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99

2011.08.08

산사태 ‘트라우마’ 얼룩처럼 오래 남는다

수마 후유증

  • 손석한 연세신경정신과 원장·의학박사 psysohn@chollian.net

    입력2011-08-08 13: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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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사태 ‘트라우마’ 얼룩처럼 오래 남는다

    7월 27일 서울에 내린 폭우로 서초구 우면동 형촌마을 주민들이 긴급 대피하고 있다.

    2011년 7월 27일 서울 최고의 부촌 강남이 물바다로 변했다. 최고급 외제 승용차들이 둥둥 떠다니는 모습은 마치 워터파크를 연상케 한다. 우면산 인근의 아파트를 뚫고 들어온 토사는 화목한 가정을 짓밟았다. 자원봉사를 하러 춘천에 내려갔던 대학생들은 산사태로 제대로 피어보기도 못한 채 고귀한 목숨을 잃었다. 모두 순식간에 일어났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발생했다.

    죽음을 떠올리는 스트레스 장애

    지긋지긋하던 비는 그쳤고,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복구하는 중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둥둥 떠다니는 자동차와 흙더미가 잔뜩 묻은 채 옮겨지는 시신들, 그리고 토사가 안방까지 뚫고 들어온 아파트의 모습을 기억한다. 물폭탄으로 죽을 뻔했던 위기에서 필사적으로 벗어난 사람이라면 그날의 광경과 감정을 평생 기억하리라. 살아났다는 안도감이 주로 든다면 다행이지만, 혹시 죽을 뻔했던 공포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을까 걱정이다.

    비단 이번 강남 물난리뿐 아니라 자연재해 또는 각종 사고로 죽음의 문턱까지 가거나 목격했던 사람이 위협받는 정신적 질환이 있다. 바로 ‘스트레스 장애’다. 여기에서 말하는 스트레스란 일상적으로 접하는 스트레스와 차원이 다르다. 순간적으로 죽음이 떠오르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말한다. 이를 ‘트라우마(심리적 외상)’라고 한다.

    첫 번째 단계가 ‘급성 스트레스 장애’다. 피해자는 심한 공포, 무력감 또는 전율을 느낀다. 침수로 고립 또는 매몰됐거나, 타인의 죽음 또는 심한 부상을 눈앞에서 목격한 사람은 며칠 이내에 주관적인 마비 느낌, 탈착, 감정반응의 소멸, 주위에 대한 인식 저하(멍한 느낌), 비현실감, 이인증(마치 내가 다른 사람이 된 듯한 느낌), 해리성 기억상실증(사건의 중요 사항을 회상하지 못함) 같은 증상을 보인다.



    만일 증상이 한 달 이상 지속하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넘어간다. ‘스트레스 장애’까지는 아니더라도 다소 가벼운 정도인 ‘적응 장애’에 걸릴 수 있다. 한편 우울증을 앓을 가능성도 있다. 피해자에게서 우울한 기분, 짜증, 의욕 저하, 흥미 감소 등이 적어도 2주 이상 지속하고, 이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일상생활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 우울증을 의심해야 한다.

    수해 피해자는 처음에는 도움을 간절히 원하고 바라지만,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극심한 분노와 실망을 경험한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수치심과 당혹감, 다시 피해를 입을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오히려 피해 사실을 공개하기 꺼린다.

    이러한 상황이 다시 스스로를 힘들게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내가 운이 나빠서’ 아니면 ‘전에 무엇인가를 잘못해서’ 수해를 당할 만하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결국 이런 정신적 고통과 어려움으로 대인관계를 기피하고, 친구나 가족과의 교류가 적어져 보호 구실을 해주는 방어막도 사라진다.

    이 과정에서 잦은 신체화 증상(어지러움, 구토, 사지 통증이나 마비, 두통, 과호흡, 만성 피로감, 히스테리 등)을 호소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는 그들을 도울 때 개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가족, 친구, 지역사회, 직장, 학교가 이들의 사정을 인정하고 공감하는 한편, 증상 정도가 심하면 정신과 전문의의 약물 처방을 받도록 해야 한다.

    강남의 물바다는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지만, 아직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상처가 사라지려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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