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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첼라가 ‘우드스톡의 계승자’ 되기까지 [음담악담]

음악 다큐 ‘코첼라: 사막에서의 20년’

  •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코첼라가 ‘우드스톡의 계승자’ 되기까지 [음담악담]

'코첼라 사막에서의 20년'의 한 장면. [코첼라 공식 유튜브]

코로나19 사태로 세계의 모든 공연이 멈췄다. ‘모든’이라는 말은 함부로 쓸 수 없는 단어지만 사실상 그렇다. 대형 페스티벌은 물론, 라이브 클럽의 작은 공연까지 열리지 않는다. 공연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임에 분명하다. 

멈추는 게 있으면 움직이는 것도 있는 법. 역시 모두가 온라인상에 공연 콘텐츠를 풀어놓고 있다. 그동안 유료로만 볼 수 있었거나 공개되지 않았던 영상이 동시다발적으로 업데이트되고 있다. 라디오헤드는 자신들이 했던 대형 라이브 공연 영상을 유튜브 채널에 올리기 시작했다. 8월로 연기된 스페인 프리마베라 사운드 페스티벌은 과거 공연 하이라이트를 하나 둘씩 온라인에 공개하면서 호시절을 곱씹고 있다. 올해로 50주년을 맞는 영국 글래스턴베리 페스티벌은 아예 취소를 선언했다. 짓다 만 무대를 배경으로 어느 뮤지션이 홀로 연주하는 영상이 그렇게 쓸쓸해 보일 수 없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코첼라 밸리 뮤직&아츠 페스티벌(코첼라)은 원래 4월 10~12일 열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미국이 쑥대밭이 되면서 10월로 연기됐다. 전화위복이랄까. 올해로 20주년을 맞은 코첼라의 역사를 담은 다큐멘터리가 개최 예정일이던 4월 10일 유튜브에 무료로 공개됐다. 제목은 ‘코첼라: 사막에서의 20년’.

태초에 펄잼 공연의 성공이 있었다

음악 다큐

음악 다큐 '코첼라 사막에서의 20년'의 첫장면(왼쪽). 1993년 펄 잼의 공연 현장사진. [코첼라 공식 유튜브 채널, Lance Mercer]

1993년 너바나와 함께 ‘시애틀 그런지’를 주도하며 1990년대 록의 히어로로 떠오른 펄잼은 골치 아픈 문제에 놓여 있었다. 펄잼은 미국 최대 티켓 판매회사인 티켓 마스터가 자신들의 푯값을 지나치게 비싸게 책정한다며 이 회사를 고소했는데, 티켓 마스터가 공연계 큰손이라 관련 기획사나 공연장에서 펄잼의 콘서트를 열기가 힘들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주로 얼터너티브 음악인의 공연을 기획하던 작은 기획사 골든보이스가 로스앤젤레스(LA)로부터 멀리 떨어진 캘리포니아주 인디오의 엠파이어 폴로 클럽에서 펄잼의 공연을 열었다. 장소 및 홍보의 악조건에서 티켓은 2만5000장 팔렸다. 대성공이었다. 

골든보이스는 이 일을 계기로 외진 곳에서 열리는 페스티벌을 꿈꾸게 된다. 그 외진 곳이 인디오의 사막이었다. 1980년대 영국 레이브 문화에 착안했다. 1988년 런던 언더그라운드 클럽이 전성기를 맞으면서 더 넓은 곳에서 아침까지 파티를 즐기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이 도시 밖으로 나갔다.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농장과 승마장 같은 곳에 대형 앰프와 스피커를 설치하고 디제이가 트는 음악에 맞춰 밤새 춤을 췄다. 마약인 엑스터시의 등장은 그들의 체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누군가 이런 형태의 파티를 레이브라 부르기 시작했고, 사회 문제로 불거져 대대적인 철퇴를 맞기 전까지 영국 하위문화의 한 시대를 장식했다. 골든보이스는 자신들의 페스티벌을 레이브 파티처럼 만들고 싶었다. 



첫 번째 코첼라는 1999년 10월 열렸다.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 벡, 툴을 헤드라이너로 세웠다. 동시대를 대표하되 특정 장르나 스타일에 편향되지 않은 라인업이었다. 동시대의 젊음을 상징하는 음악과 문화를 모두 포괄하겠다는 야심이 있었다. 

같은 해 열린 우드스톡 30주년 공연이 마약과 폭력으로 얼룩져 많은 비난을 샀던 것에 비하면 2만 명이 모인 첫 번째 코첼라는 역설적으로 조용히 치러졌다. “우드스톡의 진정한 계승자는 우드스톡이 아니라 코첼라가 될 것”이라는 평까지 나왔다. 코첼라는 이렇게 시작됐다. 1960년대 탄생해 1980년대, 1990년대까지 이어진 서구 청년문화를 씨앗으로 21세기 미국을 대표하는 페스티벌로 자라났다.

2006년 마돈나 등장이 변곡점 되다

2006년 코첼라에서 공연 중인 마돈나(왼쪽). 코첼라 페스티벌의 풍경. [GettyImages, 코첼라 공식 유튜브]

2006년 코첼라에서 공연 중인 마돈나(왼쪽). 코첼라 페스티벌의 풍경. [GettyImages, 코첼라 공식 유튜브]

‘코첼라: 사막에서의 20년’은 코첼라의 역사를 다룬다. 보통 페스티벌 다큐멘터리는 수박 겉핥기식으로만 보여주거나 추상적으로 접근한다. 오래된 페스티벌일수록 영상 자료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는 구체적이면서도 간결하다. 

초기부터 전속 영상팀이 있었고, 2010년대에는 페스티벌을 유튜브로 생중계하는 혁신적인 시스템을 도입할 만큼 기술과의 만남에도 적극적이었다. 따라서 자료의 양과 질 모두 풍부하다. 기획자뿐 아니라 출연자들의 인터뷰도 넉넉히 넣어 시대 흐름과 변화를 담아낸다. 전설적인 공연 영상은 물론, 해를 거듭할수록 성장하는 무대와 변화하는 라인업을 보는 것만으로도 두 시간이 훅 지나간다. 

코첼라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이미 해체된 밴드를 설득해 재결성 공연을 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헤비메탈과 얼터너티브의 교차점 역할을 한 제인스 어딕션과 너바나에게 큰 영향을 끼친 영국 밴드 픽시스의 재결성 무대에서 관객의 환호는 하늘을 찌른다.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 건스 앤 로지스, 스톤 로지스 같은 록의 전설도 코첼라에서 재결성 공연을 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처음 감정에 파도가 밀려오는 순간은 2006년 마돈나가 출연했을 때다. 마돈나는 자신의 코첼라 첫 공연을 메인 스테이지가 아닌 상대적으로 작은 댄스 스테이지에서 열었다. 운 좋게 이 공연을 본 관객이 ‘Hung Up’을 따라 부르며 흥분하는 모습은 마돈나가 왜 마돈나인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마돈나의 출연을 계기로 코첼라는 이후 비욘세, 레너드 코헨 등 최정상 팝 아티스트를 품으며 인디의 성전에서 음악의 만신전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2011년 캐나다 밴드 아케이드 파이어가 마지막 날 헤드라이너로 무대에 섰다. 공연의 절정인 ‘Wake Up’을 부를 때 무대 꼭대기에서 수백 개의 크고 하얀 풍선이 쏟아졌다. 그해 초 그래미 어워드에서 그들이 ‘올해의 앨범상’을 받았을 때 ‘듣보잡’ 취급하든 트위터 이용자들은 라이브 스트리밍으로 중계된 이 공연에 홀딱 빠졌다. 세계 최초로 온라인 생중계된 페스티벌의 대미였다. 이미 그 시점에 코첼라는 글래스턴베리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의 지명도를 갖게 됐다. 

2018년 4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그해 가을 열리는 미국 총선 투표를 독려하는 연설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특정 후보에게 끌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기권할 수는 없습니다. 이건 록 콘서트가 아닙니다. 코첼라가 아니에요.” 

뮤직 페스티벌의 대명사가 된 코첼라는 변경된 일정대로 올해 10월에 열릴 수 있을까. 다시는 ‘코로나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이 세상에서.





주간동아 1235호 (p62~64)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