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251

2020.08.07

[진중권의 직설⑩] “윤희숙 연설이 보여준 새 보수의 희망, 설득의 힘”

  •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입력2020-08-04 17:3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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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중권 전 교수. [동아DB]

    진중권 전 교수. [동아DB]

    미래통합당 윤희숙 의원의 5분 연설이 정치권을 달구고 있다. 정치권만이 아니라 인터넷에서도 반응이 뜨겁다. 언론에서는 이를 “역대급 연설”, “레전드 연설”이라 평했다. 의회 소수인 통합당이 오랜만에 담론의 헤게모니를 쥔 것이다. 여당에서는 견제에 나섰다. 박범계, 윤준병, 김남국 의원이 차례로 저격수로 나섰지만, 이들의 공격은 외려 “메시지를 반박 못 하니 메신저를 공격한다”는 빈축만 샀다. 윤희숙 의원이 민심을 선점한 이상, 그에 대한 공격이 곧 민심에 대한 공격으로 여겨진 것이다. 이는 보수가 굳이 ‘빨갱이’ 소리 하지 않고도 대중을 설득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설득의 힘

    오늘날 ‘수사학’이라는 말은 그저 ‘문장에 겉멋을 주는 말재주’ 정도로만 여겨진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그 말은 원래 ‘말로 대중을 설득하는 기술’을 의미했다. 당시에 그리스는 민주주의 사회. 군주가 모든 일을 결정하는 전제정과 달리 민주정에서 정치인들은 제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먼저 대중을 설득해야 했다. 공적 영역만이 아니다. 당시에는 재판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소송의 당사자들이 직접 말로 배심원들을 설득해야 했다. 그래서 수사학은 정치인만이 아니라 모든 시민의 필수교양이었고, 그러다 보니 소피스트들처럼 직업적으로 이 기술을 가르치는 이들도 나타났다. 

    플라톤은 이 기술에 적대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대화편 ‘고르기아스’는 이 기술의 달인과 소크라테스의 대화가 등장한다. 논객 고르기아스가 자신의 말재주를 뽐낸다. 수술을 거부하는 환자가 있었는데, 의사도 설득하지 못한 이 환자를 자신이 말솜씨로 설득해 수술을 받게 했다는 것이다. 이에 소크라테스는 아무 진리(의학지식)도 없는 그가 도대체 남을 설득했다는 사실 자체가 위험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플라톤에게 수사학은 민주정에 내재한 중우정치, 선동정치의 위험을 상징하는 기술이었다. 대중이 진리 없는 말재주에 설득당한다면 나라가 무슨 꼴이 되겠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득의 기술에 스승보다는 호의적이었다. 사실 진리 없는 설득이 맹목적이라면. 설득력 없는 진리는 공허할 뿐이다. 그가 설득의 기술을 다룬 ‘수사학’을 쓴 것은 그 때문이리라. 거기서 그는 사람이 설득당하는 세 방식을 구별한다. 첫째, 대중은 화자의 인격에 설득당한다. 사람들은 믿을 만한 사람이 한 말은 믿어주는 경향이 있다. 이를 ‘에토스’(ethos)라 부른다. 둘째, 대중은 민심을 잘 읽은 화자의 말에 정서적으로 설득 당한다. 이를 ‘파토스’(pathos)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대중은 말 자체의 논리에 설득 당한다. 이것이 설득력의 마지막 요소, 즉 ‘로고스’(logos)다. 

    최근 민주당의 언설은 이 세 가지가 모두 무너졌다. 사실 문재인 대통령의 ‘에토스’는 대부분 그가 ‘노무현의 친구’라는 데서 나온다. 하지만 그는 노무현과는 정반대의 행보를 함으로써 그 신뢰를 스스로 까먹었다. 진정성이 없으니 ‘파토스’는 탁현민이 인위적으로 연출하는 ‘뭉클’, ‘울컥’의 신파로 전락했다. 이를 억지로 정당화하다 보니 ‘로고스’가 무너진다. ‘조만대장경’이 보여주는 조국의 내로남불, “증거인멸이 아니라 증거보전”이라는 유시민의 궤변은 이 망가진 로고스의 상징이다. 언설이 망가졌다는 것은 겉으론 위세가 대단해도 민주당이 속으로 썩어가는 것을 미리 보여주는 징조다.



    그들은 왜 보수에게 끌렸는가

    윤희숙 미래통합당 의원이 7월30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임대차법에 반대하는 5분 연설을 하고 있다. [동아db]

    윤희숙 미래통합당 의원이 7월30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임대차법에 반대하는 5분 연설을 하고 있다. [동아db]

    이번에 윤희숙 의원의 연설이 반향을 일으킨 것은, 보수의 언설도 로고스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를 저격하고 나선 민주당의 박범계 의원도 “일단 의사당에서 조리 있게 말을 하는 건 … 그쪽에선 귀한 사례니 평가한다.”고 말했다. 그 연설에 ‘빨갱이’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여당의 졸속입법에 따르는 여러 문제에 대한 논리적 지적만이 있을 뿐이다. 원래 그 지적들은 국회의 논의과정에서 나왔어야 할 것이나, 국회가 통법부로 전락하는 바람에 국민이 들을 수 없었던 말이다. 경제학자로서 그가 가진 식견이 거기서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 연설의 ‘파토스’는 임차인의 입장을 대변하는 ‘형식’을 취한 데에서 나온다. “저는 임차인입니다.” 임대인의 입장만 대변했다면, 그 연설이 반향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지금 전세 사는 이들은 부동산 3법을 반길 것이나, 그러는 그들도 행여 4년 후에 있을지도 모르는 전세값 폭등의 불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지금 당장 전세를 찾는 이들은 그보다 훨씬 더 불안할 것이다. 소유권의 행사를 제한당한 임대인들은 그들대로 불만이 많을 것이다. 그들도 국민이기에 그들 또한 대변해 줄 목소리를 원한다. 그 때문에 ‘모두’는 아니더라도 국민의 상당수가 그의 연설에 공감한 것이다. 

    문제는 ‘에토스’였다. 아니나 다를까, 민주당 박범계 의원이 그가 얼마 전까지 2주택자였다고 공격했다. 윤 의원은 지금은 1주택자로 살던 집을 전세로 내주고, 지역구에 전세를 얻었다. 지적이 나오자 윤 의원은 SNS에 올린 연설문에서는 ‘임차인’이라는 말을 ‘임차인이자 임대인’으로 바꾸었다. 만약 그가 2주택자였다면 연설 후에 아마 비난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공직을 맡기 위해 주택을 처분한 것은 사실이므로, 발언에 요구되는 최소한의 자격은 갖춘 셈이다. 민주당의 안민석 의원은 ‘잘한 것은 잘 했다’고 하자며, 윤 의원이 주택을 처분한 것을 “신선한 충격”이라 평가했다. 

    그동안 한국 보수의 메시지가 사회에 전혀 먹히지 않은 것은 발언의 자격을 못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는 보수가 발언력을 갖기 위해서는 보수의 가장 큰 덕목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재 통합당은 다주택자가 민주당보다 더 많다. 앞으로 당에서 공천을 주거나 당직을 맡길 때 이 상황을 확실히 정리함으로써 ‘이해충돌’의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통합당 의원 중에는 법안의 통과로 엄청난 시세차익을 본 이들이 많다. 거주용 주택을 제외한 나머지 주택은 처분하고, 시세차익은 사회에 환원하도록 당에서 강력히 요구해야 한다.

    주호영 의원의 경우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 [동아db]

    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 [동아db]

    통합당 주호영 대표가 이 뜨거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 전만 해도 그는 5·18 민주항쟁 기념식에 참여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세월호 유가족을 만나 진상조사에 협조할 것을 약속한 바 있다. 시민사회와 정서적으로 소통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그런데 불필요한 색깔론 공세로 그 점수를 일거에 까먹었다. 윤희숙 의원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보수의 언설을, “150년 전 칼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사상” 운운함으로써 다시 옛날 수준으로 다운그레이드 시켜 버렸다. 그 발언은 당연히 사회로부터 빈축만 사고 말았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먼저 ‘로고스’의 측면에서 보자. 현 정권이 추진하는 정책은 150년 전의 ‘칼 마르크스’나 ‘공산주의 사상’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 정책은 독일이나 프랑스처럼 사회적 시장경제를 추구하는 유럽 국가뿐이 아니라, 심지어 돈 내고 돈 먹는 자본주의의 제국 미국에서도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처럼 안기부·보안사·공안검사를 동원해 공포정치를 하던 시대는 오래 전에 지났다. 이제는 보수도 사상과 견해의 자유시장에서 경쟁을 해야 한다. 더구나 미디어 환경도 지금은 보수에 유리하지 않다. 옳은 견해를 갖고도 경쟁하기 힘든 판에 틀린 견해를 들고 경쟁을 할 수 있겠는가? 

    이어서 ‘파토스’의 측면을 보자. “부동산을 가진 자에게 고통을 주겠다는 선동이 국민들의 가슴에 증오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처럼 그는 “부동산을 가진 자”를 대변한다. “부동산과 현찰에 무슨 차이가 있냐? 수십억 현찰, 주식 가진 도지사, 여당 중진의원들이 부동산 두 채 가진 건 범죄라고 펄펄 뛴다.” 현찰·주식과 부동산의 차이를 모르는 가공할 무지는 그냥 넘어가자. 여기서 그가 목청 높여 대변하는 것은 다주택자들이다. 여기에는 임차인의 고통에 대한 인식은 없다. 그저 “부동산 두 채 가진 자”의 불만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공감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에토스’의 측면을 보자. 2014년 통과된 부동산 3법으로 강남 3구의 재건축이 추진됐을 때, 그 지역에 아파트를 소유한 의원은 모두 21명, 전원 새누리당 의원들이었다. 주호영 의원이 소유한 반포 주공 1단지도 그때 재건축이 추진됐고, 그로 인해 그는 23억 원의 시세차익을 얻었다. 그런 이가 “우리 서민들은 열심히 벌어서 내 집 한 채 장만하는 것이 평생의 목표”라고 할 때, “서민”들은 감동은커녕 외려 분노하게 된다. 결국 그 발언은 ‘다주택자의 부동산 투기를 비판하는 자들은 공산당’이라는 얘기나 다름없다. 보수가 꼭 집 부자들만의 정당이어야 하나? 

    사실 보수당의 명연설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5년 유승민 원내대표의 교섭단체 연설은 반대편 사람들의 마음까지 움직였다. 하지만 그 연설의 대가를 그는 톡톡히 치러야 했다. 그때 새누리당이 합리적 보수의 길을 걸었다면, 후에 대통령 탄핵과 같은 비극적 사태를 맞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통합당도 마찬가지의 기로에 서 있다. 윤희숙 의원의 연설이 새로운 보수 탄생의 희망을 보여주었다면, 주호영 원내대표의 발언은 그 탄생에 얼마나 많은 산고가 따를지를 보여준다. 철 지난 극우반공주의와 시장만능주의 선동으로 보수의 미래를 열어나갈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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