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286

2021.04.23

미국·유럽·일본이 자국에서 반도체 제조하려는 이유

차량용 반도체 품귀 현상으로 촉발…경쟁 아닌 안정적 공급 목표

  •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

    입력2021-04-28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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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31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조 달러가 넘는 대규모 부양책을 발표했다. [AP=뉴시스]

    3월 31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조 달러가 넘는 대규모 부양책을 발표했다. [AP=뉴시스]

    최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일자리 창출과 기업 회생을 위해 도로, 다리, 5세대(5G) 통신망 등 인프라 구축에 2조2500억 달러(약 2512조 원)를 투자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이 중 500억 달러(약 55조8250억 원)를 반도체 분야에 투자하기로 함에 따라 미국 정부의 반도체 제조 부흥 행보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반도체는 애초에 미국에서 개발됐다. 그만큼 미국이 반도체 제조 원천 기술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으며, 세계 반도체 시장 점유율 역시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미국이 최근 반도체 제조 부흥을 강조하는 배경은 무엇일까. 반도체 제조 분야에 대한 해외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반도체 공급에 차질이 생기자 첨단산업뿐 아니라 기존 주력 산업인 자동차 생산에도 영향을 미치게 됐기 때문이다.

    반도체 사용되지 않는 IT 제품 없어

    반도체는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자율주행 자동차 등 신산업에서 핵심 부품으로 사용된다. [GETTYIMAGES]

    반도체는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자율주행 자동차 등 신산업에서 핵심 부품으로 사용된다. [GETTYIMAGES]

    초창기 반도체산업은 반도체 설계부터 제조, 판매까지 한 기업이 모든 공정을 수행하는 IDM(Integrated Device Manufacturer: 종합 반도체 기업) 형태로 시작됐다. 하지만 반도체 설계 전문 프로그램인 EDA(Electronic design automation: 반도체 설계 자동화)가 개발·보급되면서 자금력은 부족하지만 뛰어난 아이디어로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는 반도체 설계 전문 팹리스(fabless) 기업이 등장했고, 미국 실리콘밸리는 반도체산업 분업화를 촉진했다.

    초기 팹리스 기업은 반도체 제조 시설을 보유한 IDM에 생산을 위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IDM은 자사 제품을 우선 생산했고, 일부 제품은 팹리스와 IDM이 경쟁 관계라 반도체 제조만 전문으로 하는 순수 파운드리의 필요성이 커졌다. 대만 TSMC는 1987년 이러한 팹리스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첫 파운드리 기업으로 설립됐다. 우리나라가 1983년 D램 개발을 시작으로 메모리 반도체를 집중적으로 육성하던 시기에 대만은 파운드리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것이다. 미국 제조업의 특징 중 하나는 새로운 산업이 일정 수준으로 성장하면 부가가치가 높은 연구개발(R&D)은 미국 기업이 수행하고, 부가가치가 낮은 제조 분야는 인건비가 저렴한 국가로 생산 거점을 옮긴다는 것이다. 반도체산업 역시 다른 산업과 마찬가지로 반도체 제조 공정에서 부가가치가 높은 설계 분야는 미국 기업이 담당하고 제조 공정은 아시아지역으로 이동시켰으며, TSMC를 비롯한 대만 파운드리 기업들이 생산을 담당함으로써 상호 발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미국을 선두로 유럽, 일본 등 기존 반도체 선진국들이 반도체 제조 기반을 자국에 재구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전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TSMC에 미국 내 파운드리 건설을 요구했고, TSMC는 지난해 5월 애리조나주에 반도체 공장을 건설한다고 발표했다. 이어서 조 바이든 행정부는 미국 내 반도체 제조업 부흥을 위한 지원을 약속했으며, 인텔은 이를 기다렸다는 듯 200억 달러(약 22조3300억 원)를 투자해 파운드리 산업에 재진출한다고 발표했다.

    미국뿐 아니다. 일본은 TSMC와 협력해 연구시설 및 후공정 생산공장 건설을 발표했다. 우리나라에 메모리 반도체 왕좌를 빼앗긴 이후 반도체 제조 분야에 적극적이지 않던 일본이 이 분야에 다시 뛰어든 것이다. 유럽 역시 반도체산업 투자를 발표하면서 자급률 20%를 목표로 내세우고 있다. 반도체 제조를 외부에 위탁하던 국가들이 앞다퉈 과거로 돌아가 자국에서 제조까지 모두 수행하겠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반도체 공급에 차질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최근 반도체가 사용되지 않는 정보기술(IT) 제품은 없다. 특히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자율주행 자동차 등 신산업에서는 반도체가 핵심 부품으로 쓰인다. 이번 자동차용 반도체 부족 사태와 같이 신산업뿐 아니라 기존 주력 산업도 반도체 공급에 따라 성과가 좌우될 정도로 반도체 역할이 매우 커졌다. 따라서 반도체 생태계에서 비중이 적게 평가되던 제조 분야가 재평가받고 있다.



    게다가 국내총생산(GDP) 세계 2위 국가인 중국이 반도체 굴기를 선언하고 막대한 자금력을 투입해 반도체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고 있다. 중국은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정식으로 가입한 이후 글로벌 기업들이 생산기지로 활용하면서 세계의 생산 공장으로 성장했다. 더불어 자국 내 전자기기 생산 기업도 늘어나면서 반도체 수요가 급격히 증가했고, 세계에서 반도체를 가장 많이 소비하는 국가가 됐다. 그러나 반도체의 8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이라 반도체 자급률을 높이려는 것이다.

    안정적 공급 믿음 줘야

    지금 반도체 제조 부흥을 외치는 국가나 중국의 목적은 반도체를 생산해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반도체를 이용한 산업이 안정적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기존 주력 산업, 그리고 신산업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반도체가 반드시 필요하므로 이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최대 목표다. 반도체 제조 부흥으로 패권 경쟁이 심화하면 우리나라 반도체산업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 분명하다. 우리나라는 메모리 반도체 강국이다. 국내에 반도체 제조 설비를 이미 갖추고 있으며, 경기 평택과 용인에 확장 중이다. 이러한 상황은 현재 여러 국가가 반도체 제조 부흥을 외치는 상황에서 상당히 유리한 위치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다른 국가들과 경쟁하기보다 상대에게 반도체를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면서 신뢰 관계를 돈독히 해야 한다. 반도체 제조 부흥을 외치는 국가들이 원하는 것은 경쟁이 아닌 반도체의 안정적 공급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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