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노선 무너진 엔화 추락, 아시아 외환위기 시발점 되나

불확실성 높이는 일본은행 행보… 더는 안전자산 아냐

  • 한지영 키움증권 투자전략팀 애널리스트

    입력2022-11-01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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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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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전자산이었다. 많은 사람이 위기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이것을 보유하고자 앞다퉈 은행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너도나도 팔려고 할 뿐 아니라, 오히려 가치 하락에 베팅하는 분위기다. 일본 엔화 이야기다. 2022년 10월 말 현재 엔/달러 환율은 150엔대를 넘나들고 있다. 이는 지난해 말 대비 28% 넘게 상승한 수치다. 달리 말하면 엔화 가치가 1년도 되지 않아 30% 가까이 폭락한 것이다.

    신흥국 통화도 아닌 선진국의 통화가치가 이렇게 급락한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국내총생산(GDP) 기준으로 일본은 미국, 중국 다음으로 경제 규모가 큰 국가다. 해외에 투자한 순자산(정부, 기업, 개인이 가진 해외 자산에서 외국인이 보유한 일본 자산을 차감한 자산)이 2021년 말 기준으로 약 411조 엔(약 3960조 원)에 육박하며, 외환보유액도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2022년 8월 말 기준 일본 외환보유액은 1조3000억 달러·약 1854조 원).

    시장은 이미 엔화 하락에 베팅

    이처럼 각종 경제지표를 살펴보면 일본은 여전히 선진국 톱티어 국가에 속하며, 이 국가의 통화인 엔화는 안전자산 지위를 부여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오늘날 엔화는 왜 안전자산이 아니라 위험자산으로 인식되고 있을까. 일단 그 원인은 글로벌 달러화 초강세, 일본은행(BOJ)의 정책 불확실성, 심리 등 3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먼저 미국 중앙은행(연준)이 인플레이션에 공격적으로 대응하고자 초유의 3연속 자이언트 스텝(075%p 인상)을 단행하면서 연준과 다른 나라 중앙은행의 정책금리 차이가 크게 벌어졌다. 이에 맞춰 유럽중앙은행(ECB), 영국중앙은행(BOE) 등 주요국 중앙은행은 저마다 큰 폭의 금리인상을 단행하고 있지만 일본은행 정책금리는 현재도 -0.1%로 수년째 동결 상태다(그래프1 참조). 경제학적 관점에서 환율을 결정하는 요소 중 하나는 국가 간 정책금리 차이다. 금리가 낮은 국가에서 금리가 높은 국가로 자본이 이동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자국 통화가 가파르게 급락하면 해당 나라 중앙은행은 정책 변화에 나서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일본은행은 긴축에 나서는 여느 중앙은행들과 달리 완화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물론 10월 21일 밤 일본은행이 약 300억 달러(약 42조8040억 원) 규모의 달러화, 미국채를 일시에 매도하는 개입을 하면서 150엔이 넘던 엔화는 순식간에 147엔으로 하락했다. 외환시장에서는 150엔 선을 최후 저지선으로 인식했던 만큼 일본은행 역시 이를 좌시할 수 없어 행동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0월 25일 현재 엔화가 다시 150엔 선을 향해 올라가는 모습을 볼 때 일본은행의 한밤중 기습(?) 효과는 오래가지 못하는 듯하다. 아마도 외환시장을 포함해 전반적인 시장 참여자들이 일본은행에 원하는 바는 통화정책의 큰 틀을 바꾸는 일인 것 같다.



    ‘그래프2’는 스왑시장에서 거래되는 10년물 일본 국채금리와 공식적인 10년물 금리 추이를 나타낸 것으로, 최근 수년 동안 이 둘은 거의 붙어 다니다시피 할 정도로 유사한 가격 흐름을 보였다. 하지만 올해 들어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는 상황이다. 10년물 공식 국채금리가 0.25%대에 고정된 이유는 일본은행의 수익률곡선통제(YCC) 정책 때문이다. 일본은행은 만성적 장기 디플레이션(물가하락)에서 벗어나고자 채권을 지속적으로 매입해 금리를 0.25%대에 고정시키고 있다. 그럼에도 10년물 엔 스왑금리가 상승한다는 것은 시장에서는 일본은행이 YCC 정책을 포기하고 금리인상에 나서지 않는 이상 엔화 가치 방어가 어렵다는 점에 베팅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외환위기 최악 시나리오지만

    현재 일본에서도 금리인상을 통해 자국통화 가치 하락, 수입물가 급등에 대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일본의 9월 소비자물가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3.0%로 집계되며 31년 만에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이쯤 되면 일본이 드디어 장기 디플레이션에서 탈출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우크라이나발(發) 위기와 엔화 가치 급락이 에너지, 원자재, 음식료 등 관련 품목들의 수입 물가상승을 유발하면서 일본 내수 경제에 부담이 되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나 일본은행은 큰 폭의 정책 변화에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과도한 환율 쏠림 현상을 지적하면서 추가 개입만 암시했을 뿐이다.

    물론 최근에 했던 것처럼 서프라이즈성 개입을 통해 엔화의 과도한 약세 현상을 중간 중간 제어할 수는 있겠지만, 이들에게도 외환보유액이라는 실탄은 무한하지 않다. 또 이미 수많은 시장 참여자 사이에서 일본은행이 정책 변화에 나서지 않는 이상 엔화 약세 추세를 막을 수 없다는 심리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 만큼 엔화 약세는 쉽게 꺾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일본발 아시아 외환위기가 발생할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선진국 통화인 일본의 통화가치가 급락하는데 한국이나 베트남, 인도 같은 다른 아시아 국가의 통화가치가 버틸 수 있겠느냐는 주장이다. 특히 달러화 표시로 부채를 발행한 신흥국, 아시아 국가들은 현 상황을 버티기 어려울 수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최악의 시나리오일 뿐이지만, 현재 전 세계 외환시장 불안의 중심에 놓인 것이 엔화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일본은행은 금리를 인상하거나 YCC 정책을 포기해 시장의 손을 들어줄까. 아니면 내수 물가상승에도 국가 부채 부담 등을 우려해 완화 스탠스를 고수할까. 현재로서는 그들이 어떤 선택을 내릴지 예측이 불가능하다. 당분간 미 연준의 정책 불확실성뿐 아니라, 일본은행의 정책 불확실성도 시장의 불안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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