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45

2014.07.07

아베, 자위대 전쟁 나가는 길 ‘원맨쇼’

일본 ‘집단적 자위권’ 허용 각의 결정 막전막후 인물들

  • 박형준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 lovesong@donga.com

    입력2014-07-07 11: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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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편의 영화가 끝났다. 지난해 말부터 일본 국내외를 뜨겁게 달구다 7월 1일 비로소 매듭을 짓게 된 아베 내각의 ‘집단적 자위권’ 추진 과정은 그야말로 한 편의 영화와 다름없었다. 감독 겸 주연은 아베 신조 총리였고, 나머지 인물은 사실상 들러리였다. 히든카드 구실을 기대했던 공명당의 야마구치 나쓰오 대표도 힘을 쓰지 못했다.

    집단적 자위권은 다른 나라가 공격받을 때 자국이 공격받은 것으로 간주해 반격할 수 있는 권리다. 대부분 나라는 이 권리를 갖고 있지만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헌법상 집단적 자위권을 갖지 못했다. 전수방위(專守防衛·적의 공격을 받았을 때만 방위력을 행사) 원칙 때문이었다.

    그러나 7월 1일을 기준으로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아베 내각이 각의(국무회의)를 통해 헌법 해석을 바꿔 집단적 자위권을 허용함으로써 일본이 다른 나라에 가서 전쟁을 벌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관되게 유지돼온 전수방위 원칙도 사실상 폐기됐다. 그간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처리 과정을 인물 중심으로 되짚어봤다.

    # 감독 겸 주연, 아베 총리

    아베 총리는 2012년 12월 집권하자마자 ‘개헌’ 카드를 빼들었다. 일본이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소위 ‘보통국가’가 되려면, 미국 의지대로 만들어진 헌법을 일본인의 손으로 바꿔야 한다는 게 기본 논리였다. 개헌을 위해서는 국회 중의원과 참의원 각각 3분의 2 이상이 발의해야 한다. 2012년 12월 중의원 선거로 연립여당인 자민당과 공명당은 3분의 2 의석을 차지했다. 지난해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연립여당은 3분의 2까지 미치지는 못했지만 반수를 훌쩍 넘는 의석을 확보했다. 아베 총리는 내심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여론 반대가 거셌다. 헌법 개정의 핵심은 전쟁과 교전을 금지한 9조다. 9조를 바꾸면 전쟁에 휘말릴 가능성이 커지므로 국민 여론이 반대로 기울어진 것이다. 그러자 아베 총리는 개헌을 뒤로 미룬 채 집단적 자위권 이슈를 꺼냈다. 지난해 총리 직속 자문기구인 ‘안전보장 법적 기반 재구축에 관한 간담회’를 출범해 집단적 자위권을 허용할지 말지에 관해 논의하도록 했다.

    아베 총리가 구성원을 뽑은 이 사적인 기구가 어떤 결론을 내릴지는 시작부터 뻔했다. 국제사회에 더 큰 기여를 하려면 ‘집단적 자위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간담회는 5월 15일 최종 보고서를 총리에게 제출했다. 아베 총리의 진면목이 발휘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먼저 그는 연립여당에게 집단적 자위권 협의를 부탁했다. 헌법 개정뿐 아니라 집단적 자위권에 대해서도 찬성보다 반대 여론이 더 높게 나오자 아베 총리는 어떻게든 국회에서 논의하는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하지만 여당 협의 역시 결론이 뻔했다. 최대 정당인 자민당 총재가 곧 아베 총리이다 보니 그의 뜻대로 결론을 내려놓고 형식적으로 협의를 진행할 뿐이었다. 결국 연립여당은 7월 1일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대한 헌법 해석 개정에 합의했다. ‘무력행사 3요건’이라는 것을 만들어놓고, 그 요건이 충족된다면 자위대가 어느 나라에 가서든 전쟁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그날 오후 임시 각의에서 집단적 자위권이 허용됐다. 아베 총리의 뜻에 따라 논의가 시작돼 아베 총리의 손에 의해 마침표가 찍힌 셈이다.

    # 들러리, 연립여당 부대표들

    아베 총리가 “집단적 자위권을 논의해달라”며 연립여당에 부탁한 날짜는 5월 15일이었다. 이날 이후 자민당과 공명당은 협상팀을 꾸려 토론에 나섰다. 자민당에선 고무라 마사히코 부총재가, 공명당에서는 기타가와 가즈오 부대표가 협상팀 대표를 맡았다.

    애초 공명당은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신중했다. “국민적 반대가 심하다” “개별적 자위권으로 해결할 수 있다” “각 사안에 대해 충분히 시간을 갖고 검토하겠다” 등의 의견을 밝힌 바 있다. 논의 초기 아베 총리는 “집단적 자위권 논의
    아베, 자위대 전쟁 나가는 길 ‘원맨쇼’

    야마구치 나쓰오 대표

    에 정해놓은 마감 시간은 없다”며 충분한 여당 협의를 독려했다. 하지만 여당 협의가 지리멸렬해질 때면 고무라 부총재를 총리 관저로 불러 “결정해야 할 때는 반드시 결정해야 한다”며 공명당을 간접적으로 채근했다.

    자민당 내부에선 “연립여당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강경 발언도 나왔다. 공명당이 집단적 자위권뿐 아니라 개헌에서도 신중한 자세를 보이는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러자 공명당의 발언 취지도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급기야 6월 24일 협의에서는 큰 틀에서 집단적 자위권 허용에 찬성한다는 뜻을 표시했다. 결국 7월 1일 11번째 회의에서 공명당은 집단적 자위권 허용에 합의하기에 이른다.

    # 존재감 없는 히든카드, 야마구치 대표

    아베, 자위대 전쟁 나가는 길 ‘원맨쇼’

    야나이 순지 전 주미대사.

    야마구치 나쓰오 공명당 대표는 집단적 자위권 논의에서 공명당의 히든카드였다. 협상팀장으로 그가 나서지 않은 것도 마지막 보루 구실을 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초창기 야마구치 대표의 발언은 강경했다. “연립정권 합의서에 적혀 있지 않은 주제(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정치적 에너지를 쏟는 것은 국민이 기대하지 않는 것”(5월 13일), “집단적 자위권 협의는 계속 논의되는 사안으로 간단치 않다. 논의를 끝까지 해 결과를 내겠다”(6월 10일) 등이 대표적인 예다.

    하지만 아베 총리의 위세에 야마구치 대표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10년 이상 자민당과 연립해온 공명당은 자민당 지원 없이 선거를 치르기 벅찬 상황이었다. 야마구치 대표는 6월 26일 기자회견에서 집단적 자위권 행사의 전제조건인 ‘무력행사 3요건’에 대해 “지금까지의 헌법 해석과 일관성을 지니고 제동 기능도 갖고 있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허용 의지를 공개적으로 밝힌 것이다.

    # 숨겨진 주인공, 외무성 국제법국 출신들

    일본 외무성 국제법국(옛 조약국) 출신들은 아베 총리의 브레인을 맡아 집단적 자위권 강행 처리의 막후 구실을 했다. 아베 총리의 외교책사로 꼽히는 야치 쇼타로 국가안보국장(1999∼2001년 조약국장 역임)을 비롯해, 가네하라 노부카쓰 내각관방 부장관보(2012년 8∼12월 국제법국장 역임), 집단적 자위권 정부 입장의 초안을 마련한 안보법제간담회의 좌장인 야나이 순지(걸프전 당시 조약국장)가 바로 그들이다.

    애초 아베 총리는 ‘헌법 개정’도 하나의 선택지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 경우 헌법 개정의 엄격한 요건으로 집단적 자위권 허용은 쉽지 않다. 하지만 가네하라 부장관보 등이 아베 총리를 잇달아 설득했다. 국회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고 아베 총리에 대한 국민적 지지도가 높으므로 ‘헌법 해석 개정’으로 손쉽게 집단적 자위권을 통과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들의 주장대로 결론이 났다.

    ‘아사히신문’은 외무성 국제법국 출신 인사들이 이처럼 ‘매파’ 구실을 한 이유에 대해 1991년 걸프전 때의 ‘트라우마’가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당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라 다국적군이 꾸려졌을 때, 헌법 해석상 일본은 다국적군에 참여하지 않았고 그 대신 130억 달러라는 거금만 제공했다. 하지만 미국 등으로부터 “돈만 내려 하느냐”는 비판을 받게 된 것. 이후 이들 국제법국 출신 간부들은 세계 3위 경제력에 부합하는 국제사회 내의 존재감을 인정받으려면 자위대의 해외 활동 범위를 넓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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