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40

2014.06.02

톈안먼 무력 진압 맞선 ‘탱크 맨’ 호텔방 발코니서 찰칵~ 찰칵

톈안먼 사태 25주년 홍콩 언론 잇따라 비화 공개

  • 구자룡 동아일보 베이징 특파원 bonhong@donga.com

    입력2014-06-02 13: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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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톈안먼 무력 진압 맞선 ‘탱크 맨’ 호텔방 발코니서 찰칵~ 찰칵

    촬영자인 제프 와이드너의 최근 모습.

    1989년 6월 4일 중국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던 대학생과 시민을 계엄군이 유혈 진압한 ‘톈안먼 사태’가 올해로 25주년을 맞는다. 유럽과 미국은 당시 6·4 사태를 반인권적 조치로 보고 중국에 대한 무기 금수조치를 내렸으며, 이는 아직까지도 풀리지 않고 있다.

    그사이 중국은 세계 제2 경제대국으로 부상했지만 6·4 사태는 여전히 중국에게 큰 멍에이자 ‘역사적 부담’이다. 매년 6·4 기념일이 다가오면 중국 안팎의 민주화 운동가와 단체들은 성명 발표 같은 활동에 들어가고, 중국 당국은 긴장한다. 올해는 홍콩 언론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비화들이 잇따라 소개되는가 하면, 톈안먼 사태로 실각한 전 중국공산당 총서기의 아들이 처음 입을 여는 등 어느 해보다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미국 대학생 커크 마첸의 방

    한 청년이 맨몸으로 탱크 4대를 막아선 모습. 톈안먼 사태의 대표적 이미지로 남은 이 사진은 1989년 6월 5일 베이징 중심가 창안제(長安街)에서 AP가 촬영해 전 세계로 타전했다. 이를 찍은 사진기자 제프 와이드너(58)는 5월 27일자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뒷얘기를 소개했다.

    중국군의 무력 진압이 시작된 이튿날, 그는 톈안먼 광장이 더 잘 내려다보이는 곳을 찾아 창안제에 있는 베이징 호텔로 달려갔다. 호텔은 경비가 심했다. 우연히 만난 미국 대학생 커크 마첸에게 AP 기자라고 밝히자, 그는 자신의 6층 방에 들어가게 해줬다. 역사적인 사진은 이 방 발코니에서 촬영됐다.



    탱크 소리가 들리는 긴박한 상황에서 와이드너는 필름이 없는 것을 뒤늦게 알고 마첸에게 필름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방 밖으로 나간 마첸은 2시간가량 뒤 돌아왔다. 그는 호텔 로비에서 관광객을 설득해 ‘100 ISO 후지필름’ 한 통을 받아왔다. 마첸은 사진을 찍은 필름을 호텔 밖으로 빼돌리는데도 결정적 구실을 했다. 와이드너가 찍은 ‘탱크 맨’ 사진을 속옷 안쪽에 숨긴 채 오토바이를 타고 달려가 주중 미국대사관에 전달한 것이다.

    현재 독일에서 프리랜서 사진가로 활동하는 와이드너는 6월 4일 홍콩 빅토리아 공원에서 열리는 톈안먼 사태 25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자기 경험 등을 밝힐 예정이다. 그는 당시 긴박했던 순간을 돌아보면서 “단순히 셔터를 누르는 것 이상의 용기와 용감한 사람의 도움이 있어 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탱크 맨’의 정체는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다. 1989년 당시 ‘탱크 맨’은 탱크를 가로막다 위로 올라가 병사와 몇 마디 나눈 뒤 주위에 있던 군중 몇 명에게 이끌려 현장을 떠났다. 탱크는 다시 전진했다. 영국 ‘선데이 익스프레스’가 그의 이름을 ‘Wang Weilin(왕웨이린)’이라고 보도한 뒤 중화권 매체가 ‘王維林’이라고 표기하지만 실제 이름과 신분, 거처는 지금도 확인되지 않고 있다.

    최근 SCMP는 톈안먼 사태 후 중국 대륙에서 수백 명의 반체제 인사를 탈출시킨 이른바 ‘참새(黃雀) 작전’과 그 작전에서 ‘타이거’라는 암호명으로 큰 활약을 한 사업가도 소개했다. 노동교화소에서 6년을 보냈고 6·4 사태 때 시위선동 혐의로 4개월간 투옥됐던 유명 화가 가오얼타이(高爾泰)도 ‘타이거’ 덕에 자유를 찾은 사람 중 한 명이다. 당시 쓰촨푸퉁(四川普通)대에 재직하던 그는 항상 자유에 대한 갈망을 갖고 있다, 1992년 어느 날 몇 달 먼저 홍콩으로 탈출한 동료 작가에게 탈출 의사를 담은 메시지를 보냈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 뜻밖에도 홍콩에서 온 한 젊은이가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대학 측은 원래 출입자의 신분증을 일일이 검사했지만, ‘타이거’는 폭우가 쏟아질 때 우산을 눌러쓰고 과감하게 진입했다. 사흘간 떠날 채비를 한 가오 부부와 ‘타이거’는 자정 무렵 학교를 빠져 나와 택시를 타고 청두에서 충칭, 우한을 거쳐 광저우로 이동했으며, 이후 후이둥을 거쳐 홍콩에 도착했다.

    가오는 SCMP에 “타이거 같은 이들이 당시 보여준 영웅적 행위가 역사에 기록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홍콩에서 건어물을 판매하는 평범한 사업가인 ‘타이거’는 이름과 나이 등을 공개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에는 몇 사람 구출한 뒤 사업에 복귀하려 했으나, 대신해줄 사람이 없어 그만둘 수 없었다”고 밝혔다.

    ‘참새 작전’은 톈안먼 사건 직전 홍콩에서 결성된 홍콩시민지원애국민주운동연합회(지련회)의 주축으로 추진됐다. 지련회는 우얼카이시(吾爾開希)와 차이링(柴玲) 등 톈안먼 민주화운동 당시 학생지도자 등 500여 명의 탈출을 도운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작전은 1997년까지 계속됐다. 지련회는 홍콩으로 탈출한 많은 반체제 인사가 미국이나 유럽 등으로 망명할 수 있도록 노력도 기울였다.

    자오쯔양 아들 명예회복 선언

    톈안먼 사태 25주년을 맞아 가장 눈에 띄는 사건은 자오쯔양(趙紫陽) 전 총서기의 막내아들 자오우쥔(趙五軍)이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입을 연 일이다. 중국 정치 풍토에서는 극히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 자오우쥔은 자오 전 총서기가 공식적으로는 마지막으로 얼굴을 드러낸 1989년 5월 19일로부터 정확히 25년이 지난 날 홍콩 언론과 인터뷰를 가졌다.

    자오 전 총서기는 1989년 5월 19일 새벽 당시 원자바오(溫家寶) 중앙판공청 주임(훗날 총리) 등과 함께 시위가 벌어지던 톈안먼 광장을 찾아가 메가폰을 들고 “우리가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하다. 젊은이들은 희생을 막기 위해서라도 시위를 풀고 돌아가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이튿날 계엄이 선포되고 자오는 23일 모든 직위를 박탈당했다. 이후 그는 사망 때까지 16년간 가택연금을 당했으며, 중국의 모든 공식 문서에서 이름이 사라졌다. 거명 자체가 금기가 된 것이다.

    자오우쥔은 “아버지가 자신의 몰락보다 중국 운명에 더욱 가슴 아파했다”고 말했다. 정치 개혁이 무산된 뒤 부패문제가 심각해져가는 것을 크게 염려했다는 설명이다. 그의 실각 이후 언론자유나 당정 기능 분리 같은 정치 개혁안은 모두 중단됐다. 2009년 ‘국가의 죄수’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자오의 사후 자서전에는 법치, 당정 분리, 당과 국가기구의 투명한 운영, 사회에 대한 당의 개입 축소, 비정부기구의 폭넓은 국정 참여 등 다양한 개혁 구상이 담겨 있다. 자오우쥔은 인터뷰에서 “1980년대 총서기까지 지낸 인물을 마치 중국 역사에서 없었던 것처럼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라며 “이런 역사를 바로잡지 않으면 후세에 부끄러운 유산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매년 홍콩에서 톈안먼 시위를 추모하는 촛불집회를 주도한 지련회는 4월 26일 홍콩 주룽반도 침사추이의 한 사무용 건물 5층에 74㎡ 넓이의 ‘6·4기념관’을 개관했다. 기념관에는 서류와 책, 마이크로필름 등 톈안먼 시위와 관련된 자료 수백 점이 전시됐다. 기념관 중앙에는 시위 당시 학생들이 톈안먼 광장에 세웠던 조각상을 본뜬 ‘민주 여신상’이 설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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