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84

2015.04.20

거장을 휘감은 베토벤의 고독

마이크 리 감독의 ‘미스터 터너’

  • 한창호 영화평론가 hans427@daum.net

    입력2015-04-20 11: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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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장을 휘감은 베토벤의 고독

    윌리엄 터너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미스터 터너’의 한 장면.

    마이크 리 감독은 영국 리얼리즘의 노장이다. 영국 리얼리즘은 특별히 ‘키친 싱크 리얼리즘’(Kitchen sink realism)이라고 부른다. 집 부엌이 사람의 존재 조건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장소라 보고, 바로 그 장소를 영화의 중심에 놓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계절’(2010) 속에 등장하는 부엌을 떠올리면 리 감독의 미학이 금방 이해될 것 같다.

    ‘미스터 터너’(2014)는 리 감독이 만든, 영국 낭만주의 회화의 거장 윌리엄 터너(1775~1851)의 전기 영화다. 주로 현대 영국 사회의 첨예한 문제를 성찰적인 멜로드라마 형식 속에 담아내던 리 감독이 시대극을, 그것도 위인의 드라마를 제작한다는 사실이 특별한 관심을 끌었다. 리 감독은 평범한 시민, 특히 노동자 계급을 내세워 사회적 갈등의 파토스를 끌어낸 감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미스터 터너’는 거장의 위대한 행위보다 혼자 늙어가는 예술가의 일상에 더욱 주목한다. 첫 장면은 50대에 접어든 터너(티머시 스폴 분)가 여행지 네덜란드에서 일몰을 스케치하는 모습이다. 말하자면 이 영화는 터너의 화려한 시간은 대부분 건너뛰고, 일몰처럼 기울어가는 시간을 강조한다. 지금 터너는 경력의 절정에서 거칠 게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앞으로 남아 있는 것은 퇴장뿐인 것이다.

    영화는 절정을 잠시 보여준 뒤, 곧 노년기에 접어든 화가의 일상에 주목한다. 유일한 혈육이던 아버지가 죽자 화가의 삶에 고독이 밀려든다. 영국 아카데미의 전시회에서 터너는 여전히 영웅처럼 행동하지만, 집에 들어가면 같이 늙어가는 하녀가 한 명 있을 뿐이다.

    거장을 휘감은 베토벤의 고독

    영국 화가 윌리엄 터너의 말년기 걸작으로 꼽히는 ‘눈보라’.

    하지만 터너의 예술적 열정은 청년의 그것 이상이다. 눈보라를 경험하기 위해 폭풍우 속 배에 자신의 몸을 묶고 며칠을 버틴 뒤 걸작 ‘눈보라’(1842)를 발표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터너 경력의 전환점이 되는데, 기성 화단이 여전히 구상에 열중하고 있을 때, 그는 이미 추상을 하고 있어서다. 문제는 미술계가 이런 변화를 외면했다는 것이다. 터너는 예술적으로도 고립되고 만다. 말년 작품 ‘바다괴물이 있는 일출’(1845)은 마치 20세기 추상화처럼 보이는데, 미술 애호가였던 빅토리아 여왕은 물론 아카데미 회원들도 이를 무시한다.



    터너의 말년 작품은 마치 테오도어 아도르노가 말한 ‘말년의 양식’을 보는 듯하다. 일가를 이룬 대가가 말년에 이르러 시대에 순응하기보다 자신이 완성한 미학을 깨고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도르노는 이런 예술가의 사례로 베토벤을 꼽았다. 고전주의를 넘어 낭만주의를 열어서다. 터너도 그런 예술가다. 그는 낭만주의를 넘어 인상주의를 연다.

    영화 초반부, 터너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비창’을 들으며 멜랑콜리해지는데, 그 음악은 마치 화가의 고독한 운명을 암시하는 것 같다. 터너는 노년의 ‘비창’에 빠졌지만, ‘말년의 양식’으로 미술사에 영원히 남을 업적을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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