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18

2010.01.05

아내를 위한 ‘밥상 안식년’ 자유와 권력을 느꼈다

  • 김광화 flowingsky@naver.com

    입력2009-12-29 18: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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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를 위한 ‘밥상 안식년’ 자유와 권력을 느꼈다

    1 다 된 도토리묵이 아침 햇살을 받아 독특한 기하학을 드러낸다. 2 갑오징어를 손질하려고 배를 가르자 뱃속에 들어 있는 물고기. 3 송편 빚을 쌀가루를 반죽하다 지루하면 놀이로 바뀐다. 4 콩물이 끓어오른다. 5 쌀 조청이 다 됐나를 점검. 밥상에는 과학과 예술이 늘 함께한다.

    아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도 마누라가 필요해요.”

    마누라가 차려주는 밥 먹고, 마누라가 밥상 치울 때 신문 보는 여유를 갖고 싶다는 말이다. 20여 년을 의무감으로 차리던 밥상에서 벗어나 권리로서, 아니 그냥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먹을 수 있는 삶을 누구인들 원하지 않으랴.

    ‘아내에게 안식년을!’ 올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내년 계획 중 하나로 잡았다. 그렇다고 내가 아내의 마누라가 될 능력은 못 된다. 마누라는 결코 쉬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다만 아내가 해오던 많은 일 중 조금이나마 나눠 맡고 싶다.

    여러 안식 가운데 ‘밥상 안식년’을 주고 싶다. 그런데 이 일도 결코 만만한 게 아니다. 요 몇 해 나름대로 배우고 익힌다고 했지만 여전히 요리가 서툴고, 살림살이 도구조차 다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아내를 생각하고 또 나를 위한다면 못할 것도 없지 싶다. 누구나 그런 능력을 타고나는 게 아니다. 삶에 필요하다고 느끼고 자신을 부단히 바꾸었기에 가능한 것일 뿐. 된장이나 고추장 같은 것 담그는 일도 그렇다. 아내 역시 서울에선 전혀 해보지 않던 일인데 시골 와서 눈동냥 귀동냥으로 배운 게 아닌가. 게다가 나로서는 좋은 조건이다. 곁에 아내라는 선배가 있으니까.

    또한 내가 이렇게 마음먹을 수 있는 데는 아이들 힘도 크다. 안식년에 대해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들은 “저야, 아무래도 좋아요.” 딸은 “오, 우리 아빠 대-단해요. 이참에 엄마를 아예 주방 가까이에 오지 못하게 하는 게 어때요?”

    스스로 먹을거리 찾는 ‘원초적 충전’

    솔직히 말하자면 밥상 안식년은 아내보다 먼저 나를 위한 것이다. 내년 한 해, 나는 좀더 독립된 인격으로 거듭나고 싶다. 남편으로서가 아닌 남자로서, 또한 한 사람의 고유한 인격으로서. 그동안 하루에 한 가지 반찬만 하다가 한 끼 밥상을 온전히 차려낸다면 나로서는 엄청난 발전이 아닌가.

    내가 생각처럼 밥상을 책임질지는 미지수다. 갓 결혼한 새댁이 살림을 처음 배울 때 느끼는 설렘과 긴장감이 같이 밀려온다. 하여, 새해가 벅차다.

    2008년 이맘때 내 일기의 한 부분이다. 이렇게 벅차게 시작한 새해가 어느덧 저문다. 그런 만큼 여러 감회가 밀려온다. 1년 동안 밥상을 차려내면서 겪은 일화가 참으로 많다. 냄비를 태우기도 했고, 그릇을 깨기도 했으며, 급하게 칼질하다 손가락을 살짝 벤 적도 있다. 음식이 짜거나 달아서 먹지 못하고 버린 일도 떠오른다. 무얼 차릴지 끙끙댄 날도 많았다. 무엇보다 몸이 안 좋아 내 몫을 다른 식구가 나눠 질 때면 건강이 무엇인지를 깊이 들여다보곤 했다.

    그럼에도 소득은 많다. 아내가 밥상을 차리면서 힘들었던 부분은 내게는 비어 있던 부분. 자라면서는 어머니가 내 빈자리를 대신 채워주셨고, 결혼해서는 아내가 그 자리를 채운 셈이다. 아내는 쉬면서 또 다른 충전이 필요했고, 나로서는 밥상을 손수 차림으로써 오래도록 비워둔 공간을 스스로 채울 필요가 있었다.

    내게 필요한 충전은 아내와 달리 원초적인 것이다. 태어나면서 누구나 자기 먹을거리를 스스로 찾는 힘을 가지지 않는가. 갓난아기는 엄마 젖을 찾아 빠는 힘을 가지며, 기면서부터는 뭐든 손에 잡히면 입에 넣어 맛을 보며 스스로 먹을거리를 찾고자 부단히 노력한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이러한 몸짓을 잃어버렸다.

    만일 자신이 먹을 음식을 누구나 스스로 마련한다면 그 누구도 힘들지 않을 것이다. 이 힘을 바탕으로 누군가와 함께 하는 밥상이라면 늘 잔치가 되지 않겠나. 이런 경지를 나는 ‘원초적 충전’이라고 말하고 싶다. 자신을 살리고 남을 살리는 힘. 그 내용을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우니 여기서는 쉽게 떠오른 핵심만 몇 가지 적어본다.

    밥상의 주인 되면 노후 대비 저절로

    밥상은 생명이다. 내 생명을 누군가에게 기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책임진다.

    밥상은 철학이다. 끼니를 때우는 게 아니라 맛을 음미하듯 삶을 음미한다.

    밥상은 권력이다. 밥상을 차리는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맛이 없어도 참아야 하고, 조금만 맛이 있어도 맛있다고 칭찬해줘야 한다. 누군가를 초대하자면 주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무엇보다 밥상 차리는 사람의 입맛을 따라야 한다.

    밥상은 예술이다. 밥상은 보기에 아름답고, 향기가 있으며, 침이 괴게 한다. 식구들의 젓가락질 소리, 음식 씹는 소리, 목구멍으로 넘기는 소리는 또 얼마나 감미로운가.

    밥상은 자유다. 자라면서는 어머니 아들, 결혼하고는 ‘아내의 큰아들’ 노릇에서 벗어나 자유인으로 거듭난다.

    밥상은 과학이다. 콩을 끓이면 넘치고, 단백질과 식초가 만나면 엉긴다. 전분이 누룩의 효모균을 만나면 술이 되고, 온도에 따라 식초가 되기도 한다.

    밥상은 의학이다. 제철 음식을 제때 먹으면 약이요, 아무 음식을 아무 때나 먹으면 독이다.

    밥상은 창조다. 어제와 다른 오늘은 그 자체로 창조이며, 새로운 밥상이야말로 오감을 거듭나게 한다.

    밥상은 삶의 시작이자 끝이기도 하다. 모든 즐거움의 첫 고리는 먹는 데서 시작하지 않는가. 밥상의 주인이 될 수 있다면 노후 대비도 저절로 된다. 새해에는 아내와 함께 하되 ‘설레는 밥상’을 차려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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