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239

2020.05.15

청승의 1980년대, 솔직한 1990년대, ‘썸’ 타는 2010년대 [김작가의 음담악담]

한국 가요 속 사랑 노래 변천사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입력2020-05-13 08:3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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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유와 정기고가 부른 ’썸‘. [스타쉽엔터테인먼트]

    소유와 정기고가 부른 ’썸‘. [스타쉽엔터테인먼트]

    대중음악은 늘 사랑을 다뤄왔다. 노래방 기계에 등록된 곡을 중심으로 한국 대중음악 2만6000곡의 가사를 분석한 ‘노래의 언어’(한성우 지음)에 따르면 ‘사랑’이 가사에 등장하는 노래의 비율은 65.22%에 이른다. 사랑을 노래하면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쓰이지 않은 경우도 있으니 실제로 사랑 노래의 비율은 훨씬 높을 것이다. 

    그러나 사랑도 다 같은 사랑이 아니다. 시작되는 사랑이 있고, 진행 중인 사랑이 있으며, 끝난 사랑이 있다. 그리고 짝사랑도 있다. 그 모든 사랑을 합친다면 결국 감정이 있는, 모든 형태의 관계다. 친구나 가족과 다른 점이 있다면 늘 극적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당사자에게는. 따라서 노래 소재로 삼기 좋다. 듣는 이도 감정이입을 피할 수 없다. 인류 역사가 증명하듯 시대에 따라 연애 형태도 다른 법. 따라서 사랑 노래에는 언제나 시대가 담겨 있다.

    청승의 시대와 작별한 1990년대

    혼성 3인조 그룸 '쿨'. [쿨컴퍼니]

    혼성 3인조 그룸 '쿨'. [쿨컴퍼니]

    본격적으로 한국 대중음악에서 사랑의 비중이 높아진 건 1990년대다. ‘사회 속 나’가 아닌 ‘나로서 나’, 즉 사생활이 대중문화의 주된 테마로 등장한 시기다. 최진실, 최수종 주연의 1992년 미니시리즈 ‘질투’는 주인공의 부모가 등장하지 않는 최초 드라마였다. 사회의 최소 단위인 가족을 배재하고 20대 남녀의 이야기에만 집중한 것이다. 서태지와 아이들, 넥스트, 015B(공일오비), 듀스처럼 자기 노래를 자기가 직접 만들어 부르는 20대가 음악계의 중심이 된 그때 연인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노래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노래는 순애보, 아니면 일편단심이었다. 마이너 코드(단조) 멜로디에 애끓는 가사의 사랑 노래였다. 청승의 시대는 1990년대 들어 끝났다. 데이트의 기쁨을 음표로 그려내거나 다양한 형태의 연애를 표현했다. ‘오해’와 ‘권태’를 적극적으로 음악 세계로 초대했다. 

    쿨의 ‘애상’이 대표적이다. 이 노래는 남자와 여자의 마음을 이재훈과 유리가 한 노래에서 각각 대변하는 구조를 가진다. ‘우연히 너를 보았지 / 다른 남자 품안에 너를 /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너무 행복한 미소 / 내 사랑은 무너져 버렸어’라는 남자의 고백에 ‘그게 아냐. 변명이 아니라 그 남자는 나와 상관없어. 잠시 나 어지러워서 기댄 것뿐이야. 날 오해하지 말아줘’라는 여자의 해명이 뒤따른다. 



    그 전의 남녀 듀엣 명곡을 보자. 이정석, 조갑경의 ‘사랑의 대화’는 사랑의 한복판을 그린다. 이문세, 고은희의 ‘이별 이야기’는 그 종착점에 있다. 솔리드의 ‘천생연분’은 그 사이의 어느 지점을 그린다. 이 노래는 소개팅을 제의받은 남자가 약속 장소에 갔더니 정작 여자친구가 나와 있다는 이야기다. 비극적 결말에 이를 수 있으나 이를 오히려 사랑의 재발견으로 바라본다. 실패한 바람이 반전의 해프닝이 된다. 이른바 ‘신세대’가 주도한 1990년대 중반의 분위기가 그대로 담겨 있다.

    015B가 대변한 1990년대식 사랑

    프로젝트 그룹 015B. [페이퍼크리에이티브]

    프로젝트 그룹 015B. [페이퍼크리에이티브]

    연애하는 사람의 솔직한 심리를 보여준 것도 1990년대부터다. 이 부분의 장인은 015B였다. 메인 보컬 없이 여러 명의 객원 보컬을 기용하는, 한국 최초 프로젝트 그룹이던 그들의 노래를 언론은 종종 ‘신세대의 풍속도를 그려낸다’고 평가했다. 

    노래방이 술자리의 마침표로 자리 잡은 1990년대 초중반 누구에게나 ‘전주 스킵’의 기술을 체득하게 한 곡이 있다. 015B의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다. 권태기에 빠진 연인의 속마음을 그린 최초의 노래다. ‘저녁이 되면 의무감으로 전화를 하고 / 관심도 없는 서로의 일과를 묻곤 하지’라고 노래하는 객원 보컬 김태우는 한국 노래에서 들어본 적 없는, 짜증 섞인 나른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1990년대의 20대, 즉 신세대 풍속도의 결정판은 역시 015B의 ‘신인류의 사랑’이었다. ‘맘에 안 드는 그녀에게 계속 전화가 오고 / 내가 전화하는 그녀는 나를 피하려 하고’ ‘주위를 보면 나보다 못난 남자들이 다 예쁜 여자와 잘도 다니는데 나는 왜 이럴까’. 당시 언론에서는 신세대를 꼬집는 화두로 외모지상주의를 꼽곤 했다. 오직 얼굴만 보고 연애 상대를 정하는 풍속을 기성세대는 고까워했다. 그 근거로 삼은 노래가 ‘신인류의 사랑’이었다. 

    반면 이 노래는 015B의 노래 가운데 유일하게 가요 순위 프로그램 ‘가요톱10’에서 1위를 기록하며 신세대 심성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폰팅이 성행하고 ‘삐삐’라는 개인 통신기기의 등장으로 전체보다 개인의 삶이 중요해진 1990년대의 무의식이자 현미경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즉 2010년대 음악은 사랑을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1990년대와 요즘 연애에서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썸’의 유무다. 사귀는 것도 아니고 안 사귀는 것도 아니다. 데이트는 하지만 연인은 아니다. 그게 썸이다,

    ‘승(承)’을 중시하는 2010년대

    아이유의 'Blueming'. [유튜브화면 캡처]

    아이유의 'Blueming'. [유튜브화면 캡처]

    2010년대를 전후해 연애를 ‘감정 소모’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데이트 비용이 부담스러워 연애를 하지 않는다는 청춘도 많다. 그러니 사귀는 데 신중해진다. 사귀기 전 ‘간’을 보는 시기가 필수다. 이런 세태를 정확히 반영한 노래가 정기고와 소유의 ‘썸’이다. ‘요즘 따라 내 꺼인 듯 내 꺼 아닌 내 꺼 같은 너 (중략) 이게 무슨 사이인 건지 사실 헷갈려’라는 가사는 밀레니얼 세대의 연애에 대한 정의에 가깝다. 

    1990년대라고 이런 관계가 없었겠느냐만, 이런 관계를 음악은 슬프게 바라봤다. 피노키오의 ‘사랑과 우정 사이’가 대표적이다. 썸이란 사랑과 우정의 딱 중간 아닌가. 하지만 1990년대 신세대는 이런 애매한 관계를 힘겨워했다. 노래의 멜로디와 창법이 말해주듯, 그저 짝사랑의 영역이었다. 

    반면 2010년대 밀레니얼 세대는 썸을 하나의 관계, 즉 연애의 전 단계로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썸’의 성공으로 ‘나 오늘부터 너랑 썸을 한번 타볼 거야’라는 볼빨간사춘기의 ‘썸 탈거야’, ‘헷갈리게 하지 말아요 / 농담인지 진담인지 확실히 해주면 안 될까요’라는 슈가볼의 ‘농담 반 진담 반’ 같은 노래가 등장해 인기를 얻었다. 아이유는 ‘Blueming’에서 ‘어쩜 이 관계의 클라이맥스 / 2막으로 넘어가기엔 지금이 good timing’이라고 노래한다. 우정으로 출발해 사랑으로 넘어가기 직전 서로의 마음을 여과 없이 확인하는 단계를 즐기는 2010년대 사랑법을 정확히 그려낸다. 

    생각해보면 어느 시대에나 그랬다. 모든 연애물의 가장 설레는 순간은 사랑이 시작된 이후가 아니다. 시작되기 전이다. 고백의 전 단계다. 어떻게 남남은, 친구는 연인이 되는가. 배고프다거나 졸리다처럼 쉽게 뱉을 수 없는, 사랑한다는 그 말이 어떻게 마음에서 입을 통해 샘솟는가. 그것은 사랑에 빠지는 인연의 기승전결 가운데 ‘승’에 해당한다. 지난 시대의 노래들이 놓쳤던 사랑의 풍경에 새로운 세대의 뮤지션들이 새로운 색을 입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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