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324

2022.01.21

좌우파 금기 모두 깬 ‘루쉰의 제자’ 리영희

[조경란의 21세기 중국]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어야 저항하고 교조를 경계할 수 있다”

  • 조경란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입력2022-01-31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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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故)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 [동아DB]

    고(故) 리영희 한양대 명예교수. [동아DB]

    리영희(1929~2010)와 루쉰(魯迅·1881~1936), 두 사상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들은 촌철살인의 글로 각자 처한 조건에서 체제와 우상에 도전해 주류 이데올로기에 균열을 냈다. 이들에게 글쓰기는 일종의 진지전이자 유격전이었다. 진실을 추구하며 주류가 되기를 거부한 자발적 마이너리티였다. 리영희는 1929년 평북 운산군에서 태어났다. 1964~1971년 조선일보, 합동통신 외신부장으로 일했다. 2010년 향년 8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일생 동안 경찰에 아홉 번 연행돼 다섯 번 구치소에 갔고 세 번 재판을 받았다. 언론계에서 두 번, 교수직에서도 두 번 쫓겨났다. 감옥에서 보낸 시간은 1012일이다.


    젊은이에게 던진 두 번의 충격

    리영희는 한국 젊은이가 미국과 중국을 보는 시각에 두 번 큰 충격을 안겼다. 각각 저서 ‘전환시대의 논리’(1974)와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1994)를 통해서다. 오늘날 한국에선 주로 ‘전환시대의 논리’만 기억하나 필자는 두 저작 모두 중요하다고 본다. 공히 당대 금기에 도전했기 때문이다. 전자는 우파의 금기에 도전했고 후자는 좌파의 금기에 도전했다. 다른 생각을 표출할 수 있는 용기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굳이 따지자면 후자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자기 인식의 잘못을 인정한 것이기에 그렇다.

    리영희는 어떻게 좌우파의 금기에 도전했을까. 그는 ‘전환시대의 논리’ 출간 배경을 이렇게 설명했다.

    “자유롭게 생각하고 판단하는 재량을 지니는 자율적 인간의 창조를 위하여 이 책을 썼다. 당시 사회를 지배했던 광신적 반공주의에 대해 저항적 입장에서 군인 통치의 야만성, 반(反)문화성, 반지성을 고발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중략) 남북 민족 간 증오심을 조장하는 사회 현실에 반발하면서 두 체제 간 평화적 통일을 위한다는 입장에서 이 글을 썼다.”

    이 책은 1970년대 한국인의 현대사 및 국제정치 인식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왔다. 리영희는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 인과의 대화’ 등을 출간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1978년 1월 ‘반공법’ 위반 혐의로 리영희에 대한 공판이 열렸는데, 재판 풍경은 웃지 못할 희극과도 같았다. 검사는 마오쩌둥을 “진시황 이후 처음으로 중국을 통일한 인물”이라고 기술한 대목이 반공법 위반이라고 주장했다. “‘8억 인과의 대화’ 내용이 사실일지라도 중공(中共)이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것만으로도 반공법 위반”이라는 논리였다. 리영희는 “그러면 중공을 굶어죽을 지경이라고 기술해야만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검사는 “그렇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지라도 반공법에 걸린다”고 했다. 당시 학생운동으로 체포된 후 수사기관에서 “리영희 책을 읽고 충격받아 학생운동에 뛰어들었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됐다”고 진술한 학생이 많았다. 리영희는 본의 아니게 ‘의식화의 원흉’이 됐다.



    이에 대해 그는 1991년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휴머니즘이었지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아니었다. 그러니 나의 영향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레닌주의,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것까지 내 책임이냐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노예가 아닌 인간은 어떤 대상을 무조건 믿지 않고 자신만의 시각으로 사유한다. 생각할 수 있어야 저항하고 교조를 경계할 수 있다. 이것이 리영희식 휴머니즘의 요체다.

    1991년 1월 이번에는 한국 좌파가 경천동지할 일이 발생했다. 리영희가 좌파의 금기에 도전한 것이다. 당시 그는 한 강연에서 “지난 시기 우리의 유일한 대안이던 마르크스주의의 진로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에 대한 불확실성이 우리 지식인의 고뇌”라면서 다음과 같이 사회주의가 인간을 잘못 해석했다고 진단했다.


    “사상적 일관성이라는 허위의식 고수 안 해”

    “문화혁명 같은 인간개조 실험은 순수한 영웅성, 자기 희생성, 박애성을 보여주지만 인간 자체가 그러한 존재는 아니다. (중략) 사회주의적 인간관은 인간을 도덕적으로 완전히 개조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봤으며, 바로 그러한 것이 사회주의의 실패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중략) 우리는 세계가 30%의 타락과 60%의 도덕성을 유지하면 성공이라고 봐야 하며, 이러한 타협을 이루어내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현실과 이상이 조화되는 안정된 사회이며 ‘존재를 위한 체념’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같은 해 6월 언론 인터뷰에서도 리영희는 비슷한 취지의 자기 고백을 했다. 그는 “나의 책들은 역사의 구체적인 진전 방향을 예측하지 못했고, 단지 이성에 반하는 우상의 파괴나 사회 정의에 대한 원론적 제시를 하는 정도였다”면서 “지금 우리는 지식인 집단의 환경 예측 능력 상실의 시대를 맞고 있다. (중략) 나는 지금 거대한 역사적 변혁 앞에서 지적, 사상적, 그리고 인간적 겸허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심경”이라고 말했다. 해당 인터뷰에서 리영희는 “주관적 오류나 지적 한계가 객관적 검증으로 밝혀질 때 부정된 부분을 사상적 일관성이라는 허위의식으로 고수할 생각은 없다. 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하다”며 자기 역할의 한계를 인정하기도 했다. 지식인이 자신의 옛 시각을 단견(短見)이라고 인정하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많은 지식인이 스스로 오류를 발견해도 별다른 말이 없는 것은 그래서다.

    당시는 1978년 사회주의 중국이 경제 개혁·개방을 단행한 지 10년이 넘은 시점이었다. 중국공산당 원로들은 1989년 톈안문 민주화 시위를 무력 진압한 후 국가 진로를 두고 고심하고 있었다. 세계 사회주의가 이미 실패했어도 한국 사회에는 필자를 포함해 중국 사회주의를 좌표로 여기는 사람이 아직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리영희의 고백은 그들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1970년대 ‘전환시대의 논리’ 때와 반대로 1990년대 그는 좌파의 금기를 깬 셈이다.

    20세기 초 중국 소설가이자  사상가 루쉰(魯迅). [동아DB]

    20세기 초 중국 소설가이자 사상가 루쉰(魯迅). [동아DB]

    리영희는 ‘루쉰과 나’라는 글에서 “내 삶이 뭇사람 눈에 치열한 삶으로 비친 면이 있다면 그것은 나 자신에게 남긴 루쉰의 흔적 덕분”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루쉰의 ‘무쇠로 된 방’(당시 중국의 절망적 상황을 빗댐)을 무너뜨릴 희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글을 쓰겠다는 결단에 감명받았다. 20대에 루쉰의 주장을 접하고 자기 삶의 내용, 방향, 목적이 결정됐다고 밝혔을 정도다. 루쉰이 문필로 악전고투하던 중국의 1910~1930년대는 한국의 1960~1980년대 현실과 흡사했다. 리영희가 루쉰을 소개하던 때 한국 정부는 루쉰을 공산주의자로 규정했다. 루쉰에 대해 논하는 것조차 반공법 규제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당시 마오쩌둥 정권이 루쉰을 성인(聖人)으로 떠받들었기에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 루쉰은 1930년대 국민당, 공산당 모두와 거리를 뒀다. 생전 루쉰은 우파뿐 아니라 좌파와도 싸웠다.

    리영희는 루쉰이 일반 대중을 대한 태도에 주목했다. 높은 자리에서 대중을 가르치겠다는 교만한 자세가 아니라 “함께 고민하고 생각해보자”는 태도로 일관했다는 것. 리영희는 루쉰의 글과 사상에 대해 “현학적 요소가 없다. 고매한 학설이나 이론으로 탁상공론하는 것을 동포에 대한 지식인의 배신행위라고 생각했다”며 “루쉰이 그 시대 중국 사회에서 해야 할 일은 전통과 지배계급의 허위를 까밝히는 것이었다. (중략) 그러자면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쉬운 말로 알기 쉽게 써야 한다”고 평했다.

    사실 리영희가 평생 맞서 싸운 것은 우상과 신화를 만들어내는 교조였다. 그는 “교조의 습관은 냉전체제의 병리현상이기도 하다. 냉전체제에서는 강력한 이분법이 지배한다”며 “남한 정부를 비판하면 자동적으로 북한을 이롭게 하는 것이고, 자본주의 병폐를 지적하면 곧바로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일이 된다”고 지적했다. 그가 비판한 냉전식 교조주의는 오늘날 한국에서 중국을 비판하면 친미(親美)가 되고, 반대로 미국을 비판하면 친중(親中)으로 여겨지는 현실과 유사하다. 독자적 사유를 거치지 않는 조건반사라는 점에서 그렇다.

    좌우파 누구도 전유 못 해

    한국 권위주의체제는 자유를 누리려는 사람들을 가혹하게 탄압했지만 완전히 말살할 수는 없었다. 강준만 전북대 명예교수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상과 표현의 자유 면에서 남한에는 리영희가 존재할 수 있었지만, 북한에는 리영희가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리영희는 한국 사회를 곪지 않게 하는 일종의 항생제였다. 남북한 차이는 거기에서 만들어졌다. 루쉰과 리영희는 좌파와 우파 어느 한쪽이 전유하기에는 버거운 존재다. 전유되는 순간 왜곡이 시작된다. 이들은 체제와 우상에 도전한 자발적 마이너리티 사상가다. 21세기 아시아 휴머니즘의 사상적 자원으로서 그들을 새롭게 주목해야 한다.

    조경란은…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국무총리실 산하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인문정책특별위원회 위원. 중국현대사상·동아시아 사상 전공. 홍콩중문대 방문학자·베이징대 인문사회과학연구원 초빙교수 역임. 저서로는 ‘현대 중국 지식인 지도: 신좌파·자유주의·신유가’ ‘20세기 중국 지식의 탄생: 전통·근대·혁명으로 본 라이벌 사상가’ ‘국가, 유학, 지식인: 현대 중국의 보수주의와 민족주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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