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256

2020.09.11

30초에 의식 잃게하는 노비촉, 독러 가스 협력도 흔들어

반인륜 범죄 목격한 메르켈 독일 총리, 러시아 가스 프로젝트 재고 카드로 푸틴 압박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입력2020-09-10 13: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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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러시아 정부에 나발니 암살 시도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DPA]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러시아 정부에 나발니 암살 시도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있다. [DPA]

    ‘노비촉’(Novichok)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치명적인 화학무기 중 하나이다. 러시아어로 ‘신입’ 또는 ‘새로 온 사람’이라는 뜻인 노비촉은 신경작용제다. 옛 소련이 1970~1980년대 남부 사라토프주 도시 쉬하니에 있는 군사 연구기지에서 노비촉을 제조했다. 노비촉에 노출되면 30초에서 2분 사이 동공 수축, 호흡 곤란, 구토, 발작 등의 증상을 보이다가 의식을 잃고 사망한다. 노비촉의 독성은 북한이 지난 2017년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이복형인 김정남의 암살에 사용됐던 VX 가스보다 5~8배나 강하다. 노비촉은 액체 형태이지만 파우더 등 고체로 만들 수도 있어 운반하기도 쉽다. 개리 스티븐스 영국 리딩 대학 교수는 “노비촉은 신경작용제인 사린 가스나 VX 가스보다 더 위험하고 정교하며 식별하기도 어렵다”고 밝혔다. 소련은 나토의 화학 무기 감시망을 무력화하려는 목적으로 노비촉을 개발했다. 노비촉 개발에 참여했던 화학자 빌 미르자야노프는 1992년 러시아 시사주간지 모스콥스키예 노보스티와의 인터뷰를 통해 처음으로 존재 사실을 밝혔다. 이후 미르자야노프는 국가비밀을 폭로한 혐의로 투옥됐다가 석방됐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자서전 ‘국가의 비밀’(State Secrets)을 통해 노비촉의 화학 구조를 공개했다. 그는 “노비촉의 화학구조는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비(非)국가기관이 제조할 수 없다”고 밝혔다.

    반(反)푸틴 운동의 대표적 인물

    러시아 야권 지도자인 알렉세이 나발니가 반푸틴 집회에 참석한 모습. [TASS]

    러시아 야권 지도자인 알렉세이 나발니가 반푸틴 집회에 참석한 모습. [TASS]

    노비촉은 영국으로 귀화한 전직 정보요원인 세르게이 스크리팔 암살 시도에 사용되면서 국제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스크리팔은 1990년대 러시아 군정보기관인 총정찰국(GRU) 소속 대령으로 유럽에서 근무하다 영국 정보기관인 MI6에 포섭돼 이중간첩으로 활동해왔다. 그러다 그는 정체가 탄로 나면서 러시아 방첩기관에 체포돼 수감생활을 하다가 스파이 맞교환으로 영국으로 이송된 후 망명했다. 그는 딸 율리야와 함께 2018년 3월 4일 런던 남부 솔즈베리에서 외식하러 나갔다가 쇼핑몰 벤치에서 의식을 잃은 상태로 발견됐다. 당시 이들 부녀는 러시아 GRU 요원 2명이 집 현관 문 손잡이에 발라놓은 노비촉에 중독됐다. 영국 정부는 수사력을 총동원해 이들의 소행임을 밝혀냈고, 보복 조치로 자국 주재 러시아 외교관 23명을 추방했다. 미국을 비롯해 26개국도 이에 동조해 러시아 외교관 150여 명을 국외로 내쫓았다. 스크리팔 부녀는 다행히 죽지 않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퇴원했다. 미르자야노프는 “피부로 침투하는 노비촉은 습도가 높아지면 독성이 약해진다”며 “영국의 습한 날씨가 스크리팔 부녀의 목숨을 살린 셈”이라고 밝혔다. 

    노비촉의 다음 타깃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적이자 야권지도자인 알렉세이 나발니(44)였다. 나발니는 러시아에서 반(反)푸틴 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나발니는 지난 8월 20일 시베리아 톰스크에서 여객기를 타고 모스크바로 가던 중 기내에서 쓰려져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다. 아침에 차 한 잔만 마셨던 나발니는 옴스크 제1구급병원으로 후송돼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이후 독일 인권 단체의 도움으로 베를린의 병원으로 옮겨진 나발니는 독극물 중독 증세를 보였다. 독일 정부는 9월 2일 병원 의료진의 요청에 따라 군 연구소에서 나발니에 대한 정밀 검사를 실시한 결과, 노비촉에 노출됐다는 명백한 증거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격노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두 차례나 기자회견을 갖고 러시아 책임론을 강력하게 제기했다. 메르켈 총리는 “나발니는 살인미수의 희생자”라면서 “그의 침묵을 원한 누군가가 독극물을 사용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메르켈 총리는 “러시아 정부만이 답할 수 있고, 반드시 답해야 할 매우 심각한 문제”라면서 “제재 여부는 러시아 정부가 어떤 입장을 보이느냐에 달려있다”고 경고했다.

    중대한 반인륜 범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크렘린궁]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크렘린궁]

    평소 기자회견에서 차분하고 신중한 단어를 선택해온 메르켈은 이번 사건에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하고 강경한 표현으로 분노를 그대로 표출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이번 사건이 중대한 반인륜 범죄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독일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가장 중시하는 국가 중 하나이다. 게다가 물리화학자이자 동독 출신인 메르켈 총리는 화학무기의 잔혹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메르켈 총리의 남편도 베를린 훔볼트대 화학연구소 소속 과학자이다. 또 다른 이유는 러시아가 그동안 독일을 상대로 벌여온 일련의 정보 공작들을 차제에 제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독일 정보기관은 지난 5월 메르켈 총리의 지역 사무소를 비롯해 연방 하원을 해킹한 혐의로 러시아 GRU를 지목했다. 독일 정보기관은 또 지난해 8월 조지아 국적의 체첸 반군 지도자 벤젤림칸 칸고슈빌리가 베를린 시내에서 총격으로 숨진 사건을 러시아 GRU의 소행으로 추정했다. 당시 메르켈 총리는 “나는 매일 러시아와 신뢰를 쌓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러시아가 오히려 나를 골치 아프게 만들고 있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더욱 중요한 이유는 메르켈 총리가 푸틴 대통령의 팽창 정책에 제동을 걸어야 할 때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메르켈 총리는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 강제병합에 이어 벨라루스에서 부정 선거 의혹으로 알렉산데르 루카셴코 대통령의 6선 연임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 사태에 군사개입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보고 있는 듯하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독일 정부는 유럽연합의 러시아 경제 제재조치 1년 연장에 앞장섰고,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러시아를 초청하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제의에 가장 먼저 반대했다. 메르켈 총리는 또 푸틴 대통령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러시아가 벨라루스 사태에 개입해선 안 된다”면서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메르켈 총리는 그동안 공을 들여온 ‘노르트 스트림2’ 프로젝트를 러시아에 대한 압박 카드로 꺼내들었다. 이 프로젝트는 러시아 서부 나르바에서 출발해 발트해를 지나 독일 북부 그라이프스발트까지 1225㎞에 이르는 해저 가스관을 건설하는 것이다. 2018년 착공해 현재 공사의 90%가 완료됐고, 올 연말 완공되면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러시아산 천연가스가 독일로 공급된다. 수송량은 연간 550억㎥로 연간 유럽 천연가스 수요의 4분의 1에 달한다. 메르켈 총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제재 조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젝트를 계속 추진해왔다. 그 이유는 메르켈 총리로선 자신의 탈(脫)원전·신재생에너지 정책이 제대로 자리 잡을 때까지 안정적인 대체 에너지원으로 러시아산 천연가스를 공급받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독일 정치권은 이번 사건의 보복 조치로 ‘노르트 스트림2’ 프로젝트를 중단해 러시아를 제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애초부터 독일에선 러시아가 가스관을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면서 이 사업을 반대한다는 의견이 제기돼왔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유럽의 러시아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를 높여 안보 불안을 야기한다면서 이 사업에 대한 불만을 강력하게 제기했고, 급기야 주독 미군 일부를 철수하는 결정까지 내렸다. 결국 메르켈 총리는 러시아 정부가 이번 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에 협력하지 않을 경우 노르트 스트림2 프로젝트를 재고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민주주의 지도자 vs 전체주의 지도자

    영국 수사관들이 방호복을 입고 스크리팔 부녀가 쓰러진 곳을 조사하고 있다. [PA]

    영국 수사관들이 방호복을 입고 스크리팔 부녀가 쓰러진 곳을 조사하고 있다. [PA]

    메르켈 총리와 푸틴 대통령은 지금까지 상당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동독 출신으로 러시아어에 능통한 메르켈은 10대 시절 러시아어 경시대회에 입상해 모스크바를 여행한 적 이 있다. 푸틴 대통령은 소련 정보기관인 KGB 소속으로 1980년대 동독 드레스덴에서 근무한 적이 있어 독일어를 잘 알고 있다. 두 지도자는 그동안 상대방 언어로 깊숙한 대화를 하는 등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 왔다. 메르켈 총리의 전기를 쓴 작가 슈테판 코넬리우스는 “둘이 서로의 속마음을 잘 알고 있어 오래 산 부부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두 사람이 첫 대면한 것은 2002년 당시 독일 야당 기민당(CDU) 대표이던 메르켈 총리가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였다. 당시 메르켈 총리가 푸틴 대통령을 만나 “KGB의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농담하기도 했다. 메르켈 총리와 푸틴 대통령이 노르트 스트림2 프로젝트를 추진하자 1939년 아돌프 히틀러와 이오시프 스탈린의 ‘독·소(獨蘇)불가침 조약’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이번 사건으로 민주주의 지도자와 전체주의 지도자의 극명한 차이가 드러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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