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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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여행이 선물한 새로운 인생”

3개월 시한부에서 17년째 건강, 82세 현역 작가 전규태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5-08-24 15: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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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과 여행이 선물한 새로운 인생”
    ‘기존의 방식이 나에게 죽음을 선고했으므로 살기 위해 새로운 방식을 찾기로 마음먹었다.’

    전규태(82·사진) 씨가 최근 펴낸 에세이집 ‘단테처럼 여행하기’의 한 부분이다. 전씨는 1998년 췌장암 진단을 받았다. 통증을 느끼고 병원을 찾았을 때는 이미 암이 비장과 대장까지 퍼진 상태였다. 개복수술을 집도한 주치의는 딸들에게 “3개월 이상 살기 힘들다. 아버지 보내드릴 준비를 하라”고 일렀다. 그러나 그는 주저앉아 죽음을 맞고 싶지 않았다. 전씨가 살기 위해 찾은 ‘새로운 방식’은 여행이었다. 비행기를 탈 수 있을 만큼 몸을 추스른 후 그는 바로 길을 나섰다. 그리고 어느새 17년째, 전씨는 여전히 살아 있다.

    심지어 꽤 건강한 상태다. 최근 정기검진차 병원을 찾았더니 담당의가 “선생님 연세에 고지혈증, 당뇨, 고혈압 없는 분 뵙는 게 쉽지 않은데, 모든 수치가 다 좋다. 참 잘 관리하셨다”고 했다고 한다. 그는 그저 빙그레 웃고 말았다.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의 문턱에 이른 것도, 건강을 되찾은 것도 모두 불가항력에 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교수, 작가, 여행가

    어쩌면 일제강점기 조선 땅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것, 중학교 동기생의 80%가 유명을 달리한 6·25전쟁통에 폭탄 파편을 맞고도 살아남은 것, 기자를 하다 대학교수가 되고 신춘문예에 당선해 문인이 됐으며, 세계 각국 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고, 고등학교 작문 교과서부터 여행 에세이까지 100권이 넘는 책을 펴낸 것도 다 그의 힘으로 이뤄진 게 아닐지 모른다. 그렇게 인생은 전씨를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이끌어왔고, 여전히 어딘가로 데려가고 있다.



    이쯤에서 전씨를 소개하자. 그의 초등학교 동급생이자 동아일보,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 동료 작가이면서, 신문사 논설위원을 지낸 언론인이기도 했던 고(故) 권일송 씨는 전씨에 대한 시 ‘한뫼(전씨의 호)의 종합분석’에 이렇게 썼다.

    ‘복도 많아 교수에, 평론가에, 박사 나으리/ 호떡집에 불난 듯이 지구촌을 누비고/ 카메라, 그림 솜씨에도 뛰어나 아름다운 이방 처녀들을 설레게 하기도 하는 미남/ 특히 탁월한 건 여성 관리/ 그것만은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노하우’/ 꽃밭에 나비 부르듯 예쁜이 틈에서 늘 행복해 뵈는 그는/ 탱고도 권일송 다음 가는 명수이고/ 노래는 영원의 맞수다.’

    전씨는 이런 사람이다.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그는 통신사 경제부 기자로 일하다 학계로 들어가 한양대, 연세대, 전주대 교수를 지냈다. 6·25전쟁 당시 통역병으로 복무하며 영어 실력을 쌓은 덕에 외국 대학에 한국 관련 학과가 생길 때마다 1순위로 초청을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컬럼비아대, 호주 시드니대 등에서 교환교수를 지냈고, 호주 국립대에서 5년간 정교수로 한국학을 가르쳤다.

    그러면서 틈틈이 세계 100여 개국을 주유했다. 고산병으로 피를 쏟아가며 고대 유적을 누볐고, ‘마지막 원시인’의 발자취를 찾아 오지를 두루 살피도 했다. 그 과정에서 당시 한국에 생소하던 마야문명, 아마존 생태 등을 소개하는 각종 책을 펴내 ‘여행가’라는 직함까지 얻었다. 전씨는 “1960~70년대만 해도 영어를 제법 하는 국문과 교수를 찾기 힘들었다. 그 덕에 내게 많은 기회가 왔다”고 회고했다.

    문인으로서도 현대시인상, 문학평론가협회상, 모더니즘문학상 등을 받았고 1988년 문예지 ‘문학과 의식’을 창간해 발행인 겸 편집인에 취임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98년 대학 퇴임을 앞두고 기념문집을 발간했을 때 시인 강은교, 소설가 최인호, 교수 마광수 등 200여 명이 글을 실었으니, 학자로서 작가로서 전씨의 삶은 충분히 눈부셨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바로 그 시절, 그는 인생의 가장 깊은 구렁텅이를 지나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미안하다’는 쪽지를 남긴 채 집을 나가버린 것. 알고 보니 지인의 사업을 돕다 전씨 이름으로 거액의 부채를 진 상태였다. 채권자들이 들이닥쳤고, 그는 졸지에 거리에 나앉는 신세가 됐다. 월급이 압류되고 정년퇴임식도 하지 못한 채 수십 년 몸담은 교단을 떠나야 했다. 가정은 깨졌고, 잇단 충격에 매일 폭음하던 그는 암선고까지 받았다. 이 모든 일이 채 1년도 되지 않는 사이에 벌어졌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암수술 후 병원 문을 나서는데 주치의가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출가하는 마음으로 지내시라’고 하더군요. 특히 스트레스를 피해야 한다면서 ‘되도록 멀리 떠나 지내고, 글은 쓰지 마시라’고 해요. 평생 글과 함께 살아왔는데 어쩌란 말이냐고 물으니 ‘글 쓰는 붓 대신 화필을 들어보면 어떻겠느냐’고 조언하더라고요.”

    도망자의 삶을 끝내다

    ‘문인이 붓을 들면 스트레스가 되지만, 화가가 아닌 사람이 그림을 그리는 건 스트레스 해소가 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이 그에겐 삶의 밧줄이 됐다. 그는 평생 부어온 연금을 찾은 뒤 화구통 하나 짊어지고 비행기에 올랐다. 말이 여행이지 실은 도망이었다. 그 끝이 객사가 될지라도 한국에는 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그의 등을 떼밀었다.

    그렇게 시작한 여행이 10년 넘게 이어졌다. 두 발로 캔버라, 시드니, 파리, 베를린, 본, 뮌헨, 함부르크, 암스테르담, 프라하, 부다페스트 등 세계 각지를 밟아나가는 사이 상처는 하나둘 사라졌고, 그 대신 그림이 쌓였다. 그렇게 마음이 몸을 이기고, 삶이 죽음을 멈춰 세웠다.

    2009년 그가 한국에 돌아왔을 때 ‘죽은 줄 알았던 친구’를 다시 만난 시인들은 ‘월간지 ‘시조’에 ‘기적은 있다-신념과 의지의 화신’라는 제목의 특집 기사를 실었다.

    ‘(전략) 그는 10여 년 전 건강과 명예, 부(富)를 일시에 잃고 우리 곁을 떠났다. 그가 노숙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들리기도 했고,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풍문이 돌기도 했으며 누군가와 잠적했다는 염문 섞인 얘기도 들렸다. 당시 교착 상태에 있었던 북·일 외교관계를 풀기 위해 일본 관계 전문가인 전 교수를 납치했다는 등 황당한 이야기가 들리기도 하는 가운데 ‘전규태’라는 이름이 사람들의 뇌리에서 서서히 잊혀갈 무렵 불쑥 이렇게 우리 앞에 기적처럼 나타났다.(후략)’

    물론 돌아온 전씨가 다시 과거 영광을 되찾은 건 아니다. 그는 지금 워크아웃 상태로, 경기도 한 임대아파트에서 홀로 산다. 6·25전쟁 참전 공로로 받는 국가유공자 수당과 노인연금으로 생계를 이어가면서, 매달 9만 원씩 과거 빚을 갚아나가는 상태다. 하지만 여행과 그림이 준 평화가 그를 가득 채우고 있다. 이제 더는 ‘도망자’가 아닌 것이다. 다시 찾은 고국에서 그는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

    전씨는 “홀로 긴 여행에 나서본 적이 있다면, 잃어버린 사랑을 그리워해본 적이 있다면, 스스로를 사랑해본 적이 있다면, 존재하는 것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껴본 적이 있다면, 선홍빛으로 피어난 꽃 앞에 넋 놓고 서 있어 본 적이 있다면 그 순간 꼭 짚어 설명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그 사람에게는 이미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 ‘무엇’이 전씨에게 선물한 건 ‘새로운 삶’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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