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95

2017.07.05

국제

이러려고 반환받았나

우울한 홍콩 주권 중국 반환 20주년 … 정체성과 민주주의 상실, 경제는 중국에 종속

  •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truth21c@empas.com

    입력2017-07-03 17: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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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국양제(一國兩制), 항인치항(港人治港), 고도자치(高度自治). 홍콩의 주권 반환 협상을 하면서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자인 당시 덩샤오핑 주석이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에게 제시했던 3대 원칙이다.

    덩 주석은 제1차 아편전쟁(1839~1842) 에서 청나라가 서구 열강에게 패배해 영국에 할양된 홍콩을 되찾고자 1982년 9월부터 대처 총리와 협상을 벌이기 시작했다. 대처 총리는 식민지인 홍콩의 주권을 중국에 반환하기를 꺼렸다. 홍콩에 구축해놓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체제가 붕괴될 것을 우려해서였다. 특히 영국은 홍콩에 엄청난 투자를 했기 때문에 만약 홍콩이 사회주의국가가 되면 이를 모두 상실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를 간파한 덩 주석은 홍콩에 이른바 ‘일국양제’라는 세계 역사상 초유의 제도를 50년간 보장하겠다고 밝혔다.

    일국양제는 하나의 국가에 2개 체제, 다시 말해 국가는 중국이지만 홍콩의 각종 제도는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덩 주석은 또한 홍콩은 중국인이 아닌 홍콩인이 통치하는 ‘항인치항’과,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자율권을 행사할 수 있는 ‘고도자치’도 약속했다. 양국은 1984년 12월 19일 홍콩 주권 반환 협정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홍콩 주권은 97년 7월 1일 영국에서 중국으로 이양됐고, 중국은 홍콩특별행정구를 설치했다. 대처는 훗날 덩샤오핑의 일국양제 구상을 천재적 발상이었다고 회고했다.



    퇴색한 3대 원칙

    하지만 20년이 지난 현재 홍콩은 덩 전 주석이 약속한 3대 원칙이 퇴색하면서 ‘중국화(中國化)’되고 있다. 중국 정부는 홍콩 주권을 반환받은 초창기에는 홍콩특별행정구에 대한 간섭을 최소화했다. 영국과 캐나다 등으로 이민 갔던 홍콩인들이 다시 돌아오는 등 주권 반환 10주년인 2007년만 해도 일국양제가 성공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다 중국 정부는 2000년대 후반부터 홍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특히 2013년 시진핑 국가주석이 취임한 이후 홍콩을 강압적으로 통치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에 반발한 홍콩 주민들은 2014년 홍콩특별행정구 수반인 행정장관의 직선제 도입 약속을 지키라며 도심에서 이른바 ‘우산혁명’이라 부르는 민주화 시위를 3개월간 벌였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이를 강력하게 탄압했다. 중국 정부는 또 각종 정치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물론 입법부와 사법부, 언론에 대한 통제를 강화했다. 대표적 사례로는 중국 정부가 2015년 말 반중 서적 출판업자들을 홍콩에서 중국 본토로 강제 연행한 사건을 들 수 있다. 중국 의회 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는 지난해 11월 헌법 격인 홍콩 기본법에 대한 해석을 통해 홍콩 독립을 지지하는 인사들의 공직 임용을 원천 불허하는 규정을 채택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홍콩 의회인 입법회는 친독립파 의원 2명의 자격을 박탈했다. 중국 공산당 최고지도부의 일원이자 사실상 홍콩 최고책임자인 장더장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은 “홍콩 주민들이 고도자치를 명분으로 중국 정부에 대항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며 “일국양제를 폐지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중국 정부와 홍콩 주민은 일국양제 등 3대 원칙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일국양제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병행할 수 있다는 경제체제 원칙을 가리키는 것일 뿐, 정치체제는 사회주의를 기본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홍콩특별행정구의 일국양제 실천’이라는 제목의 백서에서 ‘양제’는 ‘일국’에서 비롯된다며 ‘홍콩이 법에 따라 고도자치를 시행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중앙이 감독권을 갖는다’고 명시했다. 백서의 이런 내용은 홍콩 정치체제로 자유민주주의를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실제로 초대 둥젠화부터 현재 캐리 람까지 역대 홍콩특별행정구 행정장관은 예외 없이 간접선거로 선출된 친(親)중국 인사다. 이들은 모두 중국 정부가 낙점했다. 또 전국인민대표대회가 홍콩 기본법에 대한 해석권을 갖는 것은 홍콩의 사법주권 침해가 아니라 중국의 사회주의체제에선 당연한 절차라는 태도다. 반면 홍콩 주민은 중국이 자유민주주의를 보장한 만큼 자신들의 대표인 행정장관과 입법회 의원을 보통선거를 통해 직접 선출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홍콩 주민은 또 홍콩 기본법에 따라 모든 사법 절차가 독립적으로 집행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정치적 요구들이 모두 좌절되면서   중국에 대한 홍콩 주민의 반감이 증폭되고 있다. 게다가 홍콩 주민은 경제 양극화 현상이 심화되면서 더욱 반발하고 있다. 홍콩 주민 가운데 지난해 자산 상위 10%의 월평균 소득은 11만2450홍콩달러(약 1640만 원)로 하위 10%의 2560홍콩달러(약 37만 원)보다 44배가 많았다. 홍콩은 전체 인구 720만 명 가운데 빈곤층으로 분류되는 인구가 96만 명에 달해 세계에서 12번째로 불평등이 심한 지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빈부 격차 외에도 중국인이 홍콩에 대거 몰려오면서 부동산 가격은 지난 10년간 3배 폭등했다. 주권 반환 20년간 홍콩에 이주해 정착한 중국 본토 인구는 150만 명이나 된다. 중국 기업들은 이미 홍콩 경제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금융, 부동산 분야는 중국 기업에 완전히 장악됐다. 글로벌 금융 중심지인 홍콩 경제가 앞으로 중국에 더욱 종속될 것이란 말까지 나오고 있다.



    부동산 가격, 10년간 3배 폭등

    홍콩의 암울한 미래에 분노한 젊은이들은 홍콩을 중국에서 분리,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산혁명 이후 일부 친독립파 단체는 더욱 과격한 시위를 벌여왔다. 실제로 지난해 2월 춘제 때 최대 규모 폭력 시위인 ‘어묵혁명’이 벌어지기도 했다. 지난해 9월 입법회 의원 선거에서는  친독립파가 직선제가 적용된 지역구 의석 35석 가운데 23%인 8석을 차지하기도 했다. 홍콩 주민은 중국의 개입이 강화될수록 ‘항독(港獨·홍콩 독립)’을 주장할 공산이 크다.

    홍콩 민심이 이처럼 심상치 않자 시 주석은 6월 29일부터 7월 1일까지 홍콩을 방문해 인민해방군을 사열하고 주권 반환 2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다. 일국양제의 성공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사회주의체제가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에서다. 특히 시 주석의 홍콩 방문은 홍콩이 중국 영토라는 점을 천명하면서 중국이 앞으로 대만과 통일에도 박차를 가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치는 것으로 분석된다. 시 주석 방문에 맞춰 중국의 첫 항공모함인 랴오닝호가 홍콩에 처음 기항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중국 해군의 위용을 홍콩 주민이 눈으로 확인하고 ‘중국인’으로서 자긍심을 높일 수 있도록 시 주석이 직접 랴오닝호의 방문을 결정했다는 후문이다. 중국 정부는 또 홍콩 주민의 박탈감을 해소하고자 ‘선물’도 내놓았다. 중국인민은행은 홍콩 및 해외투자자가 홍콩거래소를 통해 중국 채권시장에 투자할 수 있는 ‘베이샹퉁(北向通)’을 승인했다. 홍콩이 중국 금융시장의 관문이라는 위상을 높이기 위한 조치라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시 주석과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홍콩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할 것이 분명하다. ‘동양의 진주’로 불리던 홍콩은 시간이 갈수록 정체성을 상실하면서 빛을 잃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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