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기

21세기 최고 오케스트라를 조율했던 마에스트로

라트비아 출신의 지휘자 마리스 얀손스(1943~2019)

  • 유윤종 동아일보 문화전문 기자

    gustav@donga.com

    입력2019-12-06 15: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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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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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영국 음악전문지 ‘그라모폰’이 음악평론가 설문을 토대로 발표한 세계 오케스트라 순위에서 1위에 오른 네덜란드 로얄 콘세르트헤바우와 6위에 오른 독일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의 공통점은 하나였다. 라트비아 출신 지휘자 마리스 얀손스(사진)의 지휘봉 아래 있었다는 것. 20세기를 대표하는 지휘자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었다면 21세기 초반을 수놓은 여러 스타 지휘자 중에서는 얀손스를 꼽을 수 있다. 

    얀손스는 치밀한 준비와 여유로운 설계 속에서 극적인 기복을 충실히 드러내는 지휘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디테일에 집착하지 않았지만 디테일은 늘 충실했다. 그 위에 육중하고 서사적인 그림을 얹혔지만 과장되지 않았다. 그는 늘 시간을 쪼개 악보를 연구했으며, ‘열린 경청자’이기도 했다. 팬들에게 늘 친절히 다가갔으며, 사인회나 인터뷰를 성가시게 여기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고 무대 뒤 관계자들은 입을 모았다. 

    2010년 이후 2년마다 서울을 찾았던 그의 환한 미소를 뒤늦게라도 다시 볼 수 있기를 한국 팬들은 기대했다. 기대는 안타까움과 추억으로 남았다. 지병인 심장질환으로 11월 30일 별세했기 때문이다. 향년 76세. 

    얀손스는 라트비아 수도 리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르비드도 지휘자였다. 리가 오페라극장의 프리마돈나로 활약하던 유대인인 어머니는 나치 점령하의 게토에서 간신히 탈출해 그를 낳았다. 종전 후 아버지가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수석지휘자 예브게니 므라빈스키의 조수가 되면서 가족은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했다. 젊은 얀손스는 레닌그라드음악원에서 옛 소련을 대표하던 지휘의 거장 므라빈스키로부터 직접 지휘를 배웠다. 

    1969년 그는 오스트리아 수도 빈으로 향했다. 클라우디오 아바도와 주빈 메타를 길러낸 지휘교육계의 대부 한스 스바로프스키 문하에서 지휘를 배웠다. 1972년 카라얀 지휘 콩쿠르에서 2등으로 입상했다. 1973년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의 조력지휘자가 되고, 1979년에는 중립국 노르웨이의 오슬로 필하모닉 음악감독에 취임하며 국제적으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987년 영국 샨도스 레이블로 발매한 차이콥스키 교향곡 전집은 섬세한 설계와 정련된 음향으로 그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1992년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에 이어 1996년 오슬로 필하모닉과 내한공연을 가진 그는 이해 오슬로에서 푸치니 오페라 ‘라보엠’을 지휘하다 심장 발작으로 쓰러졌다. 12년 전 그의 부친이 지휘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는데, 아들은 저승의 문턱에서 돌아왔다. 쓰러져서도 손에서 지휘봉을 놓지 않던 그의 모습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03년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수석지휘자가 됐으며, 2004년 리카르도 샤이의 뒤를 이어 로얄 콘세르트헤바우 수석지휘자로 취임했다. 2006, 2012, 2016년 빈 필하모닉 신년 콘서트를 지휘한 것은 그 화양연화 시절의 화려한 불꽃이었다. 

    2010년에는 ‘동아일보’ 주최로 로얄 콘세르트헤바우와 내한공연을 가졌다. 2012, 2014, 2016년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과 내한했으며 2018년 11월에도 이 악단과 내한할 예정이었으나 건강 악화로 메타가 대신 지휘했다. 국내 음악팬의 1년 넘는 기원에도 불구하고 그를 괴롭혀온 심장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자택 ‘톨스토이 하우스’에서 멈췄다.

    ※졸기(卒記) : 졸기는 돌아가신 분에 대한 마지막 평가를 뜻하는 말로, ‘조선왕조실록’에도 당대 주요 인물이 숨지면 졸기를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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