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궤도 밖의 과학

성공으로 가기 위한 비상계단

실패의 과학적 정의

  • 과학 커뮤니케이터 궤도 nasabolt@gmail.com

성공으로 가기 위한 비상계단

고대 그리스 수학자 유클리드(오른쪽)와 그가 집필한 ‘원론’의 가장 오래된 필사본.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박물관, 위키피디아]

고대 그리스 수학자 유클리드(오른쪽)와 그가 집필한 ‘원론’의 가장 오래된 필사본.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박물관, 위키피디아]

실패라는 단어가 가진 공포감은 엄청나다. 아마 실패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겠지만, 실패해봤다고 좌절감이 무뎌지는 것도 아니다. 어떤 일에서든 실패하고 싶지 않다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모두의 소망이다. 특히 완전무결함을 추구하는 수학자나 객관적 진리를 탐구하는 과학자는 더욱 그랬다. 머릿속으로 138억 년 전 우주의 기원을 보고 있고, 고차원적인 사고실험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다루는 그들에게 실패는 용납되지 않았다. 아주 오랜 옛날 그들의 실패는 곧 인류의 실망으로 직결된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고고한 자존심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기원전 300년 무렵 고대 그리스 수학자 유클리드는 실패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매우 강했고, 영원히 틀리지 않는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것이 일생의 꿈이었다. 이 꿈을 이루고자 그는 먼저 결코 흔들리지 않는 기반을 찾기로 했는데, 그것이 바로 공리다. 논리학이나 수학 같은 이론체계에서 증명할 필요가 없는 가장 기초적인 근거가 되는, 뜻이 분명한 문장을 공리라 하는데, 여기서 그는 몇 가지 공리를 시작으로 다양한 개념을 정의해나갔다.


실패를 몰랐던 수학자 vs 실패한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지구중심설)을 설명하는 지도(왼쪽)와 천체운행의 원리가 담긴 도식. [호주국립도서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지구중심설)을 설명하는 지도(왼쪽)와 천체운행의 원리가 담긴 도식. [호주국립도서관]

가장 먼저 정의한 것은 점이었다. 수학에서 주머니 속 동전보다 훨씬 쉽게 꺼내 사용하는 존재에 대해 유클리드는 이렇게 정의했다. ‘부분이 없는 것.’ 이 얼마나 완벽한가. 점은 부분이 없다. 다시 말하면 더는 쪼갤 수 없다는 뜻이다. 가장 작은 단위이자, 선과 면을 추상해갈 수 있는 기반이 되는 것이 바로 점이다. 위치만 있을 뿐, 그 외에 길이나 폭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이어서 선은 폭이 없는 길이로 정의된다. 또한 선의 끝은 점이 된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13권의 책 속에 131개의 정의와 465개의 명제를 남겼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유클리드의 원론’. 최초의 수학 교과서로 불리는 기하학의 바이블이다. 

과학에서 실패란 어쩌면 급변한 패러다임의 과거를 질책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인류는 짧은 과학 역사에서 크고 작은 변화를 경험해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이 우주의 운동마저 인간중심적으로 바꾼 천동설과 지동설이다. 

우주의 중심은 지구이며, 세계의 주인공은 인간이었다. 당시에는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였기에 태양과 별, 행성 등 모든 천체가 지구 주위를 돈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지구중심설)은 전혀 문제가 없었다. 16세기까지 1400여 년간이나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으니 이 정도면 매우 성공적인 학설이었을 것이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태양중심설)을 주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지구는 가만히 있고 나머지 모든 것이 지구 주위를 돈다면, 지구에서 별을 봤을 때 딱히 별 위치가 상대적으로 바뀌어 보일 리 없으며, 태양과 지구 사이에 있는 금성의 모양도 다양하게 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관측 기술이 발달하면서 천동설로는 설명할 수 없는 다양한 문제가 등장하고, 결국 지구가 태양 주위를 다른 행성과 함께 돈다는 지동설이 인정받게 된다. 그렇다면 천동설을 주장했던 과학자는 모두 실패자로 봐야 할까. 그들의 패러다임이 무너졌고, 이제 어느 누구도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간의 노력은 무의미한 것일까. 또 다른 예를 찾아 18세기 프랑스로 가보자. 

물질은 왜 타는가. 요즘 초등학교 6학년 때 배우는 이 내용을 과거에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세상에는 신기하게도 잘 타는 뭔가가 있었고, 쉽게 타지 않는 것도 많았다. 그 차이가 뭔지 이해할 수 없던 당시 과학자들은 기본입자를 하나 만들어 물질이 타기 위해 꼭 필요한 입자라고 주장하면서 플로지스톤이라고 명명했다.


플로지스톤이라는 기본입자

이 입자는 모든 가연성 물질에 숨어 있으며, 일단 불이 붙으면 서서히 빠져나간다. 그러다 보니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간 만큼 물질의 질량은 줄어들게 되고, 전부 빠져나가면 타버린 물질에는 더는 불이 붙지 않게 되는 것이다. 물질은 대부분 연소와 함께 질량이 줄기에 이 가설은 상당히 그럴듯한 형태로 한 세대를 풍미했다. 

하지만 역시 한 가지 문제가 발견된다. 종이를 태우면 분명히 질량이 줄어들었는데, 금속을 태우는 경우에는 오히려 질량이 늘어났던 것이다. 타버린 뒤에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갔다면 과연 늘어난 질량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이 문제는 우리가 다이어트를 포기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표현인 ‘질량 보존의 법칙’으로 유명한 라부아지에가 해결하게 된다. 정밀한 측정을 즐겼던 그는 수없이 실험을 반복하면서 연소되기 전과 후의 질량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결국 이 차이가 플로지스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산소라는 원소가 물질과 상호작용하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실패의 새로운 정의

가연성 물질이 숨어 있다고 추정된 가상입자 플로지스톤의 원리도(왼쪽)와 플로지스톤을 입증하려다 산소를 발견하게 된 영국 화학자 조지프 프리스틀리. [위키피디아]

가연성 물질이 숨어 있다고 추정된 가상입자 플로지스톤의 원리도(왼쪽)와 플로지스톤을 입증하려다 산소를 발견하게 된 영국 화학자 조지프 프리스틀리. [위키피디아]

산소의 발견은 화학 연구에 한 획을 그은 역사적 진보였다. 그렇다면 플로지스톤설은 실패한 가설이었으며, 당시 플로지스톤 관련 연구를 강행하던 과학자 역시 전부 실패자였을까. 과학에서 진정한 실패의 의미는 무엇일까. 

플로지스톤설이 옳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천동설이 아직 그럴듯하다는 말도 당연히 아니다. 낡은 이론과 학설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며, 반드시 수정돼야 한다. 하지만 단순히 지난 잘못을 실패라고만 볼 수는 없다. 과학은 쏟아져 나오는 실패들 속에서 합리적인 이론을 구축해가야 하며, 수정이 필요한 기존 논리는 역시 패러다임 변화의 일등공신이다. 

플로지스톤을 철저히 숭배한 영국 화학자 조지프 프리스틀리가 결국 산소를 발견해낸 것처럼, 플로지스톤설이 새로운 변화에서 얼마나 비중 있는 역할을 담당했는지에 따라 가치를 재평가받을 필요가 있다. 천동설이 우주의 구조에 대해 생각하지 못했다면 지동설이 나오기조차 어려웠으리라고 믿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수천 년 동안 절대적 권위를 갖고 있던 유클리드 기하학도 일반 상대성 이론의 등장과 함께 중력이 있는 공간에서는 적합한 체계가 아니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결국 완전무결했던 유클리드도 실패자가 돼버린 것일까.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만일 자신이 과거의 기하학적 해석에 대해 몰랐다면 결코 상대성 이론을 만들어낼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일반 상대성 이론은 공간에 대한 기반을 비유클리드 기하학에서 가져왔으며, 비유클리드 기하학 자체는 유클리드 기하학의 공리를 의심하는 과정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과학은 진리가 아니다. 과학에서의 실패는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실패가 아닐 수도 있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무한히 접근하는 과정에 실패가 있다면, 모든 실패 역시 목적지에 오르기 위한 비상계단일 것이다. 결국 누구도 해보지 못한 시도를 하고, 그 안에서 전혀 새로운 방향을 찾는 것이 바로 과학에 적용되는 숭고한 실패의 정의다. 과학은 실패를 위한 학문이며, 지금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은 끝없이 시도된 실패로부터 왔다. 

새롭게 정의된 관점에서 보면 실패한 과학자는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실패를 두려워한 과학자는 없다. 심지어 그들 누구도 자신의 접근이 실패라고 생각지 않았을 것이다. 과학에서 유일한 실패는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상태이며, 혹시라도 실패한 과학자로 불릴 만한 역사의 영웅은 새로운 통로를 열려고 힘차게 벽을 두드렸던 개척자로 기억해야 한다.


궤도_ 연세대 천문우주학과 학부 및 대학원을 졸업한 후 한국천문연구원 우주감시센터와 연세대 우주비행제어연구실에서 근무했다. ‘궤도’라는 예명으로 ‘팟캐스트 과장창’ ‘유튜브 안될과학’을 진행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궤도의 과학 허세’가 있다.






주간동아 2019.09.20 1206호(창간기념호②) (p6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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