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간동아 로고

  • Magazine dongA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진중권, “보수는 중도층 흡수할 프레임 싸움 기술부터 익혀야” [진중권의 직설⑥]

  •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

진중권, “보수는 중도층 흡수할 프레임 싸움 기술부터 익혀야” [진중권의 직설⑥]

  • ●프레임 싸움의 기본, 진보의 특수이익을 사회 보편의 이익으로 가장하고 있음을 대중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
진중권. [뉴시스]

진중권. [뉴시스]

왜 야당은 싸움을 못 하는가? 조금씩 야성이 살아나곤 있으나 아직 국민의 답답함을 풀어줄 정도에 미치는 못한다. 왜 그럴까? 내부사정 때문에 대여투쟁에 신경 쓸 여유가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아직 야당생활에 익숙해지지 못한 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보수는 우리 사회에서 늘 오버도그(overdog·특권층)였다. 김대중·문재인 정권 때에 권력을 내줬을 때조차 보수는 여전히 사회의 다수파였다. 보수는 곧바로 권력을 회수했고, 그 덕에 계속 ‘주류의식’을 가질 수 있었다. 다시 정권을 넘겨준 지 3년이 넘었지만, 보수는 그 주류의식으로 인해 저만의 세계에 갇힌 느낌이다.

제 방에 갇힌 보수

보수는 더 이상 사회의 주류가 아니다. 그들이 주류였을 때 서울 강남의 욕망은 전 국민의 욕망이 되었고, 영남의 여론은 전 국민의 여론이 되었다. 보수는 권력과 금전을 활용해 여론의 향방을 바꿔놓을 수 있었다. 그 시절 ‘조중동’은 신문시장의 70%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때 조선일보 기자들의 모토가 생각난다. “우리가 쓰면 여론이 된다.” 논리를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그저 권력의 공작과 언론의 왜곡보도로 상대에게 ‘전라도’와 ‘빨갱이’ 딱지를 붙이는 것만으로 보수는 여론전에서 쉽게 헤게모니를 쥘 수가 있었다. 주류이기에 사용할 수 있었던 ‘오버도그’ 전략이다. 

보수의 엘리트층은 나름 ‘출세’한 삶을 살아왔기에 제 방식만이 옳다는 강한 확신을 갖고 있다. 성공한 이들에게 자기가 틀릴 수 있다는 생각만큼 낯선 것은 없을 게다. 그들에게 출세 못한 이들의 얘기는 그저 ‘루저’의 불평일 뿐이다. 그 지지층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자기들끼리 지역에서 주고받는 얘기가 곧 전국의 여론이었다. 그러니 굳이 타 지방 사람들의 생각을 알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때 한국사회의 주류였던 강남-영남의 연합은 이제 소수파로 전락했다. 강남은 서울에서 고립됐고, TK는 전국에서 고립됐다. 강남도 더 이상 보수만의 땅이 아니다. 

보수의 엘리트층은 이 상황이 아직 낯설다. 그래서 세상이 이상해졌다고만 생각한다. 지지층도 다르지 않다. 그들은 아직도 자기들을 주류로 착각해 입에 ‘전라도’와 ‘빨갱이’를 달고 산다. 소수를 배제하는 다수파 전략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다 망해가는 북한 대신에 무섭게 부상하는 중국에 대한 공포(‘차이나 게이트’)를 강조한다는 것뿐이다. 한 마디로 엘리트든 지지층이든 보수는 자기 세계에 갇혀 바깥세계 사람들과 소통할 능력을 잃어버렸다. 상대에 아무 타격도 주지 못하는 그들만의 아우성에서는 갈 길을 잃은 보수의 좌절감과 열패감만이 느껴질 뿐이다. 

당에서 손을 놓은 사이 보수의 여론을 주도한 것은 유튜버들. 이들은 그러잖아도 저만의 세계에 갇힌 보수층을 더 좁은 음모론의 방에 가두어버렸다. 그들이 주장하는 ‘개표조작음모론’은 중도층은커녕 온건 보수층도 동의하기 어려운 주장이다. 그런데 미래통합당은 이 음모론을 공식적으로 추인하거나 묵인했다. 강경 지지층을 좁은 방에서 구하기는커녕 그들을 따라 방안으로 들어가 스스로 유폐된 것이다. 매일 자기들끼리 같은 얘기만 하니 그들에게는 그게 세계의 전부로 보일 게다. 하지만 외부자의 눈에는 그 좁은 방에 모여 있는 이들이 신흥종교집단으로 보일 뿐이다.



어떻게 싸울 것인가

곽상도 미래통합당 의원(왼쪽)과 문재인 대통령 아들 준용씨. [뉴시스]

곽상도 미래통합당 의원(왼쪽)과 문재인 대통령 아들 준용씨. [뉴시스]

어떻게 싸울 것인가? 일단 보수의 메시지를 보수층만이 아니라 중도층에게도 수용될 만한 형태로 고쳐 쓸 필요가 있다. 그러려면 논리와 상식, 그리고 공정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정권에 대한 비판이 제3자의 눈에 ‘보편이익에 기초한 객관적으로 옳은 메시지’로 보일 수 있다. 비판의 목적은 상대를 무조건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다. 비판은 상대가 보편성과 객관성에서 벗어났다고 지적함으로써 그들이 다시 올바른 길로 되돌아오게 도와주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이 원칙을 지키며 철저히 사실에 기초해야 비판이 비로소 많은 이들에게 먹힐 수 있는 것이다. 

얼마 전 곽상도 미래통합당 의원이 대통령 아들의 아파트 문제를 건드렸다. 원래 비판의 요지는 정부 부동산대책의 실패를 지적하는 것이었다. ‘대출을 금지하는 정책이 그때에도 있었다면, 문준용 씨도 아파트를 살 수가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멈추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잖아도 집값이 내린다는 정부의 말만 믿고 집 사기를 미루었던 이들의 불만이 높은 상태였다. 어차피 투기하는 이들은 현금이 풍부해서 돈을 빌리지 않아도 얼마든지 집을 살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대출을 막으면 서민의 주택마련만 어렵게 할 뿐이다. 이런 비판은 비록 보수의 것이지만 꽤 설득력이 있다. 

그런데 그는 선을 넘었다. 문준용 씨가 아파트를 팔아 6년 만에 2억 원의 시세차익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서울의 웬만한 아파트는 지난 6년 사이에 2억 정도는 다 올랐다. 하지만 누구도 그걸 ‘투기’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대통령을 흠집 내려다가 괜히 아파트 가진 이들만 적으로 돌려버린 셈이다. 게다가 문준용씨는 문제의 아파트에 실거주했다. 비판을 하며 사실 확인도 안 한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 곽상도 의원의 아파트가 지난 5년 사이에 최소 6억~7억, 최대 10억까지 올랐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니 여당에게 바로 카운터펀치를 맞을 수밖에. 원칙을 벗어난 비판은 이렇게 역공을 부른다. 

그의 비판은 괜히 사람들에게 ‘보수는 믿을 수 없으며 알고 보면 더 썩었다’는 인상만 심어주었다. 비판이 먹히려면 사회보편의 이익 위에서 객관적 판단을 내려야 한다. 선동에 선동으로 맞서면 안 된다. 586세대는 정세분석, 전략전술, 선전선동을 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다. 보수의 막강한 권력에 맞서려면 대중을 설득하여 조직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것이 사회보편의 이익에 부합했다. 그런데 그것을 그들은 지금 제 기득권을 지키는 데에 사용하고 있다. 이 선동의 귀재들에게 선동으로 맞서야 승산이 없다. 선동을 이기는 것은 오직 원칙과 사실에 입각한 올바른 비판뿐이다.

프레이밍의 전략

보수는 종종 엉뚱한 데에 전선을 친다. 전선으로 상대를 고립시키는 게 아니라 외려 자신을 유폐시킨다. 코로나 국면에서 보수는 중국봉쇄를 주문하고, 차이나 게이트 음모론을 제기하고, 대선개표조작설에 편승했다. 저만의 세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오직 자기들끼리만 통하고 밖에서는 통하지 않을 얘기를 해 봐야 상대에게 아무 위협도 되지 않는다. 그저 ‘자기들끼리 모여 심령대부흥회를 하나 보다’ 하고 웃어넘길 뿐이다. 전선을 치려면, 중도층은 물론이고 민주당 지지자의 일부까지도 포용할 수 있도록 넓게 쳐야 한다. 그러려면 비판의 방식부터 바꾸어야 한다. 

민주당의 입장에 강경보수의 입장으로 맞서면 진영싸움만 벌어진다. 비판을 소모적 싸움으로 만들지 않으려면, 그 방식이 ‘내재적’이어야 한다. 즉 입장을 바꾸어 상대의 처지에 선 후 그래도 말이 안 되는 부분을 지적해야 한다. 가령 민주당은 검찰개혁을 약속했다. 거기에 맞서 다짜고짜 ‘개혁반대’를 외치면 여론전에서 중도층을 놓친다. 그때는 검찰개혁에 찬성하는 입장에 서서 지금 민주당이 애초에 내세운 개혁의 취지를 완전히 배반했다는 점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그들의 선한 의지만 믿고 그들을 지지했던 이들을 민주당에서 떨어뜨려 낼 수가 있다. 

바둑의 천재는 이세돌도 아니고 커제도 아니다. 바둑의 천재는 바둑판을 발명한 사람이다. 모든 기사들은 어차피 그가 발명한 그 판 위에서 놀 수밖에 없다. 그 판을 정치에서는 ‘프레임’이라 부른다. 민주당은 프레임을 까는 데에 능하다. 그들은 매번 그릇된 프레임을 선점해 그것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긴다. 그들이 깐 프레임 안으로 들어가면 게임은 이미 진 것이다. 프레임에는 프레임으로 맞서야 한다. 그들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에 ‘올바른’ 프레임을 깔아서 그들이 자기들의 특수이익을 사회 보편의 이익으로 가장하고 있음을 대중에게 드러내 보여줘야 한다.





주간동아 1247호 (p5~7)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