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기 만보

정치적 감정 外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입력2019-10-28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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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읽기 만보

    ※만보에는 책 속에 ‘만 가지 보물(萬寶)’이 있다는 뜻과 ‘한가롭게 슬슬 걷는 것(漫步)’처럼 책을 읽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정치적 감정
    마사 누스바움 지음/ 박용준 옮김/ 글항아리/ 684쪽/ 3만2000원

    고전문학과 정치학, 윤리학, 법학을 넘나들며 ‘시적 정의’의 문제를 천착해온 미국 정치사상가 마사 누스바움의 사상의 정수를 담았다는 평가를 받는 책이다. ‘정의롭기를 갈망하는 사회에서 사랑의 자리를 탐구한 책’이라는 서평이 정곡을 찌른다. 

    그의 스승이던 존 롤스가 ‘정의론’에서 슬쩍 다룬 도덕감정론을 발전시켜 정의의 실현과 완성을 위해선 이성 못지않게 감정이 중요함을 설파했다. 타인에 대한 공감력, 동정, 연민에서 출발한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철저히 이성에 호소하는 정의론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풍성한 문학, 역사, 신화적 사례와 함께 들려준다. 

    핵심은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이 타인의 고통이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상상할 수 있고, 또 이를 토대로 타인과 교감하도록 그 공동체의 이상이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의를 위해 왜 사랑이 중요한가’라는 부제가 이를 말해준다. 같은 이유로, 타인의 고통을 공유할 수 있는 비극과 타인의 기쁨을 나눠 가질 수 있는 희극, 이 모든 것을 떠나 타인과 감정에 함께 반응할 수 있는 대중문화가 공동체의 정의감을 키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는 특히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과 그 원작인 보마르셰의 희곡을 비교하는 대목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보마르셰의 원작에는 프랑스혁명 직전 앙시앵레짐(구체제)의 위계체제에 대한 맹렬한 비판이 담겼다. 하지만 이를 오페라 대본으로 개작한 로렌초 다 폰테는 귀족과 하인의 계급질서를 가로지르는 사랑의 이야기로 이를 풀어냈다. 혁명의 논리와 원칙에 충실한 사람들은 이를 타협이나 훼절로 여긴다. 



    누스바움은 반대로 오페라야말로 백작부인 로지나가 하녀 수잔나에 대해 보여주는 공감능력, 그리고 권위적인 남편 알마비바 백작을 무릎 꿇린 뒤 보여주는 사랑과 관용을 통해 프랑스혁명의 박애사상의 정수를 담아냈다고 상찬한다. 그리고 인간 존재의 허약함에 대해 보여주는 이런 동정적이고 너그러운 태도야말로 정의 구현을 위해 필수적인 ‘공적 감정’의 표본이자 프랑스혁명이 지향한 새로운 시민 개념에 더욱 부합한다는 것이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이 오페라의 아리아인 ‘편지이중창’과 ‘저녁 산들바람은 부드럽게’가 흉악범들의 마음을 무장 해제시키는 장면이 이러한 ‘공적 감정’의 막강한 파급력을 보여준다. 

    누스바움의 혜안과 통찰은 한국 사회의 고질적 문제인 고부 갈등 해소법까지 제시한다. 며느리가 아무리 꼴 보기 싫더라도 며느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하라는 주문이 그것이다. 며느리를 미워하는 감정이 계급적 편견, 혹은 개인적 시기심에서 촉발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제하고, 도덕적으로 가치 있게 행동할 때 비로소 진짜 사랑이 그 내면에 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순간적 감정에 충실하기보다 며느리에게 편견 없이 보이려 애쓰는 적극적이고 도덕적인 자세 덕분에 시어머니의 삶은 풍요로워진다. 그리고 사랑은 그런 너그러움과 품위 속에서 싹트게 된다. 현실 정치에서도 진짜 사랑이 없어도 사랑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일깨워주는 책이다.

    클래식, 비밀과 거짓말
    유윤종 지음/ 을유문화사/ 280쪽/ 1만5000원 

    클래식 음악 전문기자 유윤종이 클래식 명곡과 작곡가에 대한 흥미진진한 비화를 해당 음악에 대한 구조적 분석까지 곁들여 들려준다. ‘알비노니의 아다지오’와 ‘카치니의 아베마리아’가 실제론 20세기 작곡가의 작품이라는 내용은 전채에 불과하다. 교향곡 6번 ‘비창’을 완성하고 9일 만에 급서한 차이콥스키는 콜레라에 의한 병사일까, 아니면 동성애자임이 폭로되는 것을 막기 위한 자살이었을까. 1933년 슈만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작곡한 바이올린협주곡 악보가 그의 사후 80여 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이를 발굴한 바이올리니스트 자매는 자신들의 큰할아버지 유령이 이를 알려줬다고 주장했다. 진실은 뭘까. 체코 국민음악의 아버지 스메타나의 교향시 ‘블타바(몰다바)’와 이스라엘 국가 ‘하티크바’의 선율이 닮은 이유가 1600년 이탈리아 작곡가가 채록한 동유럽 민요에서 기원했기 때문이라는 계보학적 탐사에 경탄하게 된다.

    나랑 안 맞네 그럼, 안 할래
    무레 요코 지음/ 권남희 옮김/ 이봄/ 204쪽/ 1만3800원 

    ‘카모메 식당’으로 유명한 작가 무레 요코가 ‘내 기준’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전하는 에세이다. 저자는 자기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맞는 것과 맞지 않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100명의 사람이 있으면 100가지 삶의 방식이 있는 법이다. 남들 눈에 아무리 좋고 편하며 근사해 보여도 자신과 맞지 않으면 쿨하게 이별을 고해야 행복할 수 있다. 책에 소개된 저자의 거부 목록은 온라인 쇼핑부터 하이힐, SNS, 포인트 카드, 카페인, 휴대전화, 결혼에 이르기까지 무척 다채롭다. 책을 읽다 보면 알게 모르게 주변 눈치를 보거나 대세에 따르려고 행했던 불편한 일들이 하나 둘씩 떠오를 것이다. 까다롭고 까칠해 보일지라도 자신과 맞지 않으면 무리하게 따를 필요가 없다. 남이 뭐라 하건 법에 저촉되지 않는 한, 하고 싶은 대로 해보는 건 어떨까. 안 맞는 일은 정중히 거절하는 용기가 필요한 때다.

    조반니의 방
    제임스 볼드윈 지음/ 김지현 옮김/ 열린책들/ 352쪽/ 1만4800원 

    미국 현대문학의 한 축이자 민권운동가인 제임스 볼드윈의 대표작. 1956년 발표된 소설로 당시만 해도 금기시되던 성소수자 문제를 전면으로 다뤘다. 백인 중산층 청년인 주인공 데이비드는 당시 시대상을 감안하면 미래가 보장된 계층이다. 하지만 프랑스 파리에서 만난 바텐더 조반니를 통해 자신이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처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으니 행복해야 하지만, 주인공의 현재와 미래는 행복과 동시에 무너진다. 단지 동성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계급적 혜택을 누릴 수 없게 됐으나, 그렇다고 이제야 눈뜬 관능에서 눈을 돌리고 싶지는 않다. 시대를 앞서간 특별한 사랑 이야기에 작가는 동성애 외에도 이주자 문제, 계급화 등 다양한 사회 담론을 담아냈다.

    권세호의 별에서 온 회계학
    권세호 지음/ 와우라이프/ 236쪽/ 1만5000원 

    회계 지식이 필요한 직장인에게 간절한 것은 두툼한 회계 교과서보다 무엇이든 궁금할 때 카카오톡(카톡)으로 물어보면 바로 답해주는 ‘회계의 신’ 같은 존재가 아닐까. 

    이런 아이디어에서 착안한 책. 사회초년생 황지영 씨가 카톡에서 ‘회계의 전설’을 우연히 만나 사제지간을 맺은 뒤 회계의 핵심을 하나씩 깨쳐나간다는 설정 하에 회계란 무엇인가, 재무제표는 누가 왜 언제 어떻게 만드나, 다른 회사 재무제표는 어디서 찾나 등의 강연이 이어진다. 스마트폰 카톡 대화 형식을 빌린 구성으로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다. 각론으로 들어가기 전 회계라는 거대한 숲의 생김새를 먼저 파악할 필요가 있는 회계 초보자에게 특히 적합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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