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246

2020.07.03

진중권, “‘토착왜구’로 몰리는 보수, 진보도 감동시켜야 재건 가능“ [진중권의 직설⑤]

  •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입력2020-06-30 14:54:33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진중권. [뉴스1]

    진중권. [뉴스1]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는 조지 레이코프의 저서 ‘Your brain’s politics’의 한국어 제목이다. 물론 책 제목과 달리 나는 보수의 말에 단 한 번도 끌려본 적이 없다. 이번 총선 결과를 분석한 데이터를 보니 과거 보수당을 지지하던 이들의 상당수가 더불어민주당(민주당)에 표를 던진 것으로 나타났다. 보수의 메시지가 유권자들로부터 외면당했다는 얘기다. 한국에서는 미국과는 정반대 현상이 나타난 셈이다. ‘나는 보수인데 왜 진보의 말에 끌리는가?’ 한국 보수는 프레임 전쟁에서 패배했다. 그것도 철저히 패배했다.

    보수를 삭제하라

    중도층 외면하게 만드는 ‘보수’의 부정적 이미지 셋. 태극기 부대, 대북 전단, 기독교 반공주의 집회.(왼쪽부터) [뉴스1, 강원도민일보 제공, 뉴시스]

    중도층 외면하게 만드는 ‘보수’의 부정적 이미지 셋. 태극기 부대, 대북 전단, 기독교 반공주의 집회.(왼쪽부터) [뉴스1, 강원도민일보 제공, 뉴시스]

    중도층에게 보수 이미지는 그리 좋지 않다. ‘보수’라는 말은 태극기부대, 대북 전단, 전광훈 목사의 기독교 반공주의 집회를 연상케 한다. 이른바 ‘보수집회’에서는 여전히 40년 전에나 듣던 군가가 흘러나온다. 이번에 ‘차이나 게이트’ 음모론처럼 외국인 노동자와 중국인에 대한 차별적 인식 역시 보수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다. 전체적으로 보수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시민사회의 상식에 미달하는 혐오 기피 집단의 이미지다. 이처럼 한국 보수는 대중 의식 속에서 ‘극우’로 표상되고 있다.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당에서 ‘보수’라는 말을 쓰지 말라고 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자신을 보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말에서 긍정적 가치들을 떠올리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보수층 밖에서 그 말은 대부분 부정적 장면들을 연상케 한다. 주관적 믿음과 객관적 실태 사이에 큰 괴리가 있는 셈이다. 보수라는 말을 쓰지 말라고 했다고 당내에서 반발이 일어났다. 자신들이 새누리당 시절 이미 당 정강정책에서 ‘보수’라는 말을 삭제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모양이다. 

    2012년 총선 전 비상대책위원이던 김종인 위원장은 새누리당의 정강정책을 만들 때 ‘보수’라는 말을 딱 한 군데만 남겨놓고 다 빼버렸다고 한다. 그때도 당내 반발이 심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당시 여론조사에서는 보수 삭제에 찬성하는 여론이 절반을 넘었고, 삭제에 반대하는 여론은 15%에 불과했다고 한다. 보수를 삭제하는 대신 김 위원은 정강정책에 ‘경제민주화’를 넣었다. 작전은 주효했다. 그해 총선에서 새누리당은 152석으로 단독 과반을 확보했고, 이어 대선에서도 승리해 재집권에 성공했다. 

    이는 보수가 스스로 생각하는 이미지와 남들이 보는 이미지 사이에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유권자들은 보수주의자의 머릿속 이미지가 아니라 그들이 겉으로 보여주는 이미지를 보고 표를 던진다. 보수가 비호감이 된 것은 그동안 주로 ‘극우’로만 표상돼왔기 때문이다. 정치에서 호감·비호감의 감정은 중요하다. 인간은 논리적 판단 전에 호불호의 감정으로 사안에 대해 선(先)판단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지지를 받으려면 이미지부터 호감으로 바꿔놓을 필요가 있다.



    엄격한 아버지, 자상한 부모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는 그런 보수주의자의 긍정적인 상이 등장한다. 포레스트 검프는 똑똑한 사람이 아니다. 외려 평균보다 모자라는 인물이다. 하지만 우직하고 정의롭다. 바보처럼 국가에 충성하고, 친구를 아끼며, 가정에 충실하다. 똑똑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기본에 누구보다도 성실하다. 그런 그가 똑똑한 머리로 젠체하는 사람들보다 현명하다. 그의 삶은 진보와 보수를 넘어 누구에게나 감동을 준다. ‘포레스트 검프’에 묘사된 것은 한마디로 미국 보수주의자의 자긍심이다. 

    조지 레이코프는 미국인 의식에 새겨진 보수와 진보 이미지를 각각 ‘엄격한 아버지’와 ‘자상한 부모’로 특징짓는다. 보수의 표상인 ‘엄격한 아버지’는 험한 세상에서 가정을 보호하고, 힘든 세상에서 가족을 부양하며, 자식에게 옳고 그름을 가르치는 존재다. 진보의 표상인 ‘자상한 부모’는 성별에 중립적이고, 자녀에게 감정이입을 할 줄 알며, 자신과 타인에게 책임을 지고, 가정과 지역, 국가와 세계를 위해 헌신하는 존재다. 이 이미지들은 물론 공화당과 민주당의 정책으로 구현된다. 

    딱 한 번 한국 보수에서 이 ‘아버지상’을 구축하려 한 적이 있었다. 바로 영화 ‘국제시장’이다. 거기서 아버지로 분한 배우 황정민은 이렇게 말한다. “내는 그래 생각한다. 이 힘든 세상에 태어나가 이 힘든 세상 풍파를 우리 자식이 아니라 우리가 겪은 기 참 다행이라꼬.”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힘든 세상 풍파’ 속에서 가정을 지키고 자식들을 먹여살린 희생적인 아버지의 모습이다. 영화 마지막에 황정민은 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묻는다. “아버지, 저 잘 살았죠?” 보수는 이런 아버지여야 한다. 

    사실 이 영화는 우리 정치의 맥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한국 상황에 맞춰 번안한 것에 가깝다. 그러니 보수 실상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평론가 허지웅이 이 영화를 보고 “토 나온다”고 한 것은 그 때문이다. 반면, 당시 문재인 민주당 대표는 영화를 보고 “가족의 가치를 확인하면서 부모 세대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좋은 시간”이라고 평했다. ‘나는 진보인데 왜 보수의 말에 끌리는가?’ ‘국제시장’은 1000만 관객을 동원함으로써 이 말이 실현될 가능성을 보여줬다.

    보수의 말에 감동받다

    현실의 보수에서는 받을 수 없는 감동을 가끔 영화를 통해 받는다. 진보인 내가 보수의 말에 끌린 적이 또 한 번 있다. 영화 ‘트로이’에서 헥토르(에릭 바나 분)는 전투를 앞두고 병사들 앞에서 짧은 연설을 한다. 대사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말주변이 없어 긴 얘기는 하지 않겠다. 나는 조국에 충성하고, 가족을 수호하는 것을 의무로 생각해왔다.” 군더더기 없이 자기 인생을 이끌어온 철학만 간략히 표명하는데, 이런 우직함이 그 어떤 화려한 수사학보다 더 깊은 감동을 남겼다. 

    현실에서 나를 감동케 한 보수의 말은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행한 대국민 담화였다. 거기서 그는 상황을 솔직히 알리겠다며 이렇게 말한다. “그것이 열린 민주주의에 속합니다. 그것이 정치적 결정을 투명하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대응을 되도록 잘 근거 짓고 잘 전달하게 해줄 겁니다. 나는 이 과제의 핵심은 시민 모두가 과제를 자기 과제로 여기는 데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래서 말씀드립니다. 지금 심각합니다.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십시오.” 

    여기서 그는 이 사태에 대응하는 독일 정부의 원칙을 천명하고 있다. ‘열린 민주주의’와 정보의 ‘투명한’ 공개. 이어서 그는 정부 부처와 연구기관들이 방역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있는지 알리고, “독일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의료체제를 갖춘 나라 가운데 하나”라며 국민을 안심시킨다. 담화에서 가장 감동적이던 대목은 다음이다. “그것은 그저 통계학 속 추상적인 숫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어머니와 할머니, 그리고 아내와 남편입니다. 그것은 인간들입니다.” 

    확진자 몇 명, 격리자 몇 명, 사망률 몇 % 등 보도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통계상의 추상적 수치가 실은 내 주위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메시지다. 이런 연설은 국민에게 안정감과 신뢰감을 주고, 국민의 협조와 사회적 연대를 끌어내 사회를 하나로 통합한다. 독일 보수가 괜히 장기 집권하는 게 아니다. 한국 보수는 독일 보수당의 성공에서 배울 필요가 있다. 최근 김종인 위원장이 독일 ‘아데나워재단’과 교류협력을 모색하는 것도 아마 이와 관련 있을 것이다.

    민주적인 아버지상

    한국 보수는 ‘가족을 보호하고 가정을 부양하는 아버지’의 이미지를 잃은 지 오래다. 과거 그 아버지는 ‘박정희’로 표상됐다. 박정희가 북한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산업화로 나라를 먹여살렸기 때문이다. 보수가 박정희에 집착하는 것은 그 때문이고, 보수 일각에서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세우려 하는 것도 그것과 관련 있다. 보수의 존속을 위해 ‘아버지’상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문제는 이 두 아버지가 집에서 폭력(‘독재’)을 휘두르는 폭군이었다는 데 있다. 

    늦어도 1987년 이후 보수는 새로운 아버지상을 구축했어야 한다. 하지만 보수는 그런 노력을 하는 대신 1997년 이후 그저 박정희를 ‘리바이벌’하는 것으로 충분해했다. 외환위기 사태로 이른바 ‘고개 숙인 아버지’ 현상이 나타난 시절, 비록 폭군이었으나 그래도 집안은 먹여살리던 과거 아버지를 다시 불러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과거의 아버지가 환생해도 이제는 집안을 먹여살릴 수 없다는 데 있다. 이명박 정권의 실패가 보여주듯이 그런 시대는 오래전 지났기 때문이다. 

    그사이 보수 이미지는 ‘돈도 못 벌어오는 주제에 툭하면 너를 호적에서 파내겠다고 행패 부리는 할아버지’로 변했다. 아직도 자신들이 사회의 오버도그(over dog)라고 믿는지, 한국 보수는 여전히 툭하면 타인을 ‘종북좌파’로 몰아 배제하려 든다. 보수가 명심해야 할 것은 이제 보수는 이 사회의 언더도그(under dog)가 됐다는 사실이다. ‘빨갱이’ 낙인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누군가 나를 ‘빨갱이’라고 부르면 나는 “알아줘 고맙다”고 대답한다. 요즘은 외려 ‘토착왜구’가 사냥당하는 시절이다. 

    요즘은 민주당이 과거 보수가 걸었던 길을 걷고 있다. 이들 역시 이견자들을 비(非)국민으로 만들어 국가공동체에서 배제하려 한다. 차이를 품어 통합하는 대신, 차이를 섬멸해 사회를 등질화하려는 것이다. 이 행태에 진보적 지식인들이 등을 돌리고 있다. 이런 배타성으로는 장기적으로 중도층의 지지를 얻을 수 없다. 민주당에서 떨어져 나오는 이들은 보수가 품어야 한다. 그러려면 애먼 사람을 적으로 돌릴 게 아니라, 적까지 친구로 만드는 유연성이 필요하다. 싸움에서 적은 최소화해야 한다. 

    이제 보수는 ‘민주적인 아버지상’을 구축해야 한다.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디지털시대 나라를 먹여 살릴 능력이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버지의 역할 아닌가. 이 새로운 아버지는 과거 아버지와 달라야 한다. 이견자를 밖으로 내칠 게 아니라 안으로 품어야 한다. 노조를 적대시하는 대신 아군으로 만들고, 외국인 노동자를 배척하는 대신 우리 사회 일원으로 만들어야 한다. 좋은 아버지는 말 안 듣는 자식마저 품고, 배다른 자식이라고 밖으로 내치지 않는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