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205

2019.09.06

사회 | 사바나

가게와 운동장 난입도 불사하는 채식주의자 과격 시위

“과격해야 주목받는다” vs “영업 방해에 자칫 사고 날 수도”

  • 정보라 기자

    purple7@donga.com

    입력2019-09-06 17:0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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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바나’는 ‘회사, 알바, 나’의 약칭인 동아일보 출판국 컨버전스 뉴스랩(News-Lab)으로, 소속 기자들은 모두 밀레니얼 세대다. <편집자 주>
    [동아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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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당하죠. 왜 하필 우리 가게에 찾아왔는지 모르겠어요. 남의 영업장에 피해를 주는 건 이해되지 않네요.”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서 닭갈비집을 운영하는 A씨는 6월 19일 저녁 8시 무렵 황당한 일을 겪었다. 자신의 가게에 동물 해방 커뮤니티 회원들이 난입해 5분가량 “육식은 폭력이다”라고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인 것이다. 최근 기자와 만난 A씨는 “1명이 가게 안에서 구호를 외치고, 밖에 있는 2명이 유리창 너머로 그 장면을 촬영했다. 또 1명은 출입문을 지키고 서 있었다. 저녁을 먹던 손님들이 시위대에 항의하기도 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나 역시 동물을 좋아한다. 고양이도 5마리를 키운다. 육식 반대 의견도 존중한다. 하지만 무작위로 고른 식당에 예고도 없이 들어와 피해를 주는 일은 너무하지 않느냐”고 의견을 피력했다.

    야구장에 난입하고, 도계장에서 병아리 구출(?)

    동물 해방 커뮤니티 소속 회원들이 7월 서울 시내 대형마트 정육점 코너와 고깃집에서 시위를 벌였다. [디엑스이 서울 유튜브 영상 캡처]

    동물 해방 커뮤니티 소속 회원들이 7월 서울 시내 대형마트 정육점 코너와 고깃집에서 시위를 벌였다. [디엑스이 서울 유튜브 영상 캡처]

    최근 들어 동물 해방 운동가들이 도계장이나 도축장, 고기 메뉴를 판매하는 음식점 등에 찾아가 시위를 벌이는 일이 늘고 있다. 일부 시위는 과격한 양상을 보이고, 업무나 영업에 지장을 초래해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 동물 해방을 주장하는 쪽은 육식을 동물에 대한 폭력으로 간주한다. 이들은 동물이 평생 좁고 더러운 곳에 갇혀 일생을 보내다 죽임을 당하는 것이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동물 해방’은 ‘노예 해방’에서 차용한 용어다. 

    8월 2일 경기 김포시 고촌읍의 개 경매장에서는 또 다른 동물 해방 단체가 ‘불법 식용 목적의 개 경매장을 즉각 철폐하라’는 시위를 벌였다. 회원 10여 명이 흰색 글씨로 ‘개 도살 금지’라고 쓰인 검정 반팔 티셔츠를 맞춰 입고 ‘먹어도 되는 개는 없다’ ‘동물보호법 개정하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손에 들고 있었다. 이 단체의 이모 씨는 확성기를 들고 “우리는 개들을 잔혹한 사지로 내모는 어둠의 유통 경로이자 농장과 도살장 사이 중간 기착지인 식용 목적의 개 경매장을 고발하고, 철폐하기 위한 행동을 시작한다”고 외쳤다. 이씨는 8월 28일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동물은 인간에게 먹히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7월 28일 서울 구로구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2019 KBO 리그 키움 히어로즈 대 NC 다이노스 경기에서는 식당 난입도 불사하는 단체가 시위를 벌였다. 이날 경기 전 돼지고기 농가 단체인 한돈자조금관리위원회가 ‘키움 히어로즈와 함께하는 한돈 스폰서 데이’ 행사를 개최하며 이 단체의 하태식 위원장이 시구를 맡았다. 하 위원장이 시구하는 순간 회원 5명이 그라운드에 난입했고, 경기 중간에는 응원단상으로 뛰어 들어가려다 경호원들로부터 제지당하기도 했다. 이들은 ‘동물 해방’ ‘종(種) 차별 철폐’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다니며 구호를 외쳤다. 



    도축장, 농장, 수산시장을 찾아가 동물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영상으로 기록하고 이를 세상에 알리며 비질(vigil·농성) 운동을 벌이는 단체도 있다. 8월 26일 경기 화성의 한 도살장 인근에서는 이 단체 회원 10여 명이 모여 트럭을 타고 이동 중인 소를 동영상으로 촬영하고, 정차한 트럭에 실린 돼지들에게 물을 뿌려주는 모습을 페이스북 라이브로 방송했다. 이 단체의 페이스북 계정은 9월 초 현재 1600여 명의 팔로어를 보유하고 있다. 

    일부 동물 해방 시위가 과격해지면서 경찰이 출동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 8월 12일 동물 해방 단체 회원 6명이 충북 충주의 한 도계장에서 닭을 운송하는 트럭을 막아선 채 “여름이(병아리)를 내놓으라”며 13시간에 걸쳐 시위를 하다 입건됐다. 경찰은 이들을 업무 방해 및 건조물 침입 혐의로 수사하고 있다.

    반려동물 사랑이 동물 해방 운동으로

    [GettyImages]

    [GettyImages]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1000만 명을 돌파하면서 동물 해방 운동이 힘을 받고 있다는 시각이 있다. ‘반려인’이 자신의 반려동물에게 애정을 쏟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전체 동물이 겪는 고통과 살육을 윤리 측면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원복 한국채식연합 회장은 “강아지, 고양이 같은 반려동물을 가족으로 여기는 인구가 증가하면서 동물 생명을 존중하고 동물 학대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공정과 윤리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청년 세대가 채식주의자가 되면서 동물 해방 시위가 활발해졌다는 분석도 나온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자본주의 폐해가 하나 둘씩 드러나면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중시하는 흐름이 나타났다. 이런 분위기에서 자란 청년 세대는 다른 세대보다 ‘신념에 따른 소비’를 중요하게 여긴다”고 진단했다. 

    동물 해방 시위는 해외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으로 보인다. 한 동물단체 회원인 이씨는 “동물권(인권에 해당하는 동물의 권리) 운동은 미국, 영국 등에서 역사가 길고 변화 속도도 빠르다 보니 이들 국가의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일요일인 8월 25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동물권 보호 행진’도 해외와 연계한 시위였다. 미국, 영국, 네팔 등 전 세계 40개국에서 연달아 열린 행사가 서울에서도 진행된 것이다. 이날 시위에는 4개 이상의 동물 해방 단체와 채식주의 단체 소속 회원 100여 명이 참가했다. 참가자들은 ‘육식은 살해다’ ‘동물집단살해 그만하자’ ‘동물 착취 그만’ 등의 구호를 외치며 2시간에 걸쳐 세종대로 사거리, 종각 젊음의 거리를 거쳐 청와대 사랑채 앞까지 행진했다. 시위 현장에서 만난 한 영국인 여성은 “영국 런던에서 열린 이 행사에 참석하지 못해 아쉬웠는데, 오늘 서울에서 열린다는 것을 알고 왔다”고 말했다.

    6월과 7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식당 4곳과 야구장, 대형마트 정육점 코너에서 시위를 벌인 단체가 화제로 올라왔다. 이 단체 회원 20여 명은 7월 14일 서울 이마트 영등포점의 정육점 코너에서 10분간 시위를 벌였다. ‘폭력을 멈춰주세요’ 등의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월트디즈니 만화영화 ‘포카혼타스’ OST 가운데 하나로 동물 보호 내용이 담긴 노래 ‘바람의 빛깔’을 불렀다. 그들은 흰색 국화꽃을 진열장 위에 놓기도 했다. 이 단체는 이러한 시위 현장을 영상으로 촬영해 유튜브에 올리고 있다. 

    해외에서도 채식주의자들의 시위가 이따금 폭력을 동반하기도 한다. 4월 8일 호주 멜버른, 브리즈번, 골번 등 9개 주요 도시의 도심과 대형 도축장 등에서 채식주의자들이 쇠사슬로 자신들의 몸을 묶은 채 동물 해방을 주장하는 시위를 벌였다. 지난해 프랑스 동북부 대도시 릴에서는 맥도날드, 정육점, 생선가게 등 9개 상점이 잇따라 공격받는 일이 벌어졌다. 채식주의자들이 돌을 던져 창문을 깨고, 스프레이 페인트로 ‘종 차별 금지’ 같은 문구를 적거나 가짜 피를 마구 뿌리고 달아났다. 

    과격한 동물 해방 시위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야구장 응원석에서 제지당한 ◯◯활동가들’ ‘초밥 식당 방해 시위’ ‘서울 마트 방해 시위’ 동영상에는 각각 1630개, 394개, 834개의 댓글이 달렸는데, 대다수는 ‘강요도 폭력이야’ ‘아니 왜 야구장에서…’ ‘영업 방해 아닌가’ 등 관련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평화적 시위는 불가능할까”

    2016년 10월 29일 영국 런던에서 동물 해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열렸다. [GettyImages]

    2016년 10월 29일 영국 런던에서 동물 해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열렸다. [GettyImages]

    이에 대해 한 단체 측은 “과격해야 주목 받는다”고 주장한다. 회원들은 “6월에 4명이 꾸린 단체가 현재 100명 넘는 지지자를 확보했다. 우리 활동을 좋게 보는 사람들이 분명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영업 방해라는 지적에 대해서는 “영업 방해와 동물 폭력 가운데 어떤 것이 더 심각한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찰 수사도 이들을 막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경찰 수사에 대해 “동물들이 겪는 공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차 안에 강아지가 갇혀 있다면 사람들은 다른 이의 차를 훼손하는 게 불법이지, 합법인지 생각지 않고 자동차 창문을 깨 강아지를 구할 것이다. 우리도 그렇다. 우리도 돼지와 소를 구할 뿐”이라고 말했다. 

    키움 히어로즈 관계자는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그라운드에 난입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그들의 의견을 존중하지만, 경기 관전에 방해가 될뿐더러 자칫하다 큰 사고로도 번질 수 있으니 과격한 시위는 자제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마트 관계자는 “당시 고객들이 굳이 영업 장소까지 불쑥 찾아와 시위하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니냐며 불편해했다. 사전 통보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 우리 직원들도 몹시 당황스러워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2030세대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만 몰두하다 보니 때론 자신의 생각을 따르라고 과격하게 요구하기도 한다. (젊은 세대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기보다 평화적인 방법으로 설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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