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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6억 기부자, "자식에게 물려주는 건 독. 돈 버는 것보다 잘 쓰는 게 더 중요"

[허문명의 PICK] 600억 원대 부동산을 KAIST에 기부한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

  •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676억 기부자, "자식에게 물려주는 건 독. 돈 버는 것보다 잘 쓰는 게 더 중요"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

최근 KAIST(한국과학기술원)에 676억 원 상당의 부동산을 출연, ‘이수영 과학교육재단’을 설립하겠다고 발표해 화제가 된 이수영 광원산업 회장은 여든 넷 나이가 무색할 만큼 활기가 넘쳤다. 신장 암에 걸려 신장 하나를 떼어내는 대수술을 한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건강해 보였다.

실패와 좌절의 연속

이 회장의 기부는 이번이 세 번째다. 2012년 80억 원에 달하는 미국 부동산을 유증(遺贈·유언으로 재산을 타인에게 증여하는 형태)했고, 2016년엔 10억 원 상당의 부동산을 내놨다. 이번에 약정한 금액까지 합치면 총 766억 원이다. 

그에게 눈길이 간 것은 막대한 기부 이력도 그렇지만, 1936년생으로 식민지시대에 태어나 전쟁과 해방, 분단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파고를 겪은 데다 그 시대 여성으로는 흔치 않게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신문기자 생활을 한 엘리트 지식인이었다는 점, 기자직에서 해직된 뒤 돌연 목장 일에 뛰어들어 축산업에서 성공하고 부동산업으로 큰 재산을 일궜다는 점, 평생 독신으로 살다 여든 살에 대학 동기 동창과 결혼한 것 등 드라마틱한 삶에 눈길이 갔기 때문이다. 

그의 사무실은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백화점 안에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삼성그룹 창업주인 고(故) 이병철 회장이 그의 어깨를 감싸 안고 환하게 웃고 있는 흑백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옆에는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얼굴도 보였다.

이수영 회장이 기자 시절 당시 재계 총수들과 함께 찍은 사진. 어깨동무를 한 분이 이병철 삼성 회장이고 오른쪽이 정주영 회장이다.

이수영 회장이 기자 시절 당시 재계 총수들과 함께 찍은 사진. 어깨동무를 한 분이 이병철 삼성 회장이고 오른쪽이 정주영 회장이다.

-무슨 사진입니까. 

“서울경제신문 기자 시절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모임에 취재 갔을 때 찍은 겁니다. 기자석에 앉아 있는데 이 회장이 ‘이수영 기자 오라’고 해서 같이 찍었습니다.” 



-어깨까지 둘러메고 있는 걸 보면 꽤 인기가 있었나 봅니다. 

“재벌 오너 몇 분과 친했습니다. 나는 여기자라서 남들이 선호하는 출입처는 별로 가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실망하지 않고 열심히 했어요. 오히려 비인기 부서에서 기회를 만들기가 쉬운 때도 있었습니다. 이병철 회장과도 도자기를 취재하는 문화부 기자로서 단독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으니까요.” 

-자서전을 보니 겉으로 보이는 화려한 성공의 이면에는 좌절과 실패가 많았더군요. 

“경기여중고를 나와 서울대 법대에 입학할 때까지는 순풍에 돛을 단 듯 순탄하게 살았는데 이후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첫 번째 실패가 사법고시 낙방이었죠. 마음고생은 물론, 몸까지 아팠습니다. 

사법고시에 떨어진 뒤 골방에 처박혀 골골히 지나다 살기 위해 몸을 움직이려고 시작한 게 영어학원 등록이었습니다. 코리아헤럴드 학원이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 안내판에서 서울신문 기자 모집 공고를 보게 됐죠. 법대 남학생 동기들도 여러 명 응시했는데 다 떨어지고 여자인 나만 붙었습니다. 1963년이었습니다.”

서울대 법대 출신 여기자의 수난

-그런데 4개월 만에 그만뒀습니다. 

“당시만 해도 흔치 않았던 ‘서울대 법대 나온 여자’라는 꼬리표 때문에 입사와 동시에 의도와는 무관하게 누군가의 ‘라인’이 돼버렸습니다. 편집국 내 치열한 권력 싸움에서 어느 순간 견제와 질시의 대상이 됐는데 신참 견습기자 입장에서는 참기 힘든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제대로 일을 배우기는커녕 마음고생만 시키니 힘들어서 도저히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회사 선배 소개로 한국경제신문 전신인 현대경제일보에서 다시 기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4년가량 일했고, 1969년에 경력기자로 서울경제신문에 스카웃됐습니다.” 

-여기자로서 어려움은 없었나요. 

“시시때때로 성희롱에 시달리고 크고 작은 민원으로 귀찮은 일도 많았습니다. 게다가 나는 독신여성이다보니 정신 바짝 차리고 남들 입에 오르내리지 않도록 몸가짐 마음가짐을 똑바로 하려 애쓰며 늘 긴장하면서 살았습니다. 

고난은 다른 곳에서 왔습니다. 다른 데 한눈팔지 않고 쓸데없는 욕심 부리지 않으며 오로지 기사 잘 쓰는 것에만 관심을 뒀는데 1980년대 언론통폐합 때 노조를 만들었다는, 내가 하지도 않은 오해를 받고 해직 기자가 된 거죠. 

퇴직금이 500만 원이었는데 그것도 현찰이 아닌 어음으로 주더군요. 당시 트랙터 한 대 값이 2000만 원이었는데 퇴직금이 트랙터 값의 4분의 1밖에 안 된다니 비애감도 들었습니다.”

어쩌다 처녀가 소, 돼지 키우나

광원목장을 일군 이수영 회장.

광원목장을 일군 이수영 회장.

-기자 일과는 전혀 다른 목장 일을 하게 된 과정도 궁금합니다. 

“언젠가 은퇴하면 농사지으며 살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3.3㎡당 5원, 10원 하던 경기 안양 땅을 사서 주말마다 내려가 텃밭을 가꿨습니다. 신문사에서 해직되자마자 바로 내려가 겨우 비바람을 피하는 수준으로 집을 짓고 열심히 땅을 일궜죠. 그러던 어느 날 경기 용인에서 돼지를 키우며 살던 신문사 선배가 ‘농사짓지 말고 돼지나 소를 키워보라’고 하는 겁니다. 어차피 경험 없는 것은 마찬가지라, 그 일이 덜 힘들고 돈도 더 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돼지 2마리와 암소 3마리를 사서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기자라는 직업이 남들에게 고개 숙이는 일이 아닌 데다, 이른바 ‘먹물’ 신분에서 갑자기 소, 돼지를 키우는 목부가 된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처음엔 마음고생도 많았습니다. 사람 만나는 게 일이었는데 지인들과 거의 연락을 끊었습니다. 동네 사람들도 이상한 눈으로 봤죠. 서울대 법대 나온 처녀가 신문사 기자까지 했다면서 트랙터를 몰고 다니며 선머슴처럼 휘젓고 다니니 어쩌다 저렇게 됐나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들렸습니다. 그래도 동네 분들을 만나면 웃는 얼굴로 인사를 잘하자, 겸손하자, 도와주자, 이런 말을 가슴에 새기며 살았습니다. 매일 거울을 보면서 고개 숙이고 웃는 연습까지 하면서 말이죠. 

오로지 일에만 몰두하다 보니 어느새 돼지가 1000마리가 되고 젖소도 10마리로 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공무원들이 들락거렸고 그중에는 내무부 관리도 있었습니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시절이라 농촌에서 성공한 사람들 이야기가 TV에서 자주 나왔는데, 누가 저를 소개했는지 KBS ‘잘 살아보세’ 프로에 출연하게 됐습니다. 갑자기 성공한 목장 주인으로 알려지니 새마을운동 강연도 다니고 정부에서 주는 상도 받았습니다. 유명해지니 주변 대접이 달라지더군요.”

목축업자에서 모래 판매업자로 변신

그는 무엇보다 “운이 좋았다”고 했다. 

“사업은 운입니다. 운이 내 앞을 지나갈 때 누구는 붙잡고 누구는 놓치느냐의 차이입니다. 

나도 운이 좋았습니다. 1979년 돼지파동으로 돼지 값이 폭락했을 때 운 좋게 군에 납품해 마리당 3만 원도 받지 못하던 돼지를 5만 원에 팔았습니다. 

얼마 뒤 우유파동이 났을 때는 마침 농림부 장관이 아는 사람이라 앞뒤 안 가리고 전화해 초등학생들에게 우유를 무료로 나눠주자는 아이디어를 내 실제로 젖소 농가를 살리고 아이들에게 우유도 공짜로 돌리게 하는 정부 정책으로 받아들이게 했습니다. 나 때문에 우리 아이들 평균 신장이 올라가고 올림픽에 나가서 메달도 따게 됐다고 자부합니다.(웃음)” 

-한창 목장주로 성공할 무렵, 또 그만두게 됐죠. 

“목장 땅이 경인고속도로 나들목(IC)으로 수용돼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장 일을 다시 하려 했는데, 새로 산 땅이 전부 그린벨트로 묶여버리게 됐습니다. 정부는 아무 보상도 해주지 않았고 말뚝 하나 마음대로 박을 수 없는 쓸모없는 땅으로 전락했습니다. 건강도 안 좋고 목장 일도 다시 할 수 없게 돼 다시 좌절에 빠졌죠. 그때 눈에 들어온 게 ‘모래’였습니다.” 

-모래요? 

“전국에 건설 붐이 일던 때였는데 모래가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지 않습니까. 안양천변을 걷는데 모래에 꽂힌 겁니다. 더구나 그곳 모래는 1급에 가까웠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래를 팔기 시작했죠. 여름이면 뜨거운 햇빛, 겨울이면 차가운 강바람을 맞으며 흙먼지와 씨름했습니다. 밤늦게 돌아오면 모자며 신발은 물론, 옷 전체가 모래와 흙먼지 투성이였습니다. 그래도 돈 쌓이는 재미에 힘든 줄 몰랐습니다.” 

-자서전을 보니 사회 곳곳에서 일하던 서울대 법대 인맥이 결정적으로 도움을 준 때가 있더군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대학을 나와도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안 됩니다.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운명이 바뀌면 내 인생도 바뀝니다. 그러니 주변 사람들이 아무리 하찮게 보인다 해도 진심으로 대해야 합니다. 

거래하던 은행 직원으로부터 추천받은 게 여의도백화점이었습니다.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한 건물이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5층을 인수했습니다. 목축업자, 모래 판매업자에 이어 건물주, 부동산업자가 된 거죠. 기자를 그만둔 지 8년 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또 새로운 위기와의 싸움이었죠. 

“건물관리업체 선정을 둘러싸고 조폭들로부터 살해협박까지 받았습니다. 정리하는 데 거의 10여 년이 걸렸습니다.” 

지난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듯, 그가 가벼운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었다.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면 실패도 많았지만, 정말 독하게 마음먹으면 못할 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당장은 이뤄지지 않더라도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그것을 이루고자 내가 가진 모든 힘을 쏟아부으면 100%까지는 아니어도 80~90%는 이뤄지게 마련입니다. 

여기서 관건은 무엇을 이루려고 하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포기하느냐입니다. 무언가를 내 것으로 만들고 이루려면 또 다른 무언가를 포기해야 합니다. 인생은 굴곡진 길입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영원히 내리막만 있을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오르막이 나옵니다. 속단은 금물입니다. 

내 경우 여의도백화점이 어느 정도 정리됐을 무렵 신장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때 정말 살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전이되지 않아 한쪽 신장만 떼어냈습니다만, 이후 삶과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사람의 인연도 뜻대로 되지 않고, 이 세상과의 인연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80인생을 살면서 깨닫습니다. 내노라 하던 재벌총수도 암으로 쓰러지고 그 암을 치료하던 의사도 자기가 치료하던 환자와 똑같은 암에 걸려 눈을 감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동료 기자 한 명은 최고 의사가 ‘이미 손쓸 수 없으니 돈 쓰지 말고 마지막을 준비하라’고 했지만 가족은 전 재산을 바쳐 그를 살리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결국 눈을 감았습니다. 나의 암투병과 주변 사람들의 죽음은 나도 언젠가는 죽을 테고, 죽기 전 사회에 뭔가 흔적을 남길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각오를 다지게 만들었습니다.”

2012년 9월14일 이수영 회장이 KAIST에 발전기금을 약정하는 모습.

2012년 9월14일 이수영 회장이 KAIST에 발전기금을 약정하는 모습.

-기부를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미국에 건물을 살 때였습니다. 계약서를 쓰는데 변호사가 재산 상속자를 계약서에 써야 한다는 겁니다. 내가 죽거나 재산권을 행사하는 데 문제가 생길 경우 모두 정부 것이 된다면서 말이죠.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가끔 혼자라는 게 외롭고 무서울 때가 있었고 죽으면 누가 내 묘지를 찾아줄까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지만, 이 세상에 철저히 혼자라는 걸 그렇게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느낀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사무실을 나오는데 다리가 휘청거릴 정도였죠. 상속자 이름조차 선뜻 쓸 수 없는 혼자 몸이라는 깨달음이 몸까지 전해진 겁니다. 그때부터 내가 죽으면 누구에게 재산을 물려줄 것인가 결정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혈육은 아니지만 사회적 상속자를 정해야 할 때가 된 거죠. 

그때부터 은밀하게 기부할 곳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전부터 기부하게 된다면 대학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습니다. 서울대 법대 동창회 일도 오래 관여했고 장학재단 이사장까지 맡았던 만큼 당연히 모교가 먼저 떠올랐지만 선뜻 내키지 않았습니다.” 

-왜인가요. 

“내가 살아온 인생이 법조인의 길도 아니었고 좋게 말하면 경영자, 나쁘게 말하면 장사꾼의 길인 데다, 솔직히 법조인보다 과학 기술자를 키우는 일이 더 의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법은 우리 생존에 필요한 산소와 같은 것이긴 하지만 법이 물건을 만들고 부가가치를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이고 이 분야의 젊은이들이 미래를 책임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원동력이 되는 KAIST를 기부처로 정하게 된 겁니다.”

“자식을 진정 위한다면 기부하라”

-아무리 그래도 평생 피땀 흘려 모은 돈을 내놓기는 쉽지 않았을 텐데요. 

“나는 휴지 한 장도 찢어 쓸 정도로 아끼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명분이 있으면 씁니다. 돈은 필요할 때 쓰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씨 뿌리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거둬야 할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남들은 돈 모으고 재산 불리면 그것으로 거둔 삶 아니냐고 말하지만, 잘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돈을 어디에 어떻게 쓰느냐가 바로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그전까지는 무엇을 하든 씨앗을 뿌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기부를 권하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 같은 거창한 가치를 말하지 않습니다. 자식을 진정 위한다면 기부하라고 말합니다. 부모 재산을 물려받은 부잣집 자식들이 떵떵거리고 살다 쉰 살이 되기도 전 가산을 탕진하는 사례도 자주 봤습니다. 어떤 사람은 범죄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작은 것이라도 나누면서 사는 모습을 어렸을 때부터 보고 배우고 자라면 자손도 그렇게 합니다.” 

이 회장은 “그런 점에서 어머니한테 배운 게 많다”고 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한 어머니는 그 어려운 전쟁 통에도 문 앞에 가마솥을 걸어놓고 숨겨뒀던 쌀로 죽을 끓여 이웃에게 나눠줬습니다. 어린 나이였는데도 누군가에게 내가 가진 것을 나눠준다는 일이 그렇게 흐뭇하고 보람된 것인지 체험으로 배웠습니다. 또 평생 내 가슴에 잊히지 않는 말이 있는데, 경기여중에 다닐 때 종로구 내수동 종교교회 장로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말인가요. 

“‘미국이 한국을 도우러 올 때 배에 구호물품을 잔뜩 싣고 왔다 갈 때는 빈 배로 돌아가는 것 같지만 배에는 축복과 은혜가 가득 실려 있다. 그런 축복과 은혜 덕분에 미국 사람들은 베풀면 베풀수록 부자가 되는 것이다.’ 대략 이런 말이었습니다. 

나 역시 내 손에 뭔가를 잔뜩 들고 왔다 갈 때는 빈손으로 돌아가게 될 텐데 그 손에 축복과 은혜, 감사의 마음이 가득 실려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수영 회장은 2013년 2월 KAIST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수영 회장은 2013년 2월 KAIST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결심했으면 빨리 기부하라고 독려한 남편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입에서는 거친 풍파를 헤치며 살아온 사업가의 언어가 아닌, 인생을 성찰하며 살아온 지혜로운 할머니의 언어가 담겨 있었다. 

“주변에서 기부하는 사람들을 보며 배운 것도 많습니다. 서울대 법대 장학재단 모금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생 출신 할머니였습니다. 

평생 악착같이 돈을 모은 그는 주변의 소개로 알게 된 내게 500만 원을 기부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5억 원이 넘는 큰돈이었죠. 본인 말처럼 ‘더럽게 번 돈’일 수 있지만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곳에 선뜻 내놓은 그분이야말로 진정한 기부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할머니는 얼마 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통해 큰돈이 아니어도 힘들게 모은 돈을 좋은 일에 쓰는 것만큼 가치 있는 일도 없다는 생각이 강해졌습니다. 좋은 음식 먹고, 좋은 옷 입고, 좋은 구경하면 좋지만 사람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아무리 욕심을 채워도 끝은 결국 죽음이라는 건 누구나 예외가 없다는 말입니다.” 

-평생 독신으로 살다 여든에 결혼했습니다. 

“학창 시절에는 연애도 했는데 어찌어찌하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남편은 서울대 법대 동기동창입니다. 학교 다닐 때는 몰랐는데 졸업하고 한참 뒤 동창 모임에서 만났죠. 사별한 뒤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검사장 나갈 나이에 때려치우고 변호사를 했는데 돈 벌 줄은 모르는 사람입니다.(웃음)” 

-신혼 4년 차인데 좋으십니까. 

“나쁘지 않지요 뭐.(웃음) 혼자 살 때는 잘 때 전깃불 끄는 것도 힘들었는데 불도 꺼주고. 잠자리도 봐주고. 이불도 덮어주고.” 

-손도 잡고 주무십니까. 

“손을 왜 잡아요. 다리는 걸고 잡니다.” 

-기부할 때는 뭐라고 했나요. 

“우리 부부는 철저히 부부별산제입니다. 기부를 결심했으면 되도록 빨리 하라고 하더군요.”





주간동아 1251호 (p28~33)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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