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91

2015.06.08

오산 미군기지 탄저균 발송 파문

한반도 세균전 대비 美 주피터 프로그램…한국 측 동의 없이 “대량살상무기 확산 해당” 비판도

  • 황일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15-06-08 09: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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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하순 충격적인 뉴스가 미국 주요 언론을 타고 국내에 타전됐다. 미국 유타 주에 있는 미 국방부 산하 병기시험장 더그웨이 연구소에서 살아 있는 탄저균을 산하 실험실들에 보냈고, 거기에 경기 평택에 자리한 주한미군 오산공군기지가 포함돼 있었다는 것. 치사율 80%라는 엄청난 살상력으로 생물학 테러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한 탄저균이 활성화된 상태로, 그것도 민간배송업체 페덱스(Fedex)의 수송망을 통해 한국에 반입됐다는 사실은 삽시간에 뜨거운 이슈로 떠올랐다.

    민감한 사안인 만큼 미국에서도 엄청난 후폭풍이 이어지는 상황. 미 하원 국토안보위원회 소속 피터 킹 의원 등 중진 정치인이 나서서 “미국 전역과 한국에까지 탄저균을 발송한 것은 믿을 수 없는 실수”라고 질타를 거듭했고, 당초 한국뿐인 것으로 알려졌던 해외 발송지 역시 호주와 캐나다로 늘었다. 5월 30일 애슈턴 카터 미 국방부 장관이 한민구 국방부 장관에게 공식사과와 재발 방지를 약속했지만, 꼼꼼히 들여다볼수록 파장은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가장 위험하고도 혁신적인 실험’

    의회 보고자료 등 미국 측 공식문서를 종합하면, 이번 탄저균 발송은 미 육군이 2011년 공식 입안한 주피터(JUPITR)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진행된 일이다. 주피터는 ‘주한미군 합동정보포털 및 위협인식 통합(Joint USFK Portal and Integrated Threat Recognition)’이란 공식명칭의 약자. 미 국방부 생화학방어합동관리국(JPEO-CBD)과 미 육군 소속 에지우드 생화학센터가 공동주체로 두 기관 모두 전 세계 미군의 생화학전 대비를 총괄하는 핵심 조직이다.

    4개년 프로젝트로 시작된 주피터 프로그램의 목적은 ‘한반도에서 벌어질 수 있는 세균전 등 위기 상황에 대해 이전보다 강력한 감시체계를 구축하고 탐지 능력을 확보하는 것’이라고 미 의회 보고자료는 적시하고 있다. 주요 대상은 물론 엄청난 양의 생화학 병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북한. 미사일 발사를 조기에 탐지하기 위해 최전방에 고성능 레이더를 배치하는 것과 같은 개념으로, 생화학 병기가 사용됐는지 여부를 주한미군 기지에서 확인해 조기경보를 발령할 수 있는 최전방 감시소를 설치한다는 개념이다. 미국 측 공식자료에 따르면 이러한 작업이 완성되는 목표 시점이 바로 올해 3분기다.



    이번 탄저균 발송 사건 역시 탐지 능력 구축과 관련해 벌어진 일이라고 미 국방부는 설명하고 있다. 한반도에서 생물학 테러로 의심되는 사건이 벌어질 경우 수집한 검체를 미 본토 연구시설에 보내고 결과를 통보받느라 귀중한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는 것. 독성물질 발견 4~6시간 내에 분석을 마쳐 주한미군 사령관이 직접 상황을 판단할 수 있도록 사령부와 물리적으로 20~30km 이내에 분석 능력을 갖춰야 하며, 따라서 서울 용산기지와 오산기지 등에 분석 장비를 도입했다는 사실이 미군 측 공식문서로 확인된다.

    문제의 탄저균은 이들 분석 장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기 위한 테스트용 병원체였다는 것. 완성 단계에 이른 프로그램 성과를 최종적으로 점검하는 차원에서 진행된 실험이었던 셈이다. 실제로 이전에 작성된 미국 측 공식문서 역시 2015년 3분기에 오산기지에서 주요 장비의 시연작업(Op Demo)이 진행될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다만 동결건조 상태로 비활성화해 보낸 다음 받는 측에서 이를 ‘되살려’ 테스트에 투입해야 하지만, 실무자들의 착오로 활성화 상태 그대로 발송하는 ‘사고’가 벌어졌다는 게 미 국방부의 공식해명이다.

    문제는 해당 프로그램의 위험성에 대해 미국 측 주무기관들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주피터 프로그램 책임자인 피터 이매뉴얼 에지우드 생화학센터 생명과학부문장은 2013년 4월 공개한 홍보자료에서 ‘(주피터 프로그램은) 기술적 한계를 공격적으로 밀어붙여 가장 위험하고도 혁신적인 개념(risky and innovative concept)을 시도할 기회’라고 평한 바 있다. 이 프로그램 자체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진전된 실험(incredibly advanced experiment)’이라는 설명이다.

    한국이 첫 실험장 된 이유

    오산 미군기지 탄저균 발송 파문

    2013년 3월 미국 국방부 생화학방어합동관리국(JPEO-CBD)이 작성한 주피터(JUPITR) 프로그램 보고서.

    한국이 주요 대상으로 선택된 이유와 관련해 이매뉴얼 부문장은 미국 생명과학 전문매체와 인터뷰에서 “주둔국 정부가 호의적이며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어느 정도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주한미군에서 확인된 성과를 바탕으로 2014년 하반기부터 영국과 호주 등 다른 동맹국으로 프로그램을 확대해나가고 있다는 것. 쉽게 말해 전체 프로그램의 첫 번째 실험장이 한국이었고, 그 결과에 따라 전 세계 미군기지로 유사한 탐지시설을 늘려나가는 과정이라는 이야기다.

    사건이 알려진 후 한국 국방부는 미국 측의 탄저균 발송을 사전에 통보받지 못했다고 밝혔지만, 주피터 프로그램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충분히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 측 공식자료에 따르면 애초 이 프로그램이 입안된 계기가 한미 양국이 2011년부터 매년 실시하는 생물방어연습 ‘에이블 리스폰스(Able Response)’에서 나온 문제의식 때문이었다고 적시돼 있기 때문. 한 국방부 관계자는 “미군이 이러한 프로그램을 구축 중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운영방식이나 실험과정 등 구체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우리 측에) 이렇다 할 발언권이 없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선 이번 탄저균 발송이 필요한 일이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제기한다. 생화학 탐지 능력 강화라는 기본 취지에는 공감한다 해도, 극도로 위험한 물질을 운송하는 테스트 방식에는 동의하기 어렵다는 것. 한 대량살상무기 전문가는 “미군의 생물학 위험 탐지키트에는 주요 병원균의 유전자 정보가 모두 입력돼 있으므로 굳이 현장에서 이를 실험할 이유가 없다”며 “통상적인 업무처리 매뉴얼에 따라 한국의 주권사항에 대한 별다른 고민 없이 결정했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민간배송업체를 이용한 것 역시 유사한 논리로 해석할 수 있다. 한 전직 미군 관계자는 “탄저균 같은 위험물질을 미군 수송기에 실으려면 매우 엄격한 사전조치와 관련 부처 허가가 필요하다”면서 “프로그램 담당자들이 이를 피하려고 ‘손쉬운 선택’을 한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미국 역시 가입한 생물무기금지협약(BWC) 제3조는 생물학전에 쓰일 수 있는 설비나 세균 등을 이전하는 일 자체를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주한미군 기지의 법적 지위와 관련해 논란의 여지가 있긴 하지만, 국제법으로만 따지면 탄저균을 다른 나라 영토로 옮긴 것 자체가 미국이 제1의 위협으로 지목해온 ‘대량살상무기 확산(WMD Proliferation)’에 해당할 수도 있는 일이라는 의미다. 더욱이 이러한 일이 한국 측의 명시적 동의 없이 진행됐다는 사실은 명백한 주권침해 사안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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