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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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소녀를 망상증으로 몰았나

‘수학천재’ 사건으로 본 병리현상…성공과 결과만 칭찬하는 우리 사회 공동책임

  • 손석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학박사

    입력2015-06-22 10: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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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소녀를 망상증으로 몰았나

    알랭 드롱 주연의 영화 ‘태양은 가득히’ 포스터.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공포가 최악으로 치닫던 6월 초 국민을 당혹게 하는 또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일명 ‘수학천재’ 김모(18) 양 사건. 김양은 미국 동·서부를 대표하는 양대 명문인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에 동시 합격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뒤늦게 합격증을 위조한 것으로 밝혀져 전 국민을 실의에 빠뜨렸다. 국가적으론 메르스에 이어 망신살이 겹으로 뻗쳤다. 사람들은 나이 어린 학생의 대담함에 놀랐고, “우리 아이가 많이 아프다”라는 아빠의 말에 안타까워했다.

    소용돌이는 지나갔지만 국민의 의문은 쉬 풀리지 않는다. 아니, 계속 궁금증이 생겼다. 김양은 왜 그런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정신건강의학적 관점에서 그의 거짓말을 분석해보면, 김양은 아빠의 말처럼 실제 많이 아픈 듯하다.

    부모에게 야단맞을까 두려워 시험 성적표를 위조하는 학생들이 있다. 이들 대부분이 처음에는 단순히 야단맞는 것을 피하고자 거짓말을 시작한다. 하지만 거짓말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어느새 평범했던 학생이 우등생으로 변모해 있다. 부모는 자녀의 진실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자랑스럽게 여기다 나중에 사실을 알고 난 후 엄청나게 실망한다. 부모와 자녀의 갈등이 증폭된다.

    이런 성적 위조 유형은 특히 유학생에게서 자주 나타난다.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부모를 속이기 더 쉬운 환경이기 때문이다. 김양의 경우는 어릴 적 미국으로 건너가 우수한 성적을 받은 학생이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토머스제퍼슨과학고에 입학한 것으로도 이미 그의 우수성이 입증된 셈이다. 하지만 명문고와 명문대에 진학하는 것은 우수한 인재로 자라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과대망상을 내용으로 한 공상 허언증



    아마 김양은 자신의 천재성을 과시하려고 거짓말을 시작했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우리가 자녀에게 성적이나 결과만 강조해온 것은 아닐까. 우리나라 학부모 특유의 높은 교육열이 자녀에게 1등 혹은 천재를 강요하지는 않았을까. 미국으로 건너간 김양은 처음부터 수학과 과학을 잘했기에 아마 주변에서 ‘똑똑하다’ 내지는 ‘천재소녀’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특히 부모 기대는 남달랐을 터다. 하지만 그것이 결국 독으로 작용했다. 이로 인해 스스로 ‘나는 지금 천재다. 그리고 앞으로도 천재여야 한다’는 자기 최면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혹은 교사의 학생에 대한 칭찬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특성 칭찬’이고, 다른 하나는 ‘노력 칭찬’이다. 특성 칭찬이란 “너는 똑똑하다” “너는 천재다” “머리가 뛰어나다” “늘 100점만 받는구나” 등의 말로, ‘결과 칭찬’이라고도 한다. 반면 노력 칭찬은 “열심히 공부했구나” “최선을 다해서 훌륭하다”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성실하게 잘했다” 등의 말을 들려주는 것으로 ‘과정 칭찬’이라고도 한다.

    김양에게 부모와 교사가 특성 또는 결과 칭찬을 많이 했고, 그는 어느새 자신이 똑똑해 보이는 상황을 유지하기 위한 심리적 전략을 구상해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점차 공부가 어려워지고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는 한계를 인식하면서 마음이 불안해지는 데다, 혹시 내가 더는 천재로 보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 이러한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거짓말’이었을 수 있다. 성적표를 위조하고 합격증도 위조하며, 어쨌든 위조 과정을 더 완벽하게 만들고자 유명 교수들과 그럴 듯한 e메일 교신 내용까지 조작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쯤 되면 단순한 거짓말을 넘어 ‘망상적 체계(Delusional System)’를 구축했을 개연성이 높다. 정신건강의학에서 망상이란 사실이 아닌 내용을 자신은 사실이라고 굳게 믿는 병적 증상을 뜻한다. 처음엔 단순한 거짓말로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자신의 거짓말을 스스로 믿으며 허구의 정신세계에 빠져드는 것을 ‘공상 허언증(Pseudologia Fantastica)’이라고도 한다. 즉 김양은 과대망상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공상 허언증을 앓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누가 소녀를 망상증으로 몰았나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 씨’를 원작으로 국내에선 ‘미스 리플리’라는 드라마가 제작됐다.

    공상 허언증은 과거 신정아 씨 사건으로 세간에 많이 알려진 용어다. 신씨 역시 자신이 미국 유명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사실이 아님이 밝혀지면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그뿐 아니라 많은 사회적 공인 혹은 유명 연예인이 학력 위조 의혹에 연루돼 사회적 파장이 컸다. 거짓말임을 알면서도 허위 학력으로 사람들을 속이는 건 그냥 거짓말일 뿐이지만, 자신도 사실인 양 믿는 수준까지 발전하면 병적 망상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일반인 가운데서도 이런 망상 증상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유명 대학 학생이라면서 입학 오리엔테이션과 환영회 등에 참여하고, 학교 교정에도 나타나는 이른바 가짜 대학생 중 일부다. 이들은 가족에게까지 자신이 대학에 다닌다며 등록금을 받고, 학생증이나 성적표를 위조해 진짜 대학생인 양 행세한다. 이와 같이 자신의 신분을 가짜로 만들어 진짜인 양 행세하는 것을 ‘리플리 증후군’이라고 한다.

    리플리 증후군은 미국 출신 여류 작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재능 있는 리플리 씨’에서 유래했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알랭 드롱 주연의 ‘태양은 가득히’라는 영화가 나왔고, 국내에선 ‘미스 리플리’라는 드라마도 제작됐다. 지역 사회에서도 가짜 동향, 동창, 직업 등으로 사람들에게 접근해 사기극을 벌이고, 금전적 이득을 취하는 수많은 리플리가 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이 거짓말을 한다고 스스로 인지하고 있기에 망상장애 환자로 보지 않고, 오히려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진 사람으로 볼 수 있다.

    누가 그들을 아프게 하는가

    최근에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도 거짓 인생을 사는 사람이 종종 나타난다. 심지어 SNS에서 다른 사람의 인생을 도용해 그 사람인 것처럼 행세하기도 한다. 유명 연예인을 사칭하거나, 질투와 부러움의 대상인 사람이 마치 자신인 것처럼 SNS에서 내비치며 타인으로부터 관심과 주목을 받으려 한다.

    실제로 대학 입학을 앞둔 한 고교생이 SNS로 알게 된 재수생의 악행으로 입학이 취소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SNS를 통해 접한 타인의 아름다운 몸매와 예쁜 얼굴을 마치 자신의 모습인 양 도용하고, 이를 사칭해 활발하게 SNS 활동을 하며 가짜 인생을 산 여고생까지 등장했다.

    과대망상, 공상 허언증, 리플리 증후군 같은 정신 병리를 보이는 사람들이 가진 공통점이 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들로부터 지속적인 관심을 얻으려 한다는 것.

    물론, 거짓말을 통해 사람들의 관심을 극대화하려는 행동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언론을 포함한 우리 사회 전체가 자신들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 평범한 학생의 성실한 노력보다 뛰어난 천재에게만 지나친 관심을 보인 것은 아닌지, 또한 사회 곳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다수보다 유명 연예인, 부자, 사회적 성공을 이룬 사람, 예쁘고 화려한 극소수 사람만 편애하지는 않았는지 하는 것들이다.

    자신보다 특별한 사람에게 관심이 가는 것은 인지상정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이면에서 ‘못 올라갈 나무’를 꿈꾸며 거짓말을 하고, 급기야 병리적 증상을 보이는 사람도 적잖다는 점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그들을 아프게 한 근본적 책임이 ‘천재’와 ‘성공’만 칭찬하고 관심을 갖는 우리 문화에 있음에도 그에 대한 반성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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