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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작가의 음담악담(音談樂談)

낭만으로 포장된 여성 착취

1960, 70년대 그루피 문화

  •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낭만으로 포장된 여성 착취

영화 ‘올모스트 페이머스’의 한 장면. [IMdB]

영화 ‘올모스트 페이머스’의 한 장면. [IMdB]

낭만은 과거의 다른 이름이다. 현재는 용인되지 않지만 과거에는 비록 손가락질을 받았어도 어쨌든 일어나곤 했던 일들에 대한 포장이다. 현실의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즉각적인 감정과 충동에 의해 행동을 앞세우던 시대, 미디어가 발달하지 않아 행동을 은폐할 수 있던 시대, 가가호호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두툼한 책으로 묶여 집마다 비치돼 있던 익명의 시대,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어디에서나 일어나곤 했다. 

응원하는 야구팀이 경기에서 졌다고 상대팀 버스를 불태우고, 짝사랑하는 여자를 미행해 알아낸 집 앞에서 밤을 지새우며, 사랑의 매라는 이름으로 교실 끝에서 끝까지 학생의 따귀를 때리던 것들이 ‘그때는 그랬지’라며 가십거리로 소모된다. 시간의 세탁소를 거쳐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한다. 

음악계도 마찬가지다. 과거 활동했던 가수들의 이야기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소재는 불합리한 정산 시스템이다. 저작권도, 인세 개념도 희박하던 시대의 왕은 제작자였다. 계약금 한 푼 안 주고 “음반 내줄게” 한마디로 가수를 장악한 후 음반이 잘 팔리면 차 한 대 뽑아줬다거나, 대박이 나면 아파트 한 채 사줬다거나 하는 식의 후일담은 부지기수다. 

저작권 개념이 확립된 후에도 사업이 어려워졌다는 이유로 가수한테 한 마디 안 하고 판권을 팔아넘겨 정산을 제대로 받지 못한 가수도 많다. 소송까지 갔지만 권리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속만 끓인 음악인도 많다. 시대를 초월해 존경받았음에도 이런 일련의 일들이 남긴 상처 탓에 어느 순간 창작을 접어버린 음악인들의 사례도 종종 들려온다. 피해자는 절대 이를 미화하지 않는다. 오직 가해자만이 포장한다.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그때는 그랬지, 라며.


록 스타와 하룻밤을 훈장처럼 여긴 소녀들

1970년대 록밴드와 그루피를 그린 
영화 ‘올모스트 페이머스’의 한장면과
1973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촬영된 세이블 스타와 영국의 록밴드 슬레이드의 기타리스트 데이브 힐, 로리 매틱스.
(왼쪽부터) [IMdB, gettyimages]

1970년대 록밴드와 그루피를 그린 영화 ‘올모스트 페이머스’의 한장면과 1973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촬영된 세이블 스타와 영국의 록밴드 슬레이드의 기타리스트 데이브 힐, 로리 매틱스. (왼쪽부터) [IMdB, gettyimages]

어두운 이야기는 여기까지. 조금 가벼운 이야기를 해보자. 스타의 권력이 지금에 비할 바 없이 컸던 곳과 시간, 즉 아날로그 시대 팝음악계의 에피소드들이다. 캐머런 크로 감독의 영화 ‘올모스트 페이머스(Almost Famous)’는 1970년대, 록이 음악의 중심에 우뚝 서 있던 시대의 이면을 보여준다. 영화는 음악에 빠진 한 소년이 우여곡절 끝에 당대 최고 밴드의 전미 투어에 동행하는 과정에서 겪는 일들을 그린다. 그 핵심 소재 가운데 하나가 그루피 문화다. 



백스테이지 앞에서 기다렸다 공연장 가드의 ‘간택’을 받아 대기실로 간 후 뒤풀이는 물론, 하룻밤을 같이 보낸 이들을 그루피라고 불렀다. 그루피는 그 나름의 세계를 만들었다. 자신이 누구하고 잤는지를 훈장처럼 달고 다녔다. 그들의 자랑은 그저 뜬소문에 머물지 않고 종종 옐로 저널의 주요 소재가 되곤 했다. 훈장을 주렁주렁 달았던 유명 그루피는 자서전도 냈다. 그들의 증언과 자료는 고스란히 남아 그 ‘낭만의 시대’의 주석이 됐다. 

197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는 그루피가 말 그대로 창궐했던 곳이다. 1960년대 히피 문화의 유산이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인물이 로리 매틱스다. 10대 중반밖에 안 돼 ‘베이비 그루피’로 불린 집단의 일원이던 그가 거쳐 간 거물 록 스타는 한둘이 아니었다. 데이비드 보위, 레드 제플린의 지미 페이지, 롤링 스톤스의 믹 재거…. 지미 페이지는 그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1975년 앨범 ‘Physical Graffiti’에 실린 ‘Sick Again’을 썼다. 

매틱스의 친구이자 그를 그루피계로 인도한 세이블 스타도 빼놓을 수 없다. 베이비 그루피의 리더였던 그는 록 스타들을 유혹했을 뿐 아니라 믹 재거의 아내에게 시비를 걸어 구설에 오르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로드 스튜어트, 마크 볼란(티렉스), 앨리스 쿠퍼, 그리고 믹 재거 등 로스앤젤레스(LA)를 방문한 록 스타와 어울렸으며, 1970년대 펑크의 아버지로 불린 이기 팝과는 자신의 여동생과 셋이 함께 잠자리를 하기도 했다. 또한 펑크 록 스타 조니 선더스와 애정의 도피 행각까지 벌였다. 

2015년 미국에서 미투(Me Too) 운동이 시작됐을 때 매틱스는 인터뷰를 통해 데이비드 보위를 처음 만난 때를 회상했다. “보위는 침실에서 화장실로 간 후 걸치고 있던 기모노를 벗었다. 욕조에 물을 가득 채운 후 자기를 씻겨달라고 했다. 물론 나는 그렇게 했고. 그 후 그는 나를 침실로 데려가 점잖게 내 옷을 벗긴 후 내 첫 경험을 가져갔다.” 이 인터뷰는 미투 운동 열풍과 함께 재조명된 과거 문화예술계의 일면을 보여준다. 이 인터뷰에서 그는 미투 운동이 과거의 자신을 성숙하고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했다고 고백했다.


미투 운동으로 비춰진 그루피의 실체

낸시 스펑겐(왼쪽)과 시드 비셔스. 그들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시드와 낸시’의 한 장면. [IMdB, gettyimages]

낸시 스펑겐(왼쪽)과 시드 비셔스. 그들의 이야기를 영화화한 ‘시드와 낸시’의 한 장면. [IMdB, gettyimages]

통념이 바뀐 시대에까지 살아남아 자신의 과거를 돌아볼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유명 그루피는 대부분 끝이 좋지 못했다. 꽃다운 시절 마약과 알코올, 폭력으로 점철된 시간을 보내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게리 올드먼의 첫 주연작 ‘시드와 낸시’의 실제 모델이던 섹스 피스톨스의 시드 비셔스, 그리고 그루피 출신으로 그의 연인이던 낸시 스펑겐이 대표적 사례다. 

1977년 영국 런던을 중심으로 끓어올랐던 펑크는 하나의 운동으로 불릴 만큼 당시 언더그라운드를 상징한 장르이자 문화였다. 갑작스레 닥친 영국의 불황으로 내일이 없는 실업자인 백인 청년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그들은 기타 코드 3개와 무정부적 가사로 분노의 소음을 만들어냈다. 개중에는 더 클래시처럼 ‘희망 없는 세상에서 스스로 희망이 되겠다’고 외친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대안 없는 분노를 쏟아냈다. 

펑크 그루피를 대표했던 스펑겐 역시 10대 중후반에 그루피 세계에 발을 들였다. 마약 값을 감당하고자 몸을 팔던 그의 마지막 연인이 펑크족 중에서도 가장 막나갔던, 하지만 가장 잘생겼던 시드 비셔스였다. 섹스 피스톨스의 미국 공연 때 만나 눈이 맞았고, 2년간 동거 생활 끝에 호텔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어쨌든 영화에 그 짧은 일대기가 담겼으니 그루피의 역사에 이름 한 줄을 남긴 셈이다. 

끝이야 어찌됐든, 유명 그루피는 공통점이 있다. 대부분 성장 환경이 좋지 못했다. 그 결핍을 유명인과 교제로 풀려 했다. 록 스타들은 그런 그들을 이용했다. 물론 서로 즐겼다고 회상할 것이다. 그때는 그랬을지 모른다. 세상이 바뀌었다. 많이 바뀌었다. 남은 자와 떠난 자, 모두에게 다시 한 번 묻는다면 여전히 그랬다고 말할 수 있는 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매틱스는 말했다. “당시에는 그 관계들이 착취적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미투 운동이 그때에 대한 다른 시각을 가져다 줬다.” 실제로 그랬다. 불과 몇 년 전까지 그루피 문화는 흔한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다. 과거 낭만이 아니다. 미투 운동, 그리고 성정치가 바꾼 세상의 인식이다. 앞으로의 음악이, 예술이 반드시 염두에 둬야 할 변화된 인식이다.






주간동아 2019.08.30 1204호 (p78~80)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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