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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25 최초 승리’ 최용남이 해병대로 간 까닭은

최재형 출마로 재평가 대한해협해전, 차기 항모는 백두산함으로

  •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6 · 25 최초 승리’ 최용남이 해병대로 간 까닭은

준장 시절의 고(故) 최용남 해병 소장. [사진 제공 · 전쟁기념관]

준장 시절의 고(故) 최용남 해병 소장. [사진 제공 · 전쟁기념관]

대선 경쟁이 가열되면서 후보자 깎아 내리기도 본격화했다. ‘까도 까도 미담’뿐이라던 최재형 전 감사원장의 잘못 들추기도 펼쳐졌다. 이런 공격은 뜻밖의 사태를 만들 수도 있다. 최 전 원장의 부친 고(故) 최영섭 해군 대령이 참전한 대한해협해전도 자칫 뒤집기 대상이 될 수 있다.

대한해협해전은 6·25전쟁 당시 우리 군 최초의 승전이었다. 현역 시절 최영섭 씨는 전공(戰功)이 많았지만 군에서 이른바 잘나가진 못했다.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해양소년단 고문으로 활동하며 해군과 바다를 위해 헌신했다. 해군도 아들인 최 전 원장이 대권에 도전하기 전까진 최영섭 씨를 내세워 해군을 홍보했다. 다만 대한해협해전 주역은 따로 있다. 백두산함 함장이던 고(故) 최용남(崔龍男·1923~1998) 해군 중령(최종 계급 해병 소장)이다.

영광 속 갈등

최재형 전 감사원장의 부친 고(故) 최영섭 퇴역 해군 대령. [동아D]

최재형 전 감사원장의 부친 고(故) 최영섭 퇴역 해군 대령. [동아D]

최재형 흠집 내기가 본격화하면 “승전 주역이 최영섭으로 조작됐다”며 대한해협해전을 폄하하려는 주장이 나올 수 있다. 해군과 해병대의 갈등을 증폭시키려 할 수도 있다. 이를 막으려면 이 해전을 객관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승리의 영광 속 숨겨진 갈등을 드러내고 교훈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군이 정치에 이용되는 사태를 막고 해군과 해병대를 발전시키는 방안을 찾기 위해 대한해협해전을 다시 살펴보고자 한다.

평북 구성군 출생인 최용남 씨는 명문 신의주 동중(東中)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1942년 연희전문 상과에 입학했다. 그의 부친은 조선일보 구성지국장으로서 포목상과 여관업 등으로 재산을 일궈 몰래 독립군을 지원했다. 당시 일제의 ‘학도병 지원’에 끌려가게 되자 부친은 그를 만주로 시집간 큰누이 집에 숨어 있게 했다. 그런 어느 날 아버지가 크게 상한 모습으로 일본 순사와 함께 만주로 왔다. 최용남 씨는 “더는 아버지를 괴롭히지 마라”는 조건을 걸고 학도병에 지원했다.

서태평양 어느 섬에 배치된 그는 미군기 폭격과 그것보다 가혹한 차별 속에서도 1945년 봄 장교시험에 도전해 합격했다. 같은 해 8월 1일 일본 육군 소위로 임관했는데 보름 후 일제가 항복했다. 분단으로 이북 고향에 가지 못하게 된 그가 모교를 찾아가자 유억겸 당시 연희전문 학장이 “자네는 군 경험이 있고 우리나라 3면이 바다이니 해군으로 가라”고 했다. 유 학장 말을 들은 그는 손원일 초대 해군참모총장(국방부 장관 역임)이 조직한 ‘해방병단(海防兵團)’에 들어가 소위가 됐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정식으로 해군이 출범하고 이듬해 그는 중령으로 진급했다.



당시 한국 해군은 손원일 총장 주도로 전투함 도입에 애쓰고 있었다. 손 총장이 벌인 모금운동과 이승만 대통령의 도움으로 6만 달러를 마련했다. 영어에 능한 최용남 당시 중령에게 미국으로부터 구입할 전투함을 알아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이에 앞서 최 중령은 미국에서 250t급 어업지도선(후일 ‘지남호(指南號)’)을 도입하라는 임무도 받은 터였다. 도미한 그는 미 해군이 자국 해양대에 기증한 450t급 초계정(patrol craft·PC)에 주목했다. 함부로 매각할 수 없는 현역 군함과 달리 무장 해제된 초계정은 구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미국 측도 해양대가 인수한 함정을 한국이 도입하는 것에 동의했다.

이 함정은 정비를 받고 1949년 12월 26일 대한민국 해군 ‘백두산함’으로 거듭났다. 함번은 ‘럭키세븐’을 딴 701. 백두산함은 하와이에 입항해 미 육군이 제공한 3인치 육상포를 함포 삼아 장착했다. 괌에 들러선 포탄 100발을 인수했다. 백두산함이 이듬해 4월 10일 진해에 입항하자, 해군은 최 중령을 함장 삼아 두 달간 전국 주요 항구를 돌며 국민에게 전투함을 마련한 사실을 홍보케 했다.

6월 24일 ‘전국 투어’를 마친 백두산함이 진해에 돌아온 이튿날 6·25전쟁이 터졌다. 25일 새벽 북한 해군은 여러 척의 함정을 동원해 동해안 옥계·묵호·죽변으로 무장병력을 상륙하게 했다. 그러곤 상륙에 실패한 것처럼 병력을 후퇴시켰는데 날이 저물자 함정 한 척을 그대로 남하시키는 양동(陽動)작전을 펼쳤다. 놀란 해군은 이날 정오 ‘작전명령 49호’로 최 중령이 지휘하는 백두산함에 출동 지시를 내렸다. 25일 저녁

8시쯤 백두산함은 부산 앞바다를 지나 동해로 들어섰는데 견시병이 괴선박을 발견했다. 탐조등을 비추니 기관포와 북한 인민군이 보였다. 군 지휘부의 혼미로 백두산함은 우여곡절 끝에 이튿날 0시 10분 사격 승인을 받았다. 곧이어 0시 30분쯤 우리 해군 사상 처음으로 ‘함포사격’을 했다.

대한해협해전 승리 주역인 해군 백두산함. [사진 제공 · 해군]

대한해협해전 승리 주역인 해군 백두산함. [사진 제공 · 해군]

‘전국 투어’ 다음 날 터진 6 · 25

초탄은 명중하지 않은 듯, 괴선박이 즉각 응사했다. 모의연습만 해본 포술부가 3인치 포탄을 10여 발째 날리자 괴선박에서 엔진 연기와는 다른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포탄이 괴선박 옆구리를 찢고 들어가 엔진실을 파괴한 것이 분명했다. 결정타를 맞은 적함이 계속 격렬히 기관포를 쏴 백두산함도 계속 포격했는데, 35번째 포탄이 포신에 걸려 사격 불능이 됐다. 다행히 그때쯤 적함은 저항을 그치고 침몰했다. 이 교전으로 백두산함 여러 곳이 피탄됐고 2명이 전사했다. 1950년 2월 해사 3기로 임관한 최영섭 씨는 당시 유용빈 포술장을 보좌하는 갑판사관으로서 백두산함에 탔다. 견시병이 괴선박을 발견했을 당시 당직사관이던 그는 지체 없이 함장 최 중령에게 보고했다. 그리고 적탄이 쏟아지는 갑판에서 수병들을 지휘해 한국 해군 최초의 전투이자 승전인 대한해협해전에 일조했다.

만약 해군이 적함을 막지 못했다면 북한 특공대가 부산에 상륙해 모든 전선에서 밀리던 대한민국은 붕괴됐을 공산이 크다. 백두산함 전 장병은 무공훈장을 받았는데, 최 중령은 ‘살아서는 받기 어렵다’는 태극무공훈장을 수훈했다. 미군은 일본에서부터 부산을 잇는 해상 보급로를 지켜냈다며 은성(銀星)무공훈장을 수여했다. 최 중령은 이후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해 충무무공훈장도 받았다. 해군에서 가장 많은 실전과 전공을 쌓은 이가 된 것이다. 그러자 “다음 총장은 당신이네” “진짜로 북한 함정을 격침한 것 맞느냐”며 농담을 핑계로 시기하는 이이 늘어났다.

고심하던 최 중령에게 인생의 변곡점이 찾아왔다. 1949년 4월 15일 신현준 중령이 해군에서 대대 규모 병력을 떼어내 해병대를 창설한 터였다. 해병대 창설에 참여한 해방병단 동기 김성은 중령이 최 중령에게 합류를 권했다. 1951년 말 결심을 굳힌 최 중령은 육군 포병학교에 들어가 1년간 교육을 받고 1953년 초 해병대로 옮겼다. 그리고 소장까지 진급해 해병대 1사단장 등을 지냈으며 5·16 군사정변 후 전역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에 협조하지 않았기에 그 뒤로 다시 답답한 세월을 보냈다.

1973년 박정희 정권은 해병대사령부를 해체해 해군본부에 병합시켰는데, 그 때문인지 해군과 해병대는 이후 대체로 반목했다. 1987년에야 해병대사령부가 부활해 해군에서 독립했다. 해군은 1988년 처음으로 대한해협해전을 기리기로 하고 부산 대청공원에 전승탑을 세웠다. 최용남 씨는 백두산함 함장 자격으로 참석했으나 해군 중심의 행사를 불편해했다. 한동안 해군은 대한해협해전 행사를 해군 행사로만 한정하는 단견을 유지했다. 해군 최초의 전투함이자 승전함 백두산함도 일찌감치 고철로 팔렸다.

영웅들 오롯이 기억해야

전쟁 후 최영섭 씨는 어찌 지냈을까. 그 또한 많은 전공을 세우고 무공훈장을 받았지만 도처에서 ‘시기의 덫’에 걸려 대령으로 전역했다. 노병들이 속속 별세하는 가운데 대한해협해전 승전의 산증인으로 남아 있다 올해 타계했다. 해군은 뒤늦게 백두산함 복제품 건조를 추진했는데, 최재형 전 원장이 대권 도전에 나서자 망설이고 있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대선과 무관하게 복제품 건조를 서둘러라” “백두산함 복제품을 광화문광장 이순신 동상 부근에 설치하라”는 죽비 소리도 나온다. 최근 한국 해군은 경항공모함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첫 경항모에 백두산함이라는 함명을 계승하면 어떨까. 잠수함에 손원일 초대 해군참모총장, 고속함에 연평해전 전사자인 윤영하 소령의 이름을 붙였듯, 새 해군 함정에 최용남이라는 이름을 붙여 해군과 해병대 관계를 돈독히 하자는 주장도 나온다. 대한해협해전과 영웅들을 오롯이 기억할 때 한국 사회와 군은 좀 더 성숙해질 수 있다.





주간동아 1299호 (p48~50)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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