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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뒤통수 친 사우디의 석유 감산 승부수

생산자와 소비자 카르텔 대결… 러시아산 석유 가격 상한제가 승패 가를 듯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미국 뒤통수 친 사우디의 석유 감산 승부수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왼쪽)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19년 G20 정상회의에서 웃으며 대화하고 있다. [SPA]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왼쪽)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019년 G20 정상회의에서 웃으며 대화하고 있다. [SPA]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9월 22일 이례적으로 포로를 교환했다. 당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군 215명과 외국인 의용대원 10명을 석방했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군 55명을 풀어줬다. 이번 양국의 포로 교환은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최대 규모였다. 외국인 의용대원은 영국인 5명, 미국인 2명, 모로코·스웨덴·크로아티아인 각 1명이었다. 양국의 포로 교환을 중재한 인물은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이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외교력을 발휘한 것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친분 덕분이다. 앞서 에르도안 대통령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흑해를 통한 식량 수송 합의도 중재한 바 있다.

그런데 당시 포로 교환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실세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라는 의외의 중재자도 있었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푸틴 대통령에게 포로로 잡힌 외국인 의용대원 석방을 설득했다. 사우디는 외국인 의용대원 10명의 신병을 러시아로부터 인도해 수도 리야드로 이송한 후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했다. 국제사회는 무함마드 왕세자와 푸틴 대통령의 ‘특별한 관계’에 깜짝 놀랐다.

OPEC+ 하루 원유 생산량 200만 배럴 감산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이 7월 15일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와 만나 주먹인사를 하고 있다. [SPA]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이 7월 15일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와 만나 주먹인사를 하고 있다. [SPA]

무함마드 왕세자가 푸틴 대통령에게 일종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석유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사우디는 그동안 미국 등 서방이 국제유가를 낮추기 위해 석유 증산을 요청해도 응하지 않았다. 푸틴 대통령은 사우디 덕분에 서방의 각종 제재에도 석유를 높은 가격에 수출해 전비로 충당했다. 이 때문에 푸틴 대통령은 사우디에 상당히 우호적인 입장을 보여왔다.

사우디는 그동안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제재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무함마드 왕세자 역시 푸틴 대통령을 비판한 적이 없다. 게다가 알왈리드 빈 탈랄 사우디 왕자가 세운 투자사 킹덤홀딩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후 가즈프롬, 로스네프트, 루코일 등 러시아 에너지 기업에 6억 달러(약 8600억 원)를 집중 투자했다. 서방 국가들이 러시아에 경제제재를 단행하고, 글로벌 기업들이 러시아에서 앞다퉈 철수한 것과는 다른 행보였다. 킹덤홀딩의 최대주주는 무함마드 왕세자가 사실상 운영하는 사우디 국부펀드다.

10월 5일 사우디가 주도하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와 러시아 등 비OPEC 산유국 모임인 OPEC+는 11월부터 원유 생산량을 하루 평균 200만 배럴씩 감산하기로 결정해 미국이 분노하고 있다. 하루 200만 배럴은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2년 만에 가장 큰 감산 폭으로 전 세계 공급량의 2%에 해당한다. 이번 결정으로 OPEC+의 하루 원유 생산량은 4185만 배럴로 줄게 된다. OPEC+의 감산 결정은 무함마드 왕세자의 결단에 따른 것이다. 무함마드 왕세자가 9월 27일 전통적으로 국왕이 맡아온 직책인 총리에 취임하면서 공식적인 국가수반이 된 이후 대규모 감산 조치는 가장 중요한 결정이라고 볼 수 있다. 올해 86세 고령인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사우디 국왕은 자신의 아들인 무함마드 왕세자를 총리로 임명하는 내용이 포함된 내각 인사 칙령을 발표하면서 사실상 왕위를 승계하는 준비에 들어갔다. 총리는 사우디 국왕이 겸임하는 국가수반의 직책이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사우디 왕국을 대표해 외국을 방문하고 사우디가 주최하는 정상회담을 주재하는 등 살만 국왕이 총리로서 하던 업무들을 수행한다. 무함마드 왕세자의 대규모 감산 결정은 푸틴 대통령의 요청을 들어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푸틴 대통령은 OPEC+가 감산하지 않을 경우 유가가 하락해 전비를 조달하기 어려워질 수 있어 사우디가 감산에 적극 나서주기를 바라왔다.



반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그동안 OPEC+의 감산을 막기 위해 사우디 측에 우호의 제스처를 보냈다. 7월 여론 반대에도 사우디를 방문해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 배후로 지목돼온 무함마드 왕세자를 만나 주먹인사까지 나눴다. 당시 바이든 대통령은 무함마드 왕세자의 인권 탄압을 눈감아줬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유가 상승에 따른 물가 폭등을 막기 위해 증산을 요청했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무함마드 왕세자로부터 증산 약속을 받아내지 못했고, 이번에는 대규모 감산 결정으로 수모를 겪게 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아모스 호치스타인 국무부 에너지안보 특사를 비롯한 고위 관리들을 사우디에 파견하는 등 총력을 기울였지만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세계 2, 3위 산유국 사우디와 러시아

사우디군과 미군 전투기들이 아라비아해 상공에서 합동훈련을 하고 있다. [SPA]

사우디군과 미군 전투기들이 아라비아해 상공에서 합동훈련을 하고 있다. [SPA]

미국 정부는 푸틴 대통령의 손을 들어준 사우디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카린 장 피에르 백악관 대변인은 “감산 결정으로 OPEC+가 러시아와 협력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고 비난했다. 서방 전문가들은 “무함마드 왕세자가 푸틴 대통령과의 관계 강화를 통해 미국 정부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여왔다”면서 “사우디의 의도는 러시아와 에너지 동맹을 통해 미국의 석유 패권을 견제하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사우디와 러시아는 세계 2, 3위 산유국으로 두 국가의 석유 생산량은 전 세계의 25%를 차지한다. 사우디는 전통적인 미국의 우방이고 러시아는 사우디 경쟁국 이란의 우방이지만, 국제 석유 시장의 수급 조절과 유가 통제를 위해 협력해야 하는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사우디는 미국 등 주요 7개국(G7)에 이어 유럽연합(EU)까지 러시아의 전쟁 자금을 고갈시키기 위해 러시아산 석유 가격 상한제(원유와 석유 제품의 가격 상한을 넘는 물건에 대해 보험과 금융, 중개, 운행 등 서비스 거부)를 도입하자 상당한 거부감을 보였다. 석유 가격 상한제는 에너지 소비자가 힘을 합쳐 석유 가격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조치다. 반면 사우디 등은 에너지 생산자들이 석유 가격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특히 사우디는 서방 국가들이 석유 가격 상한제를 다른 산유국들에 적용해 압박 수단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우려했다.

국제 컨설팅 업체 에너지 애스펙트의 암리타 센 석유 부문 수석 분석가는 “사우디는 서방 국가들의 러시아산 석유 가격 상한제를 실효성 유무를 떠나 위험한 선례로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사우디는 국제 에너지 시장에서 가장 중요한 ‘스윙 프로듀서’(swing producer: 국제 석유 시장에서 자체적인 생산량 조절을 통해 전체 수급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산유국) 지위를 유지하기를 바란다. 이에 사우디는 미국 일변도 외교에서 러시아와 중국으로까지 보폭을 넓히고 있다.

사우디에 보복 조치 검토 중인 미국

사우디가 2030년까지 건설 예정인 네옴 시티 조감도. [네옴 홈페이지]

사우디가 2030년까지 건설 예정인 네옴 시티 조감도. [네옴 홈페이지]

무함마드 왕세자가 감산을 결정한 또 다른 이유는 자신이 추진하는 ‘비전 2030’ 계획 때문이다. 비전 2030은 석유 의존 경제에서 벗어나 광공업·관광·금융·물류 등 비석유 부문을 개발해 재정 수입원을 다각화하는 대대적인 경제 개혁 정책이다. 사우디는 정부 수입의 75%, 국내총생산(GDP)의 45%를 석유에 의존하는데 이 구조에서 벗어나 석유 없이도 지속되는 경제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천문학적 자금이 필요하다. 무함마드 왕세자는 이미 5000억 달러(약 717조 원)를 투자해 세계 최대 저탄소 친환경 스마트 도시 ‘네옴 시티’ 건설을 시작했다. 네옴 시티는 2029년 동계아시안게임 개최 도시로 선정되는 등 국제사회의 이목을 끌고 있다. 하지만 세계 경제가 침체에 빠져들 경우 석유 수요가 크게 줄어들면서 국제유가가 폭락할 것이 분명하다. 무함마드 왕세자로서는 이에 대비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감산을 선택한 것이다. 미국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4분기 브렌트유 가격 전망치를 기존보다 배럴당 10달러 올린 110달러로 제시했고, 내년 1분기엔 최대 115달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이번 감산 결정은 미국으로서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특히 11월 8일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는 바이든 대통령은 유가 폭등을 저지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바이든 대통령은 11월부터 전략비축유(SPR) 1000만 배럴을 추가 방출하고, 단기에 국내 원유 생산을 증가시킬 수 있는 추가적인 조치를 검토할 것을 지시했다. 미국 정부는 또 휘발유, 디젤 등 석유 관련 제품의 전면적인 수출 통제도 검토하고 있다. 아울러 매장량 기준 세계 최대 산유국인 베네수엘라에 대한 제재를 일부 완화할 방침이다. 그런가 하면 미국 의회에선 미군과 미사일방어(MD)체제를 철수하는 내용의 법안과 석유 생산 수출 카르텔 금지(NOPEC) 법안 등 사우디에 대한 보복 조치들이 거론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 사우디·러시아 등 OPEC+는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글로벌 석유 패권 전쟁에 돌입했다. ‘소비자 카르텔’과 ‘생산자 카르텔’의 이번 대결은 G7과 EU가 12월 5일부터 시행하는 러시아산 석유 가격 상한제가 어떤 결과를 보이냐에 따라 승자의 윤곽이 드러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주간동아 1360호 (p42~44)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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