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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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 부은 산짐승들 야성 입맛 잃은 사람들

  • 김광화 flowingsky@naver.com

    입력2009-09-11 11: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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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이 부은 산짐승들 야성 입맛 잃은 사람들

    <B>1</B> 고라니 방지 울타리. <B>2</B> 논두렁에 세워둔 허수아비.

    들판에 작물이 하나둘 영글어가니 이를 탐내는 놈들도 어디선가 자꾸 나타난다. 산에서는 산짐승이, 들에서는 들짐승이, 하늘에서는 날짐승이. 아주 작은 벌레도 겨울날 준비를 하느라고 이래저래 세력을 뻗친다. 농사는 아무래도 사람 중심이다. 사람이 먹기 위해 가꾸고 기른다. 그러니 짐승이나 벌레 피해를 줄이고자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벌레는 작물이 어릴 때 잡아주면 피해가 그리 크지 않다. 그러나 짐승 피해는 워낙 크니 여러 대책을 세워야 한다. 간단히 울타리를 치기도 하고, 사람에 따라 전기 울타리를 치거나 허가를 받아 공기총을 이용하기도 한다. 짐승들과 이렇게 목숨 건 다툼을 하면서 느끼는 게 있다. 만일 사람이 심어놓은 걸 다른 사람이 빼앗거나 몰래 훔친다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이 주는 피해는 원망하기가 어렵다. 그렇게 해봐야 아무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대신 자신을 돌아보고 또 짐승들에게서 지혜가 되는 뭔가를 하나라도 얻어야 하지 않겠나.

    동물에게 좋으면 사람에게도 좋다

    몇 해 전에 ‘뚱딴지’라고도 부르는 돼지감자를 구해서 집 뒤 산밭에 조금 심은 적이 있다. 돼지감자는 당뇨병 환자에게 인기가 있다 해서 점차 재배가 늘어나는 작물이다. 그런데 그해 가을로 접어들면서 멧돼지가 알고 나타났다. 멧돼지는 힘이 좋아 울타리를 아주 튼튼하게 치지 않는 한 막아내기 어렵다. 먹는 모양새도 마치 기계로 밭을 뒤집어놓은 것처럼 우악스럽다.

    그런 데다 이 멧돼지가 한 번만 와서 먹고 간 게 아니다. 두 번 오고 나중에 찬바람 불면서 또 와, 땅속에 남아 있던 작은 돼지감자 한 알조차 알뜰하게 파먹었다. 그전에도 멧돼지가 나타나 고구마도 먹고 옥수수도 짓이겨가며 먹었지만 이렇게까지 한 적은 없었다. 그만큼 돼지감자를 좋아한다고 봐야 하나. 나는 당뇨 어쩌고 하는 이야기보다 돼지감자가 지닌 야성이 좋다.



    농사를 지어보면 야생에서 저절로 자랄 수 있는 작물이 별로 없다. 풀이나 나무와 경쟁이 안 된다. 그런데 돼지감자만은 저절로 잘 자란다. 키가 3m가량 자라, 가을에 노란 꽃을 피운다. 길가나 인가 가까이 적당한 영역을 차지하고 산다. 또한 여러해살이라 한 번만 심어두면 저 알아서 생명을 이어간다. 그만큼 생명력이 강하다. 다시 씨앗을 구해 좀더 안전한 곳에다 심었다.

    야성이 그리우면 돼지감자를 이용한 요리를 이것저것 해본다. 인터넷에 이를 먹는 법이 많이 올라온다. 유럽에서는 돼지감자를 예루살렘 아티초크라고 해서 오래전부터 먹어왔단다. 멧돼지에 이어 고라니 피해도 크다. 사람이 도시로 집중되고 산골은 비어가니 그 빈자리에 야생짐승이 늘어난다. 고라니는 겁이 많은 짐승이라는데 요즘은 무리가 많아져서인지 아주 대범하다. 밤에는 마을 구석까지 돌아다니고, 낮에도 논밭을 돌아다닐 만큼 ‘간이 부은 놈’들도 가끔 있다.

    간이 부은 산짐승들 야성 입맛 잃은 사람들

    <B>3</B> 까치나 비둘기가 거의 다 쪼아먹은 옥수수. <B>4</B> 꿩이 씨앗을 쪼아먹은 고추. <B>5</B> 엄청난 기세로 자라 꽃을 피운 돼지감자. 멧돼지는 돼지감자를 아주 좋아한다. <B>6</B> 섬유질이 많아 씹는 맛이 좋은 고구마줄기 나물. <B>7</B> 콩잎된장박이. 야성의 입맛이 살아난다.

    고라니는 주로 콩잎을 먹는데 고구마줄기나 잎도 아주 좋아한다. 올해 나는 콩밭 가까이에 고구마를 심었는데 이놈이 울타리를 넘어와 콩잎은 맛보기로 조금 먹고, 대부분 고구마줄기와 잎을 먹었다. 이렇게 짐승들이 맛나게 먹는 걸 보면 사람 역시 먹어도 좋다는 말이 된다. 초가을 이맘때 섬유질이 풍부한 제철 채소가 그리 많지 않다. 배추는 아직 어리니 콩잎이나 고구마줄기 또는 깻잎이 섬유질을 보충하는 데는 그만인 것 같다.

    고구마의 줄기는 껍질을 벗긴 다음 끓는 물에 살짝 데쳐 먹기 좋은 길이로 썬다. 여기에다 다시 볶을 것도 없이 그냥 양념장을 끼얹어 식구들 형편대로 먹는다. 아삭아삭 섬유질이 풍부하니 씹는 맛이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콩잎은 먹어보지 않은 사람에겐 맛이나 향이 낯설다. 하지만 요리에 조금 마음을 쓰면 그 고유한 맛이 좋다. 멸치를 우려 맛낸 국물에 사흘쯤 삭힌 다음 된장에 박았다 먹으면 된다. 이 맛을 즐기는 사람들은 거의 마니아에 가깝다.

    짐승 피해를 보면서 배우는 또 한 가지는 고추 씨앗. 고추가 붉게 익어가면 이를 노리는 놈이 있다. 바로 꿩이다. 꿩은 몸집이 무거워 먹이활동을 닭처럼 땅에서 한다. 이럴 때 땅 가까이서 붉게 익어가는 고추는 최상의 만찬이 된다. 꿩이 먹는 부위는 껍질이 아니다. 바로 그 속에 든 씨앗이다. 씨앗이 그만큼 영양가가 많다는 ‘말씀’.

    고추 통째로 온전히 먹기

    사람들이 보통 고추를 즐겨 먹는 건 매운맛 때문. 그래서 고춧가루를 빻을 때도 씨앗을 빼고 빻는다. 씨앗이 들어가면 맛도 빛깔도 조금 달라진다. 고추 씨앗은 연노랑빛이다. 그러니 씨앗을 함께 빻으면 고춧가루 빛깔이 덜 붉게 된다. 맛도 씨앗을 넣고 빻으면 칼칼해 거칠다고 여긴다. 마치 현미밥이 거칠다고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씨앗은 생명의 핵이다. 자연 상태에서 껍질은 씨앗을 보호하고 나중에 씨앗이 자랄 때는 썩어 씨앗의 거름이 될 뿐이다.

    씨앗은 온갖 영양은 물론 유전자를 갖고 있어 껍질과 견줄 수 없는 생명력을 지닌다. 면역력 역시 높을 수밖에. 풋고추는 씨앗째 먹는 데 익숙하다. 먹기 나름이다. 그렇다면 붉은 고추도 씨앗째 먹기 운동을 벌이면 좋겠다. 이렇게 하면 생산 농가는 씨앗을 따로 골라내야 하는 품이 적게 들고 무게는 늘어난다. 소비자도 길들여진 것보다 적게 먹고도 더 강한 생명력을 얻게 되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길이 아닌가.

    짐승들 덕에 사람 편한 대로만 먹고 사는 문화를 다시 돌아본다. 정작 소중한 건 버리고, 껍데기만 즐기는 모습이 삶 구석구석에 스며 있지는 않은지. 신종플루에 대한 두려움도 지나치게 가려 먹는 음식문화와 무관하지 않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어쩌면 보물의 숨은 가치는 단순함에 있고, 있는 그대로를 통째로 받아들이는 데 있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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