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212

2019.11.01

프리츠커 프로젝트

주민의 삶 속으로 스며든 경이로운 건축

경북 영주 실내수영장 및 대한복싱훈련장

  • 영주 =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입력2019-11-01 13:3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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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주 실내수영장 내부. [사진 제공  ·  신경섭]

    영주 실내수영장 내부. [사진 제공  ·  신경섭]

    경북 영주 실내수영장의 중정.

    경북 영주 실내수영장의 중정.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우리는 전 세계 도시에 넓은 흠집을 냈다. 우리는 도시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교통 동맥을 뚫었고, 그 기능과 모양, 크기, 재료, 색깔이 기존의 도시 환경과 아무런 연관도 없는 건물들을 세웠다. 따라서 이런 상처를 치유하는 것, 긍정적인 부분은 유지하고 도시 환경의 필요한 접착력을 다시 회복시키는 것이 오늘날 중요하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우리가 옛 도시를 산책하면서 그렇게 찬양하는 지역공동체의 자연스러운 느낌을 다시 한 번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986년 프리츠커상을 수상한 독일 건축가 고트프리트 뵘(99)의 말이다. 올해 5월 중국계 미국 건축가 아이 엠 페이(貝聿銘)가 향년 102세로 세상을 떠난 후 프리츠커상 수상자 중 최고령 생존 건축가가 된 인물이다. 뵘은 기능과 디자인의 독자성, 순수성을 강조한 모더니즘 건축에 조용히 반기를 든 건축가다. 

    그에게 건축은 ‘연결고리 만들기’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관심을 부정하거나 미화하지 않으면서 건축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요약된다. 여기에 ‘좋은 건축’의 핵심이 담겨 있다. 좋은 건축은 웅장하고 화려한 기념비적 건축이 아니다. 인스타그램 같은 소셜미디어 맞춤형의 예쁘고 신박한 건축도 아니다. 공간(환경), 시간(역사), 인간(지역주민)이 어우러지는 풍경이 되는 건축이다. 

    뵘이 프리츠커상을 수상하고 30년 넘게 시간이 지났건만 한국에선 여전히 그에 반하는 건축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최근에는 지방자치단체(지자체)별로 자기네 상징물을 바벨탑처럼 세우겠다는 돌림병이 번지고 있다. 100m 높이의 ‘이순신 타워’를 짓겠다는 경남 창원시와 산꼭대기에 33m 높이의 ‘태권V 동상’을 짓겠다는 전북 무주군이 대표적이다. 지자체장이나 담당 공무원의 건축 마인드가 얼마나 참담한 수준인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3년 연속 공공건축상 휩쓴 영주시

    영주 대한복싱훈련장 외부. 복싱훈련장(위)과 수영장 옥상이 가로변과 연결돼 있다. [홍중식 기자]

    영주 대한복싱훈련장 외부. 복싱훈련장(위)과 수영장 옥상이 가로변과 연결돼 있다. [홍중식 기자]

    복싱훈련장이 옥상. 주민들의 산책로처럼 구성돼 있다. [홍중식 기자]

    복싱훈련장이 옥상. 주민들의 산책로처럼 구성돼 있다. [홍중식 기자]

    이렇게 가뭄에 전답이 쩍쩍 갈라지는 소리만 들리나 했는데, 단비 같은 소식이 도착했다. 경북 영주시의 공공건축이 3년 연속 대한민국공공건축상 최우수상을 수상했다는 희소식이다. 



    1980년대 한때 인구 20만 명이 넘던 영주시는 2000년대 들어 인구가 반 토막 났다. 영주시는 이런 영주에 생기를 불어넣고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고자 2009년 국내 지자체 최초로 공공건축가 제도를 도입했다. 공공건축 발주와 설계 공모 단계부터 안목 있는 건축가가 참여해 비용 낭비를 줄이고 미학적 가치도 높이는 건축물을 짓기 위해서였다. 

    좋은 반응을 얻자 2015년부터는 아예 도시건축관리단이라는 상설조직을 만들었다. 공공건축가로 위촉된 3명 중 1명은 지역총괄계획가로, 다른 공공건축가들은 개별 프로젝트를 관리하고 지원하는 사업총괄계획가로 임명해 그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고 나선 것이다. 1996~2006년 무주군에서 30여 개의 공공건축 설계를 위탁받았던 고(故) 정기용 건축가의 선례를 시스템으로 정착시킨 것이다. 

    인구 10만 명 소도시의 공공건축이 얼마나 대단하겠나 싶겠지만 결과는 창대했다. 3개 철로가 지나는 바람에 도심 속 맹지가 된 영주시 삼각지에 잇따라 세운 노인복지관(2017)과 장애인복지관(2018)이 대한민국공공건축상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올해는 영주스포츠컴플렉스에 세운 실내수영장과 복싱훈련장 두 곳이 한꺼번에 같은 상을 받아 3년 연속 수상의 기염을 토하며 ‘공공건축의 선두주자’로 우뚝 선 것이다.

    물, 빛, 소리 삼박자를 갖춘 수영장

    역시 도로변과 연결된 수영장의 캐노피 구조물과 나선형 계단(왼쪽). 원래 10m 높이의 담벼락으로 차단됐던 공간이 체육관과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홍중식 기자]

    역시 도로변과 연결된 수영장의 캐노피 구조물과 나선형 계단(왼쪽). 원래 10m 높이의 담벼락으로 차단됐던 공간이 체육관과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홍중식 기자]

    수영장과 복싱훈련장은 2층짜리 건물이다. 외관만 보면 김수근과 더불어 한국 산업화 시대를 이끈 건축가 김중업의 작품을 연상케 한다. 가느다란 열주가 수직으로 도열한 특징을 제외하면 건축 본래의 목적에 충실해 보이는 기능주의적 외형이다. 

    외형만 엇비슷한 게 아니다. 본래 두 단독 건축의 부지는 10m 높이의 외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 외벽 밖 도로 건너편으로 5층 높이의 주택 단지가 있다. 주거공간과 운동공간이 단절돼 있었던 것. 수영장 설계를 맡은 김수영 건축가, 복싱훈련장 설계를 맡은 김준성·박영일 건축가는 그 단절성을 극복하고자 건축 눈높이를 외부 주택 단지에 맞춰 낮췄다. 지반을 낮추고 가로변과 맞닿은 옥상에 해당하는 공간을 통로화해 두 체육관이 공유하는 마당까지 산책하듯 접근할 수 있게 했다. 

    수영장이 나선형 계단과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주민의 접근을 유도했다면, 복싱훈련장은 건축의 1층 한복판에 해당하는 공간에 통 넓은 석조 계단을 설치해 주민의 휴식공간을 겸하게 했다. 벽을 허물지 않으면서도 안과 밖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킨 마술 같은 설계였다. 


    복싱훈련장 옥상계단의 캐노피 구조물. 수영장 천정의 콘크리트 루버를 연상시킨다.

    복싱훈련장 옥상계단의 캐노피 구조물. 수영장 천정의 콘크리트 루버를 연상시킨다.

    7m 높이의 수영장. 천정의 야외채광창으로 들어오는 직사광선의 일부를 콘크리트 루버가 차단해준다.

    7m 높이의 수영장. 천정의 야외채광창으로 들어오는 직사광선의 일부를 콘크리트 루버가 차단해준다.

    콘크리트 루버를 투과한 빛이 일렁이는 모습.

    콘크리트 루버를 투과한 빛이 일렁이는 모습.

    여기까지는 ‘같이’다. 개별 건축 내부로 들어가면 전혀 다른 개성을 온몸으로 체감하게 된다. 수영장이 섬세함으로 승부를 걸었다면, 복싱훈련장은 광활함으로 압도한다. 

    수영장은 지상 2층에 탈의실을 마련하고 긴 통로를 통해 1층 풀로 접근하게 했다. 수영장 외에도 다목적 실내체육관과 피트니스센터 등 다양한 주민체육시설을 품고 가야 했기 때문이다. 핵심은 역시 수영장인데 물, 빛, 소리가 어우러진 환상의 공간이었다. 탈의실에서 수영장으로 내려가는 통로를 걷다 보면 2m 높이의 가림막을 통해 어렴풋이 그 짜릿함을 나눠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수영장에 내려섰을 때 만나는 풍광. 아이들이 물에서 텀벙거리는 소리, 7m 높이의 천장에 있는 6개의 자연채광창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햇빛, 그리고 콘크리트 루버를 통과한 햇빛이 일렁이는 물결…. 게다가 나무들이 서 있는 중정과 잔디밭으로 연결되는 유리창까지 접하게 되면 야외수영장 느낌까지 만끽할 수 있다. 

    현장 안내를 맡은 정신구 영주시 주무관은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감히 세계 최고 수영장이라고 자부합니다.” 결코 허황된 말로 들리지 않았다. 다만 수영장 운영자들이 설계자의 의도를 제대로 살리지 못해 블라인더로 자연채광을 막고 지하수영장에나 있을 법한 인공조명등으로 이를 대신한 점이 아쉬웠다. 빛과 물, 소리, 그리고 자연과 인간까지 어우러지는 수영장이라는 모토에 걸맞은 운영이 이뤄지길 기대해본다.

    평범 밑에 비범을 숨긴 복싱훈련장

    지하 1층과 지상 1층을 틍으로 연결한 웅장한 복싱훈련장(위)과 이런 구조를 받쳐주는 콘크리트 트러스. [홍중식 기자]

    지하 1층과 지상 1층을 틍으로 연결한 웅장한 복싱훈련장(위)과 이런 구조를 받쳐주는 콘크리트 트러스. [홍중식 기자]

    복싱훈련장 2층에 있는 기숙사의 방. [홍중식 기자]

    복싱훈련장 2층에 있는 기숙사의 방. [홍중식 기자]

    복싱훈련장은 지하와 1층에 걸쳐 있는데 그 엄청난 규모에 먼저 압도된다. 지하 1층 제1훈련장과 1층 제2훈련장은 가운데 기둥 없이 거대한 콘크리트 트러스로 연결돼 있다. 그래서 바닥부터 천장까지 10m 안팎의 높이가 된다. 위에서 보면 ‘ㄷ’자 형태로 생긴 훈련장 가운데 빈 공간의 지상에는 석조 계단이 설치돼 있는데 지하의 대형 콘크리트 트러스가 이를 받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대규모 복싱훈련장은 서울 태릉과 충북 진천의 국가대표선수촌에나 가야 볼 수 있다는데 웅장함으로만 따지면 영주가 최고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거대한 아레나의 공간 역시 3면이 유리창으로 둘러싸여 있어 자연채광 효과가 상당하다. 마치 빛으로 충만한 저 높은 곳을 등불 삼아 이 낮은 곳에서 피와 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듯했다. 

    ㄷ자 중 맨 위 가로축 2층에는 복싱선수들의 기숙사가 마련돼 있었다. 10개 방마다 2개의 침대와 2명이 바닥에서 잘 수 있는 다락방, 그리고 작은 냉장고가 설치돼 있었다. 최대 40명이 합숙하면서 복싱에만 매진할 수 있도록 설계된 공간이었다. 사각의 링 위 매트에 떨어져 있는 핏자국이 이를 웅변하고 있었다. 

    수영장이 어린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공간이라면, 복싱훈련장은 사나이들의 기합과 신음이 스며드는 공간이었다. 감탄할 대목은 전혀 다른 개성을 지닌 두 건축이 주민들의 생활공간 속으로 스며들면서 멋진 앙상블을 빚어낸 점에 있었다. 건축 본연의 생명력에 충만하면서도 외부 환경과 조화를 위해 이를 속살 깊이 감춰둔 두 건축을 보면서 ‘화이부동(和而不同)’이 따로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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