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94

2015.06.29

바이런과 셸리를 위한 진혼곡

마이클 윈터보텀 감독의 ‘트립 투 이탈리아’

  • 한창호 영화평론가 hans427@daum.net

    입력2015-06-29 13: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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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런과 셸리를 위한 진혼곡
    사람들이 이탈리아를 여행할 때 무엇을 꿈꿀까. 영화 ‘트립 투 이탈리아’의 주인공들에 따르면 ‘아름다운 경치, 와인, 음식, 그리고 여인(사랑)’이다. 코미디 배우인 두 남자 스티브(스티브 쿠건 분)와 롭(롭 브라이든 분)은 영국 일요판 신문 ‘옵서버’의 제안에 따라 엿새간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참이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이탈리아 북부의 ‘그림 같은’ 풍경을 보여준다. 길은 한적하고, 산은 야트막하며, 골짜기마다 포도나무들이 줄 지어 자라고 있다. 이제 아름다운 여성을 만나, 음식을 먹으며, 사랑을 경험하면 여행 목적이 달성될 것 같다. ‘로마의 휴일’(1953)부터 최근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2010)까지 수많은 영화가 써먹은 이탈리아 배경의 로맨틱 코미디가 떠오를 만하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롭은 요트를 모는 영국인 여성 선원을 만나 짧은 사랑을 나누기도 한다. 그런데 두 남자가 이탈리아에서 하필 항구도시 제노바 인근으로 향하는 이유가 조금씩 드러나면서 이들의 ‘이탈리아 기행’은 사뭇 다른 모습을 띠기 시작한다. 깊고 푸른 바다가 출렁이고, 흰 배는 그 위를 미끄러지듯 천천히 지나가는데, 배경음악으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네 개의 마지막 노래’ 가운데 ‘붉은 저녁’이 흐르는 것이다. 이 곡은 네 개의 노래가 모두 슬프지만, ‘붉은 저녁’은 그중에서도 특히 비장한 느낌이 강해 종종 진혼곡으로도 쓰인다. 그래서인지 요트 여행이 마치 ‘장례행렬(Funeral March)’처럼 보일 정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주인공은 지금 이탈리아 바다 위에서 사고로 죽은 영국 낭만주의 시인 퍼시 비시 셸리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붉은 저녁’을 부르는 소프라노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의 맑고 높은 목소리는 누군가를 멀리 보내는, 곧 장송(葬送)의 예를 갖추는 느낌마저 전달한다. 그러고 보니 왜 이들이 도입부에서 또 다른 낭만주의 영웅 존 바이런을 인용하고, 자신들의 여행이 바이런의 여행처럼 ‘다른 문명’을 찾아가는 ‘순례’가 될 것임을 암시했는지도 짐작된다.

    바이런과 셸리, 이 낭만주의의 두 영웅은 모두 당대 영국 제도와 화합하지 못하고 ‘다른 삶’을 꿈꾸며 자발적으로 망명한 인물이다. 그들은 영국 교회를, 왕실을, 곧 전통과 권위를 비판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종국에는 이탈리아에서 삶의 마지막을 거의 보냈다. 바이런은 제노바에서 이탈리아 생활을 마치고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전했다 36세에 죽고, 친구였던 셸리는 바이런의 집 근처 바다에서 요트 사고로 29세에 죽는다. 요절이었지만, 누구보다도 긴 생명을 가진 두 시인의 삶을 영국 중견 감독 마이클 윈터보텀은 기행영화를 통해 소환하고 있는 것이다.



    바이런과 셸리를 위한 진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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