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작가의 음담악담(音談樂談)

록, 힙합과 함께 세기말을 삼분했던 일렉트로니카의 얼굴

영국 밴드 ‘프로디지’의 보컬 키스 플린트를 추모하며

  • 대중음악평론가

    noisepop@daum.net

    입력2019-03-08 17: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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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P=뉴시스]

    [AP=뉴시스]

    부고 기사를 쓰는 건 어려운 일이다. 더는 이어질 수 없는, 마침표를 찍은 문장을 다시 돌아봐야 한다. 그저 미디어와 음반으로만 접했던 음악인의 부고도 어렵지만, 더욱 황망한 건 공연을 봤거나 실제로 만나본, 동경해마지 않던 이가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면 머리가 띵해진다. 3월 4일, ‘프로디지’의 댄서 겸 보컬이던 키스 플린트가 자택에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됐다는 뉴스를 접했을 때 바로 그랬다. 

    이제 1990년대를 추억하려면 최소 20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명백한 과거가 됐다. 20세기의 마지막 10년이던 그때를 지배한 정서는 ‘세기말’이라는, 꽤 그럴싸한 단어로 대표됐다. 그저 숫자일 뿐이라는 걸 모두가 알면서도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다는 설렘과 하나의 세기가 끝난다는 광기가 양 날개로 날아다니던 시기였다. 프로디지는 나인 인치 네일스, 메릴린 맨슨과 더불어 불길함을 대변하던 밴드였다.


    일렉트로니카 대표 밴드 프로디지

    2016년 중국에서 공연 중인 프로디지.[AP=뉴시스]

    2016년 중국에서 공연 중인 프로디지.[AP=뉴시스]

    1990년 영국 에식스에서 결성된 프로디지는 당시 영국 언더그라운드를 주도하던 하우스와 브레이크 비트를 섞어 좀 더 자극적인 사운드를 들려주는 팀이었다. 동시기 다른 일렉트로닉 팀이 철저하게 DJ나 프로듀서 시스템으로 운용된 반면, 프로디지는 록 밴드의 라이브 공연을 연상케 하는 에너지 넘치는 무대로 이름을 떨쳤다. 래퍼와 댄서, MC가 무대 전면에 나섰기 때문이다. 

    음악 창작은 리엄 하울렛의 몫이었고 무대를 달구는 건 리로이 손힐, 맥심 리얼리티, 그리고 키스 플린트의 몫이었다. DJ로 활동하던 하울렛의 음악을 듣고 리로이와 함께 팀을 결성하자고 제의한 플린트는 처음에는 댄서만 맡았지만 그들의 이름을 만방에 알린 1997년 싱글 ‘Firestarter’에서 보컬을 맡으며 팀의 상징적 존재가 됐다. 

    격투게임 ‘철권’의 캐릭터인 헤이아치를 연상케 하는 헤어스타일과 아이라인은 그 위압적인 목소리와 더불어 프로디지의 음산하고 격정적인 사운드를 시각적으로 규정하는 배지나 다름없었다. 1997년과 1998년 연달아 등장한 케미컬 브라더스의 ‘Dig Your Own Hole’, 팻보이 슬림의 ‘You’ve Come A Long Way, Baby’, 그리고 프로디지의 ‘The Fat Of The Land’는 록과 힙합이 지배하던 세상을 일렉트로니카로 다시 삼분하는 걸작이었고, 그중에서도 프로디지의 작품은 가장 큰 지분을 차지했다. 



    이 앨범은 1600만 장 이상 팔렸다. 가장 많이 팔린 일렉트로니카 앨범이다. 그들의 음악은 단순한 일렉트로니카를 넘어 얼터너티브, 펑크, 인더스트리얼, 힙합 등 다양한 장르가 섞인 최대한의 자극이었다. 비슷하게 불길하고 어두웠던 나인 인치 네일스나 메릴린 맨슨이 파괴적이고 악마적인 사운드로 세기말을 상징했다면, 프로디지는 온몸으로 춤을 추게 만드는 그루브를 바탕으로 록에 거부감을 가진 대중까지 사로잡을 수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이 앨범이 있었기에 후일의 많은 흐름이 가능했다. 일렉트로니카의 후예들은 이 앨범에 자극을 받아 덥스텝, 하드코어 테크노 같은 조류를 창시했다. 댄스 클럽에 머물지 않고 라이브 클럽 무대에 서는 걸 두려워하지 않던, 또한 그럴 수 있던 그들의 공연 포맷이 없었다면 록페스티벌 무대에 일렉트로니카 뮤지션이 헤드라이너(대표 공연자)까지 맡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케미컬 브라더스와 프로디지가 1990년대 후반 유럽 록페스티벌에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을 때는 논란이 있었지만 막상 그들의 무대가 끝난 후에는 어떤 록 밴드 못지않은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말하자면 프로디지는 1990년대 후반, 록과 일렉트로니카가 만나는 교차로 같은 팀이었다. 일렉트로니카를 음습한 댄스 클럽에서 건져 올려 팝 문화의 중심에 안착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아날로그의 끝자락과 디지털의 시작점, 그 사이에 프로디지가 있었다.

    첫 내한공연 10년 뒤 들려온 부고

    2009년 영국 글래스턴베리에서 필자와 어깨동무하고 사진 촬영에 응한 키스 플린트. (왼쪽) 2009년 9월 첫 내한공연 당시 프로디지의 무대. [사진 제공 · 김작가, AP=뉴시스]

    2009년 영국 글래스턴베리에서 필자와 어깨동무하고 사진 촬영에 응한 키스 플린트. (왼쪽) 2009년 9월 첫 내한공연 당시 프로디지의 무대. [사진 제공 · 김작가, AP=뉴시스]

    홍대 앞 클럽과 TV 예능프로그램을 가리지 않고 ‘Firestarter’와 ‘Breathe’가 흐르던 1999년, 프로디지는 진작 한국 팬을 만날 뻔했다. 한국 최초의 ‘국제 록페스티벌’이던 트라이포트 록페스티벌을 통해서다. 딥 퍼플, 드림 시어터,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등 너무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세계적’ 라인업 중 하나였다. 하지만 페스티벌이 열린 그해 7월 마지막 주말은 역대급으로 비가 쏟아졌고 둘째 날 무대에 오를 예정이던 그들의 공연은 취소되고 말았다. 가장 뜨거울 때 그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도 폭우와 함께 떠내려갔다. 

    ‘The Fat Of The Land’ 이후 그들은 꽤 오랜 휴지기를 가졌고 새로 내놓은 작품도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다. 그들이 다시 음악계를 들썩거리게 한 건 2009년 일이었다. 복고적이되 여전히 공격적인 사운드로 가득 찬 다섯 번째 앨범 ‘Invaders Must Die’를 내놓고 활동을 재개한 것이다. 

    그해 여름 나는 세계 최대 페스티벌인 글래스턴베리페스티벌에 참석했다. 브루스 스프링스틴, 재결합한 블러, 닐 영이 메인 헤드라이너였고 프로디지도 세컨드 스테이지 마지막 날의 헤드라이너였다. 말이 세컨드 스테이지지, 다른 페스티벌이라면 메인에 충분히 이름을 올릴 수 있다. 그게 글래스턴베리다. 

    아무튼 마지막 날 나는 관계자의 차량을 타고 이동하는 키스 플린트와 마주쳤다. 그에게 함께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물었다. 보디가드가 당연히 제지했지만 그는 보디가드를 무시하고 기꺼이 포즈를 취했다. 간단한 대화를 나눴는데, 가을에 한국에 간다는 이야기를 해줬다. 아직 공식적인 발표가 나기 전이었다. 그때 꼭 보자고, 약속처럼 말했다. 

    그리고 9월 프로디지가 다시 한국을 찾았다. 글로벌개더링코리아의 헤드라이너였다. 날은 청명했다. 시원한 초가을이었다. 그들이 무대에 올랐다. 나도 모르게 펜스를 잡고 있었다. 늘 가장 뒤에서 전체를 조망한다는 원칙을 무시하고 있었다. 키스 플린트와 눈이라도 마주칠 거라는 기대 따위는 없었다. 스피커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 저음을 온몸으로 맞으며 나는 ‘트랜스’ 상태에 빠졌다.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사진을 찍었던 그를 얼마 지나지 않아 몇m 앞에서 바라봤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올해 3월 4일(현지시각) 그의 부고를 접했다. 향년 50세.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 세상을 떠난 지 25년 되는 해다. 1990년대 또 하나의 아이콘 역시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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