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216

2019.11.29

황승경의 ON THE STAGE

1930년대 경성 문인들의 애달픈 감성이야기

뮤지컬 ‘팬레터’

  • 공연칼럼니스트·공연예술학 박사

    lunapiena7@naver.com

    입력2019-11-29 15: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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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제공 · ㈜라이브]

    [사진 제공 · ㈜라이브]

    요즘은 소셜미디어나 온라인 방송을 통해 유명인 혹은 연예인과 팬 사이의 직접 소통이 가능하다. 하지만 예전에는 팬이 먼발치에서나마 이들을 보려면 콘서트장이나 팬 사인회에 참석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팬이 자신의 우상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방법은 팬레터뿐이었다. 수줍음이 많거나 본인이 노출되는 것을 꺼리던 일부 팬은 가명으로 팬레터를 보내곤 했다. 그러다 보니 팬의 성별이나 연령대를 잘못 판단하는 일도 적잖았다. 

    당대 최고 문인들의 일화를 바탕으로 그들의 예술과 사랑을 그린 창작뮤지컬 ‘팬레터’도 이러한 해프닝을 다룬다. 배경은 1930년대 경성. 소설가 김해진(김재범·김종구·김경수·이규형 분)을 동경하는 정세훈(이용규·백형훈·문성일·윤소호 분)은 그에게 일본어 가명 ‘히카루’(빛이라는 뜻)로 팬레터를 보낸다. 

    세훈은 일본에서 유학하는 학생으로 조선의 손꼽히는 재산가인 경성상회의 장남이다. 어느 날 세훈은 해진의 소설을 밟는 친구를 구타해 퇴학당하고 조선으로 돌아온다. 아버지의 호된 꾸지람에 그는 가출을 감행한다. 그리고 신분을 숨긴 채 문인들 모임인 ‘칠인회’(구인회가 모델)가 머무르는 ‘명일일보’의 사환으로 취직한다. 그곳에서 세훈은 칠인회의 새 회원으로 들어온 해진과 운명적으로 만난다. 세훈이 히카루인 줄은 꿈에도 모르는 해진은 자신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는 뮤즈 히카루(소정화·김히어라·김수연 분)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한다. 해진이 자신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세훈은 경악하지만 해진을 실망시킬 수 없어 그와의 숨바꼭질을 시작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훈의 거짓말은 눈덩이처럼 커진다. 해진이 히카루의 글을 출판한 뒤 급기야 문단의 주목까지 받게 되자 세훈은 겁에 질린다. 칠인회 멤버 중 하나인 이윤(박정표·정민·김지휘 분)은 히카루의 존재와 성별에 의심을 품고 그의 정체를 밝히려 한다. 

    나라를 잃은 일제강점기에 문인들이 순수문학에만 매진하는 모습을 한심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뮤지컬 속 가난한 문인들은 인간의 순수한 근원을 탐구하는 문학이야말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는 정의라 굳게 믿는다. 극 중 소설가 ‘김해진’은 ‘김유정’을, 소설가 ‘이윤’은 ‘이상’을, 시인 ‘김수남’은 ‘김기림’을 모티프로 했으며, 소설가 이태준과 문학평론가 김환태는 실명으로 등장한다. 뮤지컬 ‘팬레터’는 김유정의 소설 ‘생의 반려’와 이상의 시 ‘건축무한육면각체’, 김기림의 시 ‘세계의 아침’의 일부 구절을 인용해 가사와 대사의 문학적 깊이가 농밀하다.



    한 시대를 풍미했지만 불우한 시대를 살아야 했던 우리 순수문학인들의 치열한 예술혼이 인상 깊다. 작품성과 대중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웰 메이드 뮤지컬 ‘팬레터’는 관객을 1930년대 모던 판타지로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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