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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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뚜기족이 된 애연가들의 항변

담뱃값 인상에 금연구역 확대, 궁지에 몰린 흡연가들…이참에 끊어버려?

  • 구희언 기자 hawkeye@donga.com

    입력2015-01-05 10: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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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장인 이승원(29) 씨는 지난해 12월부터 점심시간에 식사를 마치면 편의점에 들르는 버릇이 생겼다. 새해부터 담뱃값이 오른다는 소식에 궁여지책으로 매일 담배를 사들이기 시작한 것. 그는 회사 인근 편의점에서 담배 2갑을 사고, 퇴근길 집 근처 가게에서 2갑을 산다. 해외에 나가는 친구들에겐 “돌아오는 길에 담배를 사다달라”고 이리저리 부탁도 해둔 상태. 그는 “당장 담배를 끊을 계획이 없다. 사둔 담배를 다 피우면 금연을 고민할지도 모르겠다. 일단 살 수 있는 데까지 사 모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1월 1일부터 담뱃값이 2000원씩 인상됐다. KT&G와 한국필립모리스의 에쎄, 레종, 말버러, 팔리아먼트 등은 4500~4700원이 됐다. 던힐을 판매하는 브리티쉬 아메리칸 토바코 코리아(BAT코리아)와 메비우스를 판매하는 저팬 토바코 인터내셔널 코리아(JTI코리아)는 본사와 가격 협의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12월 31일까지도 기획재정부에 변경된 담뱃값을 신고하지 않았다. 두 회사의 담배는 1월 1일에도 기존 가격에 살 수 있지만 정부에 납부해야 하는 세금은 4500원이 기준이라 팔수록 손해 보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담배에 부과하는 세금도 올랐다. 국세의 일종인 개별소비세를 신설해 담배 한 갑(20개비)당 개별소비세 594원을 걷는다. 개별소비세는 종가세여서 향후 담뱃값이 오르면 세액도 오른다. 또한 물가연동제를 도입해 일정 기간 물가인상분을 반영, 담뱃값을 올릴 수 있게 했다. 이젠 애연가라는 사실 자체가 부의 과시가 될지도 모른다.

    사재기하느니 이참에 끊자

    담뱃값 인상은 2004년 500원 인상 이후 10년 만이다. 애연가들의 행보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사재기’파와 ‘금연 도전’파다. 편의점과 가게에서 담배를 1인당 1~2갑만 팔자 이씨처럼 이곳저곳을 돌며 오르기 전 가격으로 담배를 사두려는 ‘메뚜기족’도 나타나고 있다.



    2014년 12월 27일 오후 8시 서울 성동구 행당동 CU 왕십리한양점 담배 진열대에는 듬성듬성 빈자리가 보였다. 계산대 앞에는 ‘정부 정책에 따라 담배는 1인당 1갑씩만 판매하고 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라는 글이 붙어 있다. ‘나갔다 들어오셔도 안 됩니다’라는 애교 있는 경고도 보인다. 담배를 사러 온 사람들이 말버러, 디스, 에쎄 같은 인기 담배를 찾을 때마다 아르바이트생 이모(22) 씨는 “죄송한데 그 제품은 다 팔렸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는 “대학가라 담배를 사려는 사람이 많은데, 인기 담배를 사려면 더 일찍 와야 한다”고 말했다.

    소매유통업체들은 ‘하루 몇 갑 판매’는 특정 고객이 많은 담배를 사갈 경우 피해를 볼 수 있는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한 본사 차원의 권고사항일 뿐 강제사항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같은 ‘담배 판매 제한’ 때문에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진다. 2014년 12월 15일에는 서울 강북구 수유동의 한 편의점에서 직원이 “담배를 1갑만 판다”고 하자 격분한 손님이 30여 분간 행패를 부려 경찰이 출동했다. 22일에는 서울 강북구 미아동 한 편의점에서 “담배가 모두 팔렸다”고 말한 직원에게 손님이 욕설을 하고 주먹으로 얼굴을 때리는 일도 있었다.

    서울 성동구 행당동의 한 편의점 점주 최모(56) 씨는 “담배를 보루 단위로 살 수 없느냐, 담배 여분이 있으면 빼놔달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가격이 오르면 팔려고 일부러 내놓지 않는 거냐고 시비를 걸기도 하는데 실제로 물량이 적어 당장 팔 물건도 모자라다”고 했다. 그러나 이참에 흡연량을 줄이겠다는 사람도 있다. 직장인 박정훈(38) 씨는 “커피 마시듯 담배를 피웠지만 사재기할 생각은 없다. 하루에 한 갑씩 피우던 걸 반 갑으로 줄일 계획”이라고 했다.

    애연가에게 슬픈 소식은 또 있다. 새해부터는 금연구역이 대폭 확대돼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공간도 점차 사라진다. 보건복지부는 간접흡연 피해 예방 등을 위해 시행해오던 금연구역 대상을 100㎡ 이상 넓이의 음식점에서 2015년부터는 넓이에 관계없이 전국 모든 음식점으로 확대한다고 밝혔다. 일반 궐련뿐 아니라 전자담배, 물담배 등 모든 형태의 담배가 대상이다. 이를 위반한 흡연자에게는 10만 원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흡연석 특례 기간이 종료되면서 커피전문점의 흡연석도 사라진다. 음식점 내 금연 표시도 준수해야 한다. 이를 어기면 170만 원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2차 위반은 330만 원, 3차 이후에는 500만 원씩 과태료를 물린다. 애연가들의 유일한 숨구멍은 흡연실. 그것도 까다로운 기준을 통과해야 한다. 국민건강증진법 시행규칙에 명시된 기준에 따라 건물 내 흡연실은 담배 연기가 실외로 배출될 수 있게 환풍기 같은 환기시설을 설치했을 때만 가능하다. 흡연실에는 재떨이 등 흡연을 위한 물품 외에 컴퓨터, 탁자 같은 영업용 시설이나설비를 설치해선 안 된다. 보건복지부는 1~3월 계도와 단속을 병행할 예정이다. 계도 기간에도 과태료가 부과된다.

    PC방 이어 설마 당구장까지?

    메뚜기족이 된 애연가들의 항변

    여야가 담뱃값 2000원 인상에 합의하면서 담배 사재기가 극성을 부리고 있다. 2014년 11월 30일 서울 종로구의 한 마트 안 담배 판매대에 빈자리가 듬성듬성 보인다.

    이번 조치에서 당구장, 스크린골프장 등은 금연구역으로 지정되지 않았다. 이경은 보건복지부 건강증진과장은 “당구장과 스크린골프장의 경우 장기적인 계획으로는 금연구역에 넣을 것을 고려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언제 어떤 식으로 진행할지 계획이 나온 건 아니다. 실내 스포츠 시설이 금연구역에 포함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2015년에는 금연구역이 더 큰 폭으로 확대될 것”이라고 밝혔다.

    2013년 PC방이 금연구역으로 지정되자 업주들은 크게 반발했다. PC방에서 흡연을 막으면 영업 매출이 감소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PC방 업주들은 당구장은 흡연이 가능하다는 점을 들며 “형평성에 어긋난다. 왜 PC방만 탄압하느냐”고 이의를 제기했다. 올해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금연구역을 국가적으로 전폭 확대한다면 당구장, 스크린골프장도 더는 ‘흡연자의 성지’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방기송 국민생활체육전국당구연합회 사무처장은 “당구장 업주들 의견은 양분된 상태”라고 말했다.

    “과거에는 반대 의견이 70% 가까이 됐지만 이제는 찬반이 50 대 50 수준입니다. 흡연실 설치가 가능하다는 걸 안 이후에는 긍정적인 의견이 늘었죠. 이곳에서는 4년째 당구장의 금연구역 지정 법제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매캐한 담배 연기가 입문자에게는 진입 장벽인데, 비흡연시설로 지정된다면 비흡연 당구인의 유입을 늘릴 수 있기 때문이죠. 실제로 담배 연기 때문에 당구를 접는 사람도 많거든요. 그렇기에 금연구역이 된다면 초기에는 손실이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매출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캐나다 비흡연자권리협회(NSRA)가 2003년에 만든 실내 완전금연 시설에 대한 간접흡연규제 분류체계는 골드·실버·브론즈 등급으로 나뉜다. 한국은 올해부터 모든 식당에서 전면 금연을 실시하지만 흡연실 설치를 허용했기에 브론즈 등급이다. 캐나다는 한 주를 제외한 모든 주가 골드 등급(모든 공공장소와 직장 실내에서 전면 금연)을 충족한다.

    전 세계적으로 간접흡연의 피해를 줄이고자 공공장소 금연 정책을 강화하는 추세다. 공공장소 범위도 확대되고 있고, 금연시설과 인접한 실외에서의 흡연도 규제한다. 사적 공간인 ‘집 안’도 더는 흡연 자유지대가 아니다. 미국 몇몇 주와 선진국에서는 임대주택, 기숙사 등을 전면 금연구역으로 지정했다. 전 세계적으로 흡연자가 설 땅은 줄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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