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56

2014.09.29

알리바바 ‘대박’에 배 아픈 진짜 이유

중국 전자상거래 진화 한국 뛰어넘어…기득권 저항에 우린 ‘우물 안 개구리’ 신세

  • 정호재 채널A 기자 demian@donga.com

    입력2014-09-29 10: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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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한 영어 통역가에서 출발해 1998년 인터넷 벤처사업을 중국 항저우(杭州)에서 개척한 마윈(馬云) 알리바바(阿里巴巴)그룹 회장의 성공 스토리가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알리바바는 기업공개(IPO) 이후 시가총액이 300조 원에 근접할 만큼 세계 최고 전자상거래 플랫폼으로 떠올랐다.

    1980년대 애플, 90년대 마이크로소프트(MS), 2000년대 야후, 구글, 아마존 등 주로 미국계 벤처 신화에 익숙한 이들에게 중국발(發) ‘벤처 혁명’이 주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정보기술(IT) 업계 관계자들은 ‘G2(미·중) 시대’의 결정적 사례라고 호들갑을 떨기도 한다. 특히 한국보다 한두 발이 아닌, 세 발짝 뒤에서 시작한 중국 인터넷 기업의 글로벌 ‘대박’인 만큼 한국 벤처업계 처지에서는 충격과 공포를 넘어 뼈아픈 교훈을 준 사건으로 기록될 만하다. 어째서 한국 인터넷 기업은 알리바바가 못 된 것일까.

    한국보다 출발 늦었던 ‘알리바바’

    한국 소비자에게 알리바바는 익숙한 서비스가 아니다. 그저 일부 중소업체에게만 유용하고 반드시 필요한 전자상거래 플랫폼으로 존재감을 보였을 뿐이다. 알리바바는 ‘B2B(기업 간 전자상거래) 마켓플레이스’로 시작했다. 일반 소비자가 사용하는 방식인 B2C(기업과 소비자 간 전자상거래)와는 성격이나 지향점이 다르다. 알리바바에서는 대개 100개, 1000개 이상 판매하는 도매 상품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저가 제조업체가 많은 중국에 꼭 들어맞는 서비스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를 발판 삼아 알리바바는 전자상거래와 관련된 거의 모든 기술과 서비스를 다루는 종합플랫폼으로 성장했다. 촌뜨기 도매업자가 서울 백화점과 대형마트까지 장악한 셈이다.

    알리바바의 시작은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는 인터넷 우등생인 한국, 미국과 비교해 크게 늦은 시점이었다. 일례로 미국 ‘야후’와 한국 ‘다음’이 설립된 시기는 1995년이다. 또 미국 아마존은 95년, 한국 최초의 인터넷 쇼핑몰 인터파크는 96년에 생겼다. 게다가 전자상거래를 뒷받침할 만한 중국의 경제·사회 인프라는 대단히 허술했다.



    2004년 무렵 기자가 중국 인터넷업계를 처음 취재할 당시만 해도 전자상거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인터넷 보급률이나 신용카드 사용률은 숫자로 표현하기 민망한 수준이었다. 중국 젊은이는 대부분 PC방에 가야 인터넷 웹사이트에 접속할 수 있었다. 온라인 쇼핑을 하려면 확인 전화가 필수였고, 결제 수단이 없어 직원을 보내 수금하는 일도 많았다. 전자상거래라고 부를 만한 수준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국의 사정은 이와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B2B 마켓플레이스만 해도 1999년을 전후해 십수 개 업체가 경쟁하며 세계 시장 진출을 노렸다. 신용카드 보급도 빨랐고 자본과 기술도 충분했다. 그런데도 관련 벤처기업은 대부분 국경 안에 안주해버렸다.

    전문가들은 한국 전자상거래 침체의 근본 원인으로 ‘액티브엑스(Active X) 기반의 공인인증서 제도’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1999년 도입 초기 전자서명법으로 불린 공인인증서는 온라인 거래의 안전성을 높이려고 국가가 기술 표준을 정한 데서 비롯됐다.

    한국 전자상거래 업체와 거래하려면 누구라도 MS의 익스플로러를 써서 보안 소프트웨어를 깔아야 하고, 나아가 30만 원 이상 거래를 하려면 한국 공인기관이 인증한 신분증을 개인용 컴퓨터(PC)에 저장해야 했다. 이럴 경우 금융사고가 날 확률은 줄지만 해외에서는 한국 전자상거래 서비스를 이용할 이유가 없게 된다. 게다가 한번 도입된 제도는 쉽게 바뀌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인터넷을 통한 국제 거래는 흔치 않았다. 그러나 인터넷 보급률이 높아지고 국경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이른바 ‘해외 직구(직접 구매)족’이 폭발적으로 늘었고, 한국의 전자상거래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됐다. 2014년 초 박근혜 대통령이 나서 “천송이(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주인공 이름) 코트를 중국 인터넷 사용자가 살 수 없는 것은 문제 아니냐”는 지적을 한 원인이 된 것이다.

    액티브엑스와 공인인증서 문제는 새로운 기술과 제도를 거부하는 기득권의 저항이 얼마나 거센지를 입증하는 사례다. 인터넷 산업과 관련된 정책은 전통적으로 산업통상부나 정보통신부(현 미래창조과학부) 영역이다. 그러나 전자상거래 영역은 금융감독원(금감원)의 절대적인 감독과 감시를 받는다. IT 전문가들이 줄기차게 ‘공인인증서 무용론’을 주장했지만 금감원을 비롯한 금융권에서는 이를 무시해버렸다.

    한국 전자상거래를 주저앉힌 ‘원흉’

    이에 비해 중국의 전자상거래 진화 속도는 한국을 크게 뛰어넘었다. 온라인으로 정치 토론은 금지됐지만 전자상거래는 사실상 거의 무한대의 자유를 허용한 것이다. 나아가 2010년 모바일 혁명 이후 스마트폰 기반의 금융거래도 간단히 허용했다. 우리는 이제야 카카오톡으로 10만 원 미만의 돈을 송금할 수 있게 됐지만 중국은 오래전부터 스마트폰으로 택시도 타고 현금 선물도 할 수 있었다.

    4월 중국에서 만난 장이(張毅) 광둥성 인터넷협회 부회장은 “중국은 여전히 공산국가이기 때문에 정부가 장려하는 인터넷 산업을 견제할 만한 금융 자본이나 정부 조직이 없는 것이 행운”이라며 “기존에 없던 신(新)산업에서 중국 기업들이 세계 1위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9월 19일 알리바바가 미국 뉴욕 증시에 상장한 날 마윈 회장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10억을 벌면 그것은 내 돈이다. 100억을 벌면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1조를 벌면 그것은 내 돈이 아니다. 나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다”라고 일갈했다. 그의 말에서 압도적인 자신감과 함께 한국 인터넷시장의 초라함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새로운 미래’나 ‘도전’이 아닌 ‘이해득실’만 추구해온 것이 아닐까.

    인터뷰 | 가오홍빙 알리바바 부사장

    “알리바바 성공은 ‘e커머스’ 발달 덕분”


    알리바바 ‘대박’에 배 아픈 진짜 이유
    “알리바바 발전 속도?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가오홍빙(高紅氷) 알리바바그룹 부사장(사진)은 우리나라 산업통상부와 비슷한 공신부(工信部)에서 일한 공무원 출신이다. 2005년 직접 인터넷 벤처기업 창업에 나섰다가 2010년 마윈 회장의 제안으로 알리바바에 합류했다. 1990년대 중국 반도체 및 인터넷 정책의 설계자 가운데 한 명으로, 1998년부터 마윈 회장과 친구 이상의 관계를 맺어온 덕분이다.

    가오 부사장은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중국 정보기술(IT) 시장이 결코 폐쇄적이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는 “알리바바만 해도 해외 지분이 절대 다수일 정도로 상당수 기업이 열린 구조”라면서 “알리바바가 미국 뉴욕 증시에 상장한 것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는 알리바바의 성공 요인을 ‘e커머스’가 확대된 덕분이라고 봤다. 중국 변두리 농촌 지역에서도 인민들의 소비 욕구가 빠르게 증가했고, 아예 온라인으로 물건을 거래하는 것이 경제적이라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체화했기 때문이라는 것. 알리바바는 현재 중국 소비재 총매출액의 20%를 차지할 정도로 급속히 성장했다. 그는 “중국 e커머스의 성장 속도가 너무 빨라 예측이 힘들 정도”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그는 알리바바의 존재 이유에 대해 “반드시 중소기업을 위해 서비스한다”는 철학을 소개했다. 알리바바의 궁극적인 창업 목표가 바로 ‘중소기업’이라는 얘기다. 실제 지난해 알리바바의 B2C(기업과 소비자 간 전자상거래) 사이트 타오바오(淘宝网)에서 창업한 젊은이가 700만 명에 이르렀다. 중국 인터넷 비즈니스의 역동성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가오 부사장은 “여러 나라를 비교하니 일본은 이미 인터넷 산업에서 기회를 잃은 것으로 보인다”면서 “앞으로 미국과 사회적으로 변화가 빠른 중국이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특히 1990년대 이후 출생자들이 그 중심에 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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