관심을 끈 일정은 양저우 방문이었다. 5월 20일 새벽 지린성 투먼을 통해 중국에 들어선 김 위원장은 헤이룽장성의 무단장과 지린성 창춘 등을 들른 뒤 5월 22일 밤 8시 무렵 장쑤성 양저우에 도착했다. 이틀 밤을 열차 안에서 보내며 사흘간 무려 3000km를 달려 양저우에 모습을 드러낸 것. 건강이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 김 위원장이 이렇게 장거리 이동을 할 것이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양저우에서는 2박 3일을 머물렀다. 7번째 방중 기간 중 한곳에 가장 오래 머문 기록이다.

    김 위원장은 왜 양저우에 갔을까. 당시 방중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필자는 베이징 사무실에서 여러 취재 루트를 통해 김 위원장 일행의 양저우 행적을 추적했다. 양저우 영빈관에서 하룻밤을 묵은 김 위원장 일행은 5월 23일 오전 숙소에서 나와 서우시 호수를 찾았다. 양저우에서 가장 유명한 호수로, 항저우의 서호와 비견되는 곳이다. 1991년 10월 고 김일성 주석은 장쩌민 주석과 함께 서우시 호수에서 수상 유람을 즐기기도 했다.

    호수 관광을 마친 뒤 김 위원장은 징아오 태양에너지 유한공사를 찾았다. 이 회사는 2010년 3분기 태양전지 생산과 판매 분야에서 세계 1위를 차지한 곳이다. 에너지난에 시달리는 북한이 태양광과 풍력에너지 등 신재생에너지 분야에 관심이 있음을 엿볼 수 있는 일정이었다. 오후에는 장쑤성 최대 슈퍼마켓 체인점을 방문했다. 이 업체는 원자바오 전 총리가 재임 시절 두 차례 방문해 농촌시장 개척에 큰 도움이 됐다며 발전상을 치하한 회사였다. 김 위원장 일행은 이날 밤 양저우 영빈관에서 장쑤성 예술단의 공연을 관람했다. 공연과 만찬 자리에 장쩌민 전 주석이 함께했을 것으로 관측됐다.

    앞서 말했듯 양저우는 1991년 10월 당시 김 주석과 장 주석이 함께 찾은 곳이다. 두 사람은 난징에서 정상회담을 마친 뒤 이곳을 방문했다. 김 위원장도 장 주석과 4차례나 정상회담을 갖는 등 각별한 사이였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당시 많은 언론은 김 위원장이 양저우에서 장 전 주석을 만났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양저우 현지에서 장 전 주석의 모습은 일절 노출되지 않았다.

    반면 김 위원장의 방중 직후 한국 정부는 김 위원장과 장 전 주석이 회동하지 않았다는 분석을 내놨다. 2011년 6월 3일 국내 언론은 복수의 정부 고위 소식통을 인용해 “김 위원장과 장 전 주석이 만났는지 여부를 공식 확인할 길이 없으나, 입수된 여러 첩보와 정황을 종합해볼 때 만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정부 고위 소식통은 그러면서 “장 전 주석은 당초 알려진 것과 달리 북한 세습체제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갖고 있으며 이것이 두 사람의 회동 불발설을 뒷받침한다”고 전했다.

    사실이었을까. 시간이 꽤 흐른 뒤 중국의 한 유력 인사는 필자에게 이때 양저우에서 김 위원장과 장 전 주석이 만났다고 말했다. 장 전 주석이 북한 세습체제에 부정적이라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는 설명이었다.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보력 한계를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양저우에서 김 위원장의 모습은 외신 카메라 등에 포착됐지만, 장 전 주석은 한 차례도 노출되지 않았다. 물론 어느 언론 매체에서도 양자 간 회동을 ‘확인’할 수 없었다. 장 전 주석의 파워와 그에 대한 보안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 위원장의 7번째 방중과 관련해 기억해둬야 할 사실 하나는 중국이 관행을 깨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중국 정부는 통상 김 위원장이 일정을 마치고 귀환 길에 올라 신변 안전이 확보됐다고 판단됐을 때 방중 사실을 공개했다. 중국 관영매체의 보도 또한 이 시점에 맞춰 이뤄졌다.

    그런데 7번째 방중에서는 방중 이틀째인 5월 21일 관련 보도가 나왔다. 중국공산당 기관지 ‘런민일보’의 영문 자매지인 ‘글로벌타임스’가 인터넷판을 통해 소식을 전했다. 보도 내용을 보면 웃음이 나온다. 외신을 인용하는 형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한국 언론들이 김 위원장이 중국을 깜짝 방문했다고 보도했다’고 전한 것. 역시 절충에 능한 중국다웠다.

    70세 독재자 센티멘털 訪中 청와대 정보력 낙제점

    2011년 5월 21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왼쪽)과 후진타오 당시 중국 국가주석의 만남. 중국중앙(CC)TV가 공개한 영상이다(왼쪽). 2011년 5월 24일 장쑤성 난징의 ‘판다 전자’를 방문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과 그의 4번째 부인 김옥의 모습. 중국 누리꾼이 촬영해 인터넷에 올린 사진이다.

    마지막 직감? 센티멘털한 여행

    중국 관영매체 보도에 이어 이튿날인 5월 22일에는 원자바오 총리가 ‘김정일 방중’을 공식 확인해줬다. 방중 기간에 중국 정부 인사가 대외적으로 그 사실을 언급한 것 역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일본 도쿄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 원 총리는 이명박 대통령에게 “중국의 발전 상황을 이해하고 이를 북한 발전에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주려는 목적으로 김정일 위원장을 초청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기자로서 가장 반가운 일이 있었다. ‘만 리 방화벽’이라 부르는 악명 높은 중국의 인터넷 검열 시스템이 이때는 작동하지 않은 것이다. 과거 김 위원장의 방중 기간에는 중국의 유명 포털사이트나 트위터에서 관련 단어 검색을 차단했다. 그런데 7번째 방중 때는 중국 누리꾼들이 ‘김정일 방중’과 관련한 의견 개시나 검색을 얼마든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 때문에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와 인터넷 카페 등에는 김 위원장의 행적 및 동향이 실시간으로 올라왔다. 물론 모두 맞는 정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는 ‘김정일 방중’의 행적을 추적해야 하는 기자 처지에서는 소중한 정보였다. 중국이 보여준 이렇듯 달라진 모습은 김정일 방중과 관련해 더는 북한 의도에 끌려다니지만은 않겠다는 중국 정부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을 것이다.

    7번째 방중 일정은 7박 8일 6000여km에 달했다. 가장 길게 체류한 2006년 8박 9일 방중에 맞먹는 강행군이었다. 후계자 김정은과 함께 한 6번째 방중과 마찬가지로 7번째 방중 길에도 고 김 주석의 흔적을 찾는 일정을 소화했다. 이동경로를 살펴보면 7번째 방중이 길어진 이유는 단 하나다. 남부 양저우에 들렀기 때문이다. 당시 방중의 주요 목적이 양저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양저우는 아버지인 고 김 주석의 흔적이 진하게 배인 곳이자, 자신과 수차례 정상회담을 하며 깊은 관계를 유지해온 장 전 주석의 고향이었다.

    6번째 방중에서 김정은과 함께 중국 지도부를 만난 김 위원장은 돌아온 직후 김정은 후계구도를 공식화했다. 이후 70세를 맞은 김 위원장은 자신의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실감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자신의 과거 흔적을 돌아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마지막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직감한 70세 독재자의 센티멘털한 여행, 필자는 김정일의 7번째 방중을 그렇게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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