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49

2014.08.04

나이에 굴하지 않는 ‘100세人’ 현실로

장수 보편화, 건강해야 진짜 100세…끊임 없이 움직여야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14-08-01 17:33: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나이에 굴하지 않는 ‘100세人’ 현실로

    경기 수원의 실버타운 ‘삼성노블카운티’.

    100번째 생일날 양로원 창문을 뛰어넘어 도망치기로 결심한 노인이 있다. 창문을 사뿐히 기어오를 수 있는 근력과 바닥에 떨어질 때의 충격을 감당할 수 있는 무릎 관절, 안락한 양로원을 탈출하기로 마음먹고 실행에 옮길 만한 열정까지 갖췄으니, 어쩌면 그에게 ‘노인’이라는 단어가 더는 어울리지 않을지 모른다. 7월 내내 각종 베스트셀러 차트 정상을 지키고 있는 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열린책들) 주인공 ‘알란’ 얘기다. 소설 인기에 힘입어 제작된 동명 영화도 7월 말 관객 수 20만 명을 돌파했다. 다양성 영화로는 보기 드문 흥행 성적이다.

    이 작품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건 ‘100세인’(더는 노인이 아니다!) 알란의 모험심. 그는 공동묘지를 바라보며 “비록 몸뚱이는 늙어서 삭신이 쑤실지라도, (중략) 실컷 돌아다니는 일이 이 친구처럼 여섯 자 땅 밑에 누워 있는 것보다는 훨씬 재미있지 않은가”라고 자문한다. “그동안 양로원에 웅크리고 앉아 ‘이제 그만 죽어야지’라고 되뇐 것은 잘못이었다”고 선언하는 그에게 100세라는 나이는 아무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한국 수명 연장 속도 빨라…2020년 90세 넘어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의학기술이 발전하면서 현실 세계에서도 ‘알란’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방지일(103) 영등포교회 원로목사는 그 대표주자 중 한 명이다. 여전히 신도들 앞에서 설교하는 현역 목회자인 그는 최근 한국 기독교계의 자성과 참회를 촉구하는 사진을 촬영, 공개해 화제가 됐다. 한 손에 지팡이를 짚기는 했지만, 바지를 걷어 올리고 다른 한 손으로 자기 종아리를 때리는 모습에 어색함이 없다. 방 목사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남다른 건강법이 있는 건 아니다. 백 살이 넘었다고 뭐가 다르겠나”라고 했다. 나이를 이유로 자신을 특별하게 대하지 말라는 주문으로 들렸다.

    변경삼(100) 창생메디칼 대표, 박승복(92) 샘표식품 명예회장 등도 활발하게 일하는 ‘장수 현역’으로 꼽힌다. 변 대표는 여전히 경영을 총괄하고 있고, 박 명예회장도 아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긴 했지만 매일 회사에 출근한다. 샘표식품 관계자는 “(박승복) 회장님은 매일 오전 회사에 나와 각종 업무를 주관하고, 다양한 모임에도 참여한다. 회사 주변 커피숍에 앉아 계시다 오가는 직원들에게 커피를 사주시는 걸 좋아한다”고 전했다.



    나이에 굴하지 않는 ‘100세人’ 현실로

    1944년 결혼해 70년째 해로하고 있는 남규욱, 강분남 부부. 90대 나이에도 여전히 수영과 산책을 즐기는 ‘장수 현역’이다.

    경제 활동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청년 못지않게 활력 넘치는 삶을 사는 이도 많다. 강원도교육감, 한국방송통신대 교수 등을 지낸 남규욱(92) 씨는 매일 아침 600m씩 수영을 하며 건강을 단련한다. 50m 트랙을 12번 도는 것이다. 일제강점기 경성사범학교 재학시절 전일본배구대회에 조선 대표로 출전할 만큼 운동 실력이 뛰어났던 그는 “꾸준히 관리한 덕에 아직도 배에 ‘왕(王)’ 자 모양 근육이 잡힌다”며 “늘 건강하고 멋지게 사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돋보기 없이 신문을 읽고, 보청기도 사용하지 않는 그에게 ‘100세’는 결코 두려운 나이가 아니다.

    유엔은 2009년 ‘세계인구 고령화 보고서’를 내면서 100세 장수가 보편화하는 시대의 인류를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라고 명명했다. ‘보편화’의 기준을 ‘평균수명’으로 삼는다면 한국인은 ‘호모 헌드레드’를 향해 급속도로 나아가는 중이다. 평균수명이 1970년 62.1세에서 1990년 71.3세, 2000년 74.3세, 2005년 77.7세로 해마다 높아지고 있는 것. 2013년에는 여성 84.6세, 남성 77.9세를 기록했다. 지난해 통계청이 유엔 자료를 토대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세계 74개국 가운데 평균수명 연장 속도가 한국보다 빠른 나라는 방글라데시, 니카라과, 베트남 등 7개국뿐이다.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은 ‘최빈사망연령’. 사람이 가장 많이 사망하는 나이를 뜻하는 통계로, 한국인의 최빈사망연령은 1983년 71세에서 지난해 86세로 크게 높아졌다. 2020년에는 90세를 넘어설 것으로 전망된다. 이에 따라 현재 살아 있는 54년생 남자 10명 중 4명(39.6%), 여성 10명 중 5명(46.2%)은 98세까지 살게 된다는 분석까지 나왔다.

    10명 중 4명 “100세 이상 삶 축복 아니다”

    이러다보니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장수’의 기준이 ‘80세’에서 ‘100세’로 높아지는 추세다. 우리 정부는 매년 10월 2일 노인의 날에 그해 100세가 된 노인에게 청려장(靑藜杖)이라는 지팡이를 선물하는데, 장수를 축하하는 의미다. 청려장 수상자 역시 2010년 904명, 2011년 927명, 2012년 1201명, 지난해 1264명으로 매년 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100세 현역’은 ‘호모 헌드레드’에게 하나의 모범 사례가 될 수 있다.

    2012년 이미 100세 이상 인구가 5만 명을 돌파했을 만큼 고령화 속도가 빠른 일본에서는 일본 전역을 돌며 건강과 장수에 관한 순회강연을 하는 의사 히노하라 시게아키(103)와 현역 회사원으로 ‘100살이다 왜!’라는 책을 쓴 후쿠이 후쿠타로(102) 등이 손에 꼽히는 ‘100세 현역’이다. 젊은 시절 군인, 금융회사 간부 등으로 일하다 남들이 다 은퇴할 나이인 70세에 도쿄의 복권판매위탁회사에 다시 취업한 후쿠이는 책에서 “일은 살아 있는 사람의 의무이고 사명이다. 이 나이에도 일할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라며 “자기가 먹을 양식을 스스로 마련할 수 있다면 그 자체로 멋진 직업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장수 사회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11년 전국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10명 가운데 4명은 90세 또는 100세 이상까지 사는 현상에 대해 ‘축복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축복이다’라고 응답한 비율은 28.7%에 불과했고, ‘그저 그렇다’가 28%를 차지했다. 응답자 10명 가운데 6명(59.3%)이 바라는 희망수명은 80~89세였으며, 70~79세(20.9%)가 뒤를 이었다.

    이런 현상은 장수 노인의 상당수가 건강을 잃은 채 살아가는 현실 때문에 나타난다는 분석이 있다. 이에 따라 세계 각국 의료진은 ‘건강하게 장수하는 법’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미국 하버드대 의대 연구진이 1992년부터 5년 동안 100세 이상 노인 169명을 연구한 결과 내놓은 ‘장수 비법’은 다섯 가지. ‘스트레스를 해결하라. 많이 웃어라. 늘 새로운 도전을 하라. 음식을 가려 먹어라.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라’다.

    2000년대 초반 전국을 돌며 100세인 1000여 명을 면접 연구한 박상철 삼성종합기술원 웰에이징연구센터장도 “이제 사람들은 그저 오래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기능을 유지한 채 건강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며 ‘건강한 100세인’으로 살려면 나이가 들어도 끊임없이 활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쓴 보고서에는 100세인이 이렇게 묘사돼 있다.

    “움직이지 못할 정도의 와상 노인을 제외하고는 새벽에 가든, 낮에 가든, 저녁 무렵에 가든 대부분 벌써 또는 아직 밭이나 논이나 창고에서 일을 하고 계셨다. 전남 곡성군 석곡면에서 만나 뵌 백세인 이판순 할머니는 ‘우리나라 노인들 문제가 많아. 늙었다고 일하지 않고 빈둥대. 나이가 들어도 일해야지’라고 일갈하시면서 여전히 밭농사를 혼자 짓고 계셨다. 강원 횡성군에서 만나 뵌 권순경 할아버지는 당신 스스로 개발한 맨손체조를 하루에 열댓 번씩 하고 여전히 밭일이며 집안일을 손수 하는 열정을 지니고 계셨다. 백세 장수인 중 상당수는 일흔, 여든 넘은 자식들보다 정정하고 부지런하셨다. 장수하는 분들의 삶을 향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는 ‘생명은 움직여야 한다’는 공리가 단순히 육체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며, 마음까지도 함께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엄연한 진리를 보여준다.”

    박 센터장에 따르면 연구 당시 강원 횡성에 살던 101세 할아버지는 하루 종일 감자박스 노끈을 모아 바구니를 만들었다. 땔감으로 쓸 일도 없는데 매일 산에서 나무를 해오는 노인도 있었다. 방지일 목사나 변경삼 대표 같은 ‘100세 현역’의 삶도 이러한 ‘건강한 100세인’의 특징과 맞닿아 있는 셈이다.

    나이에 굴하지 않는 ‘100세人’ 현실로

    실버타운 ‘삼성노블카운티’에서 수영을 즐기고 서양화를 그리는 입주자들.

    “늙었다고 쉬면 안 돼, 항상 일해야”

    하루에 세 번 소식(小食)을 하고, 간식을 즐기지 않으며, 반주를 해도 밥공기로 한 잔을 넘기지 않을 만큼 절제가 생활화돼 있는 것도 박 센터장이 만난 건강한 100세인들의 특징. 그는 또 “건강하게 오래 살려면 사회적인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며 “백 살이 되면 주변 친구들이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많다. 그때 새로운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며 잘 어울릴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가 만난 한 100세 할머니는 늘 방 윗목에 빵과 과자를 수북하게 쌓아뒀다고 한다. 놀러오는 동네 꼬마들을 위한 군것질거리였다.

    요즘에는 이처럼 계속 활동하고, 세상과 끊임없이 소통하는 삶을 원하는 노인이 적잖다. 젊은 시절 약사로 활동했던 80대 최귀패 씨는 영어회화 공부를 시작했다. 80대 후반 이정순 씨는 서양화를 배운다.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사회활동에 참여하는 방법으로 ‘배움’을 선택한 것이다.

    경기 수원의 실버타운 ‘삼성노블카운티’ 조성준 대리는 “입주자끼리 모임을 만들어 같이 운동하고 미술관이나 음악회에 가는 일도 흔하다. 은퇴했다고 사회와 동떨어져 지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여유 시간을 활용해 더 많이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게 요즘 어르신들의 특징”이라며 “그 덕분에 연세가 드실수록 오히려 더 건강해지는 분이 많다”고 했다. 건강심리학의 세계적 권위자인 하워드 프리드먼 교수와 레슬리 마틴 교수가 함께 펴낸 책 ‘나는 몇 살까지 살까?’(The Longevity Project)에 따르면 젊은 시절 덜 활동적이었지만 이후 활동성이 증가해 노년에도 그 상태를 유지한 사람이 가장 오래 살았다. 70세 이상의 절반 가까이가 체육관에 등록해 정기적으로 운동하는 일본의 경우, 70대의 체력이 10년 전에 비해 크게 좋아졌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노년에도 일과 운동, 사회적 관계 맺음을 중단하지 않는 지금의 80, 90대가 머잖아 ‘100세 현역’이 되면 장수에 대한 공포도 사라지지 않을까.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