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77

2015.03.02

즐거운 명절 뒤 자살 급증 왜?

상대적 박탈감이 주원인…도움 청하는 것도 용기, 가까운 사이일수록 배려 필요

  • 손석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학박사 psysohn@chol.com

    입력2015-02-27 15: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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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거운 설 명절이 끝났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즐겁기는커녕 더 괴롭고 힘든 명절이었을 수 있다. 해체됐거나 붕괴된 가족을 떠올리는 독거노인, 생활고와 경제난 탓에 가장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에 빠진 남성, 시어머니 등 시댁 식구와의 갈등 때문에 화병에 걸리고 부부 사이마저 악화된 여성, 취업이나 결혼에 실패해 친척들을 만나기가 두려운 청년이 있었다. 그들은 명절이 끝난 지금까지 힘들어하거나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한다.

    전국 각지에서 노인들의 외로운 죽음이 발견됐고, 경영난 때문에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지 못한 40대 봉제공장 사장이 스스로 목을 매 숨졌으며, 특별한 직업이 없으면서도 직장에 다니는 척했던 30대 남성이 나뭇가지에 전깃줄을 걸고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중앙자살예방센터가 조사한 최근 5년간 명절 자살자 수 통계에 따르면 명절 연휴 다음 날 자살자 수는 평균 43.4명으로, 하루 평균 자살자 수 40.4명보다 3명 더 많았다.

    누군가에게 하소연만 해도 응어리 풀려

    왜 하필 명절을 전후한 시점일까. 상대적 박탈감 때문이다. 명절 기간 대부분 들떠 있게 마련이고, 가족 간 소소한 갈등이 있을지언정 만나서 정을 나누고 화목을 다지며 혼자가 아님을 확인한다. 오랜 휴식이 끝나면 다시 돌아갈 일터와 다시 만날 사람들이 있다는 것 또한 사회적 존재감을 확인케 해준다. 반대로 그렇지 못한 사람은 상대적 박탈감에 빠져든다. 그렇다고 죽음을 택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 잘못된 행동이다. 이 말은 고인을 욕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남아 있는 우리가 교훈을 얻고 달라져야 한다는 의미다.

    사람을 자살이라는 구렁텅이로 내모는 상대적 박탈감도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 다음의 6가지 방법을 기억하고 실천해보자.



    첫째, 도움을 요청하는 용기를 갖는다. 인간은 서로 돕는 존재다. 즉 다른 사람들이 힘들 때 내가 도와주고, 반대로 내가 힘들 때 다른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는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도움받기를 꺼리는 사람이 있다. 도움받는 것을 자존심 상하는 일로 여기거나 도움을 요청했다 거절당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세상의 고민과 역경을 나 혼자 짊어진 채 괴로워하다 이러한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자. 도움을 구하는 것도 용기다. 체면의 손상과 거절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용기다. 물론 결과적으로 체면이 깎이고 거절당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너무 억울하다. 추구하는 사람만이 답을 찾을 수 있다. 한두 번의 도움으로 얻어지지 않으면 세 번 네 번 도움을 청하고, 한 사람에게 거절당하면 여러 사람, 나아가 여러 기관의 도움을 구해야 한다. 이런 노력이야말로 진정한 용기다. 누군가는 반드시 당신에게 손을 내밀 것이다.

    둘째, 누군가에게 하소연한다. 그동안 쌓인 우울, 불안, 두려움, 좌절, 절망, 상실, 분노 같은 부정적 감정을 대화를 통해 털어놓자. 당연히 대화 상대가 있어야 한다. 가족이 가장 좋고 여의치 않으면 친구를 찾는다. 누군가에게 하소연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응어리가 상당 부분 풀어질뿐더러 바로 그 순간 자살의 위험도는 절반 이상 줄어든다. 보건복지부는 자살예방 상담 커뮤니티 희망클릭(1577-0199)을 개설해 전화상담을 하고 있으며 한국생명의전화, 한국자살예방협회, 각 지역 자살예방센터도 이용할 수 있다.

    셋째, 누구에게나 고민과 괴로움이 있음을 깨닫는다. 자신만 괴롭고 힘들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는 독단적이고 자의적인 판단일 뿐, 결코 사실이 아니다. 자신을 포함한 세상 사람은 모두 크고 작은 고민을 갖고 있고, 나아가 심리적 고통을 겪었거나 겪는 중이거나 겪을 것이다. 고민과 괴로움은 인간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보편적 경험이다. 그러니 이런 보편적 경험을 하필 지금 이 순간에 하고 있는 중임을 잊지 말자.

    넷째,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고통은 영원히 지속될까. 결코 그렇지 않다. 인생은 돌고 돈다. 지금 극도의 절망 상태라 할지라도 목숨이 붙어 있어야 고통의 중단과 인생의 반전을 경험할 수 있다. 지금 무척 힘이 든다 해도 희망을 버리지 말자. 낙관주의를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심어놓고 주문을 외우자. ‘언젠가는 좋아질 거야’ ‘10년 후 내 삶은 행복할 거야’ 등을 틈만 나면 크게 외친다.

    버티면 희망은 온다

    다섯째, 남과 비교하는 습관을 버린다.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말 자체가 비교에서 비롯된다. 남은 남이고 나는 나다. 그들의 행복하고 부유한 모습과 나의 불행하고 가난한 모습을 비교하지 않도록 한다. 승부욕, 질투, 경쟁 같은 욕구를 잠시 잊어버린다. 어린이조차 형제자매간 혹은 친구 간 비교를 좋아하지 않아 부모에게 주의를 당부할진대, 어른이 된 우리가 어른스럽게 굴어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만의 절대적 가치를 찾는 노력도 중요하다. 예컨대 사랑과 우정이다. 자신을 사랑하고, 가족과 주변 지인들을 사랑하고, 친구들과 우정을 나눈다. 만일 누군가와 비교해 나를 폄하하는 친구가 있다면 그런 친구는 더는 필요 없다.

    여섯째, 가족 간에도 배려가 필요하다. 가족은 소중한 공동체다. 매우 친밀한 관계로 맺어져 있다. 득실을 따지는 계약관계가 아니라 정으로 맺어진 순수관계다.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말을 함부로 하고, 내 뜻대로 가족을 움직이려 하며, 자신의 바람을 가족에게 실현시키고자 한다. 가족을 위하는 마음에서 그렇다고 해도 결과적으로는 상처가 커지고 갈등이 증폭된다.

    이제라도 배려를 하자.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듯이 자녀, 배우자, 노부모, 형제자매를 배려하자. 다그칠 것이 아니라 내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그 자체로 이해하고 수용하자. 그것이 진정한 가족의 구실이다. 홀로 남겨진 노부모를 찾아가는 것도 배려다. ‘어차피 보면 괴로울 텐데 차라리 가지 않는 편이 더 속 편하다’는 생각은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부모를 극진하게 모시지 못해도, 사는 것이 빠듯해 물질적인 도움을 주기 힘들어도 얼굴을 마주 보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최소한의 배려다. 노인의 배고픔은 국가가 어느 정도 해결해준다. 그러나 노인의 외로움은 가족이 온전하게 덜어줄 수 있다.

    결론적으로 생각과 태도를 바꾸는 것은 여러모로 쓸모 있다. 지금 파산 직전이라 할지라도 마지막 방도를 한 번 더 생각하고, 파산을 겪었어도 재기를 꿈꾸며, 재기가 힘들게 느껴진다 해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채 버티는 것이 중요하다. 이 모든 것은 살아 있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러니 죽을 이유가 사라지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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