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35

2014.04.28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별 지다

현대문학계 선구자 4월 17일 타계…‘마술적 사실주의’‘스토리텔링’기법 남겨

  • 송병선 울산대 스페인중남미학과 교수 avionsun@daum.net

    입력2014-04-28 11: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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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별 지다
    우리가 세월호 침몰 사건으로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져 있던 4월 17일 성목요일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라는 세계 문학의 별이 졌다. ‘20세기의 세르반테스’라고 불리는 그는 스페인어권의 가장 위대한 작가였고,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현대 예술 사조의 선구자이자 최고봉이었다. 그는 유명 운동선수나 영화배우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리며 세계 독자를 사로잡았고 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은 작가였다. 그러나 그가 원하던 것은 인기나 명예가 아니었고, 노벨 문학상도 아니었으며, 불후의 명작을 쓰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는 친구들에게 더 많은 사랑을 받으려고 글을 쓴 작가였다.

    가르시아 마르케스(가르시아는 아버지 성, 마르케스는 어머니 성으로 외국에선 흔히 이 두 가지를 같이 쓴다. 애칭은 ‘가보’)는 소나기가 퍼붓던 1927년 3월 6일 일요일, 콜롬비아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아라카타카라는 마을에서 11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작품에서 이 마을은 끊임없이 폭우가 내려 홍수가 나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카리브 해 지역으로 그려진다. 가보는 귀신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그를 떨게 하던 외할머니 트랑킬리나 이구아란 코테스, 그를 서커스에 데려가고 끊임없이 내전 이야기를 들려주던 외할아버지 니콜라스 마르케스 이구아란의 보호를 받으며 10년 동안 이곳에서 산다.

    친구들에게 사랑받으려고 쓴 글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아라카타카는 ‘백년의 고독’에서 마콘도라는 상상의 마을로 등장하고, 외할아버지와 함께 살던 집은 이 작품에서 중심 무대가 된다. 또한 외할아버지는 그의 작품 세계 전반에 등장하는 대령들의 일화들을 들려주는데, 예를 들어 ‘낙엽’에서 손자의 기억에 등장하는 대령,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 속 대령,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 심지어 유령과 같은 족장 등으로 구체화된다. 한편 외할머니는 그 지역에 전해오는 귀신 이야기를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들려주곤 했다.

    열두 살 때 가보는 보고타 근교에 있는 시파키라 국립 기숙학교에서 장학금을 받는다. 후에 그는 시파키라를 음산하고 추우며 멀리 떨어진 안데스 산맥에 자리한 마을로 그린다. 이 시절 그는 쥘 베른, 에밀리오 살가리, 알렉상드르 뒤마 등의 작품을 섭렵했고, 유명한 시인인 에두아르도 카란사의 지도 아래 시 세계에 입문한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노란 나비와 미녀 레메디오스 등이 바로 이때의 시적 이미지에서 유래한다. 그 후 1947년 콜롬비아국립대에 입학해 법학을 공부한다. 그해 첫 번째 단편 ‘세 번째 체념’이 ‘엘 에스펙타도르’ 신문에 게재된다.



    1948년 4월 9일 보고타에서 자유당과 보수당 간 정치 투쟁인 ‘폭력 사태’가 일어난다. 콜롬비아국립대는 휴교하고, 가보는 당시 자신의 가족이 살던 카르타헤나로 옮겨 ‘엘 우니베르살’ 신문의 기자로 일하기 시작한다. 50년 그는 보고타에서 알고 지냈던 플리니오 아풀레요 멘도사의 주선으로 평생 친구가 될 사람들을 바랑키야에서 만나게 된다. 그들은 알폰소 푸엔마요르, 알바로 세페다 사무디오와 헤르만 바르가스다. 또한 스페인의 프랑코 독재로부터 도망 나온 스페인 대학의 교수이자 ‘카탈루냐의 현자’로 불리던 라몬 비녜스도 만난다. 이들은 모두 ‘백년의 고독’ 후반부에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이들은 소위 ‘바랑키야 그룹’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당시 주변 문학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던 대서양 해안 문학의 진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1954년 가장 친한 친구인 알바로 무티스는 가보에게 보고타로 돌아가 엘 에스펙타도르 신문에서 일하라고 권유하고, 그곳에서 가보는 훌륭한 취재기사로 콜롬비아의 유명 언론인으로 자리 잡는다. 이런 경험은 나중에 그가 작가로 변신하는 데 큰 구실을 하게 된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후 보고타에서 그의 첫 번째 소설이자 포크너의 영향이 다분히 보이는 ‘낙엽’이 출간된다. 출간 직후 그는 엘 에스펙타도르의 유럽 특파원으로 로마로 건너가 ‘로마 영화 실험 센터’에서 공부한다.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별 지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고향인 콜롬비아 아라카타카 거리 벽화에 그가 한 말이 적혀 있다. ‘나는 모든 라틴아메리카 국가의 시민이라고 느끼지만, 내 고향 아라카타카의 향수를 절대 버릴 수 없습니다. 어느 날 나는 그곳으로 돌아와 현실과 향수 사이에 내 작품의 원재료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피델 카스트로와 남다른 인연

    가보가 프랑스 파리에 있을 때 콜롬비아에 군사 독재체제가 들어서면서 엘 에스펙타도르는 폐간됐고, 그는 일자리를 잃게 된다. 파리에서 가난에 찌든 힘든 기간을 보내며 그는 중편 대작으로 꼽히는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를 집필한다. 하지만 이 작품을 쓰기 전 이미 그는 머릿속으로 다른 소설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 작품은 출처가 불분명한 전단지가 퍼져 주민 사이에 중상모략과 험담을 야기하고, 결국 마을을 혼란에 빠뜨린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 소설은 1962년 ‘불행한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다. 그런데 이 소설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한 작중 인물이 강력히 부상한다. 그가 다름 아닌 대령이고 가보는 이 대령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를 먼저 집필해 58년 잡지 ‘신화’에 게재한다.

    1960년 그는 아바나를 방문해 쿠바 혁명 정권이 세운 ‘프렌사 라티나’ 통신사에서 일하면서 피델 카스트로와 친해진다. 그와의 우정은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 그리고 61년 그가 제2 조국이라고 부르는 멕시코에 정착해 알바로 무티스를 다시 만나고, 그곳에서 시나리오 작가이자 언론인 생활로 생계를 영위한다. 62년 이후 그는 아무 작품도 출간하지 않는다. 그는 이 침묵의 기간을 작가로서 성숙해지기 위한 시간으로 삼으면서, 그를 일약 세계적 작가로 발돋움하게 만든 ‘백년의 고독’을 쓴다.

    그는 가족과 함께 아카풀코로 운전하며 가는 동안 갑자기 자신이 청년 시절부터 쓰고자 했던 소설 구조가 떠올랐다며 이렇게 고백한다. “매우 완전하게 생각나 거기에서 타자수에게 첫 장의 단어 하나하나를 구술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6개월 정도면 이 소설을 끝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소설을 끝내고 보니 18개월이란 시간이 흘러 있었다고 밝힌다.

    1967년 5월 드디어 ‘백년의 고독’이 출간되면서 그의 삶은 하루아침에 바뀐다. 이 소설은 문학비평가뿐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도 즉시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순식간에 라틴아메리카의 베스트셀러로 자리 잡았고, 유럽 국가는 대부분 망설임 없이 이 소설을 번역, 출간했다. ‘백년의 고독’은 이탈리아에서 키안치아노 상을 탔으며, 프랑스에서는 최고 외국 소설로 결정됐다. 미국 비평계는 이 소설을 70년 최고 소설로 선정했으며, 71년에 컬럼비아대는 가보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한다. 72년 가보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권위 있는 베네수엘라의 로물로 가예고스 상을 수상하는데, 그는 여기에서 받은 상금을 ‘사회주의 운동(MAS)’이라는 좌익 단체에 기증한다.

    ‘백년의 고독’에 세계가 이목을 집중하던 이 시기에 가보는 놀라운 발언을 한다. 그는 “작품이 마무리되면 나는 더는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헤밍웨이가 말했듯이 마무리된 책은 죽은 사자와 같습니다. 다음은 어떻게 코끼리를 사냥하는가의 문제입니다.” 이 말대로 그는 1967년부터 75년까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거주하면서 오래전부터 구상해온 또 다른 소설을 쓰는 일에 전념한다. 그것은 바로 라틴아메리카 독재자에 관한 ‘족장의 가을’로 75년 출간된다. 가보가 자신의 최고 작품으로 꼽는 이 소설은 구체적인 독재자가 아니라, 19세기부터 존재해왔던 여러 독재자의 이미지를 종합해 독재자 원형을 그리고 있다. ‘족장의 가을’을 출간한 후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다시 멕시코로 돌아온다. 그러면서 76년 피노체트가 칠레 권좌에 있는 한 더는 소설을 출간하지 않겠다고 공언한다.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별 지다

    4월 22일 멕시코 멕시코시티 미술궁전에서 열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추도식.

    1982년 노벨 문학상 수상

    1980년까지만 해도 이 약속은 잘 지켜지는 듯했다. 하지만 81년 4월 이 약속을 깨고 그는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를 출간한다. 이 책은 스페인, 아르헨티나, 멕시코, 콜롬비아에서 초판 100만 부를 찍어 라틴아메리카 출판 역사에 신기록을 세운다. 큰 활자로 200쪽이 넘지 않는 이 조그마한 작품은 출간 당시부터 논란 대상이 되면서 독자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한다. 가보는 “거짓된 르포이자 거짓으로 가득 찬 소설이다. 이는 정말로 일어난 범죄 사건을 다룬 거짓된 이야기”라고 이 작품을 평한다.

    1982년 10월 21일 스웨덴 아카데미는 그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가보를 선정했다고 발표한다. 그해 12월에 가보는 스톡홀름에서 ‘라틴아메리카의 고독’이라는 제목의 노벨 문학상 수상 연설문을 읽는다. 여기서 그는 세상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문명화된 유럽의 진보적 지식인에게 더 높고 보편적 차원에서 진리를 찾아달라고 부탁한다. 서양이 라틴아메리카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그는 “우리 현실을 타인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행위는 갈수록 우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갈수록 우리를 덜 자유롭게 하며, 갈수록 고독하게 만드는 데 이바지할 뿐”이라고 단호하게 비판한다. 즉 유럽 지성인에게 자신들의 사회를 재단하는 잣대와는 다른 관점에서 라틴아메리카에 접근할 것을 요구한다.

    이 연설문에서 가보는 자신이 문학 표현 양식뿐 아니라 가공할 만한 현실 때문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고 밝히면서, 자기 작품은 종이 위 현실이 아니라 불행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창조물의 실제 현실이며, 그것이 창작의 샘물이라 상상력을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미국과 유럽 비평가들은 마술적 사실주의를 현실과 환상의 혼합이라고 정의하지만, 이는 라틴아메리카의 현실 자체이며, 라틴아메리카 사람과 그들을 에워싼 세계의 신비로운 관계를 발견하려는 태도라는 것이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후 1984년 초부터 가보는 콜롬비아 카르타헤나에 대한 소설을 쓰는 데 전념하고, 이는 ‘콜레라 시대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85년 12월 출간된다. 이 소설에서 가보는 자기 부모의 일화를 문학 소재로 삼는다. 이 작품은 사랑이 세월의 흐름과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인내 및 헌신적 애정이 행복한 결말로 보상받는다는 멜로드라마 같은 내용을 담았지만, 그 아래로는 라틴아메리카에 관한 강한 비판과 풍자가 숨어 있다. 사랑과 늙음과 질병이라는 주제와 더불어 자살이나 노화 공포증, 근대화, 사회적 책무나 환경문제도 탐구하면서 그가 기존에 보여줬던 마술적 사실주의에서 다소 벗어난다.

    가르시아 마르케스 ‘백년의 고독’ 별 지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콜롬비아 아라카타카에서 거주하던 집. 지금은 가르시아 마르케스 박물관으로 개조돼 있다(위). 가르시아 마르케스와 그의 친구들이 주로 모이던 바랑키야의 라 쿠에바 술집.

    1989년 3월에는 ‘미로 속의 장군’을 출간한다. 이 역사소설은 라틴아메리카 해방자인 시몬 볼리바르를 다룬다. 볼리바르는 여러 정치적 상황으로 보고타에서부터 산타마르타까지 생애 마지막 여행을 떠났지만, 이에 관한 역사적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보는 순전히 상상력만으로 이를 재구성함으로써 역사적 한계를 뛰어넘는다. 그리고 94년에는 5년간의 침묵을 깨고 카르타헤나를 다시 소재로 잡아 ‘사랑과 다른 악마들’을 선보인다. 또한 96년에는 세계적인 마약조직인 메데인 카르텔의 우두머리 파블로 에스코바르가 꾸민 납치 사건을 소재로 ‘납치 일기’를 발표한다.

    한편 2002년에는 자서전 ‘이야기하기 위해 살다’를 출간하고, 2005년에는 일본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잠자는 미녀’로부터 영감을 받아 아흔 살 노인이 십대 젊은 여자를 사랑하는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을 발표한다. 가보의 마지막 작품이 된 이 소설은 진정한 사랑이란 그 어떤 대가도 요구하지 않으며 절대로 잊히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오랜 세월 다양한 경험을 한 어느 노인의 삶에 대한 현재 감정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며, 생애 처음으로 ‘사랑’이란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한 사람의 기록이다.

    가보는 자신이 좋아하던 노란 꽃에 묻혀 역사 속으로 들어가면서 ‘8월에 만나요’라는 소설을 무덤으로 가져갔다. 이 작품은 그가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집필을 마친 후 얼마 안 돼 쓰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이 작품을 여섯 번이나 수정하는 등 자신의 마지막 생을 바쳤다고 한다. 이 작품의 일부를 읽은 편집자는 ‘대작’이라고 평가하지만, 이 소설이 출간될지는 아직 미정이라고 한다.

    가보는 비단 콜롬비아 작가, 혹은 라틴아메리카 작가가 아니라 전 세계의 작가다. 특히 그의 등록상표처럼 돼버린 ‘마술적 사실주의’와 ‘스토리텔링’ 기법은 20세기 후반 세계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1960년대 중반만 해도 세계 문학은 매우 어렵고 실험적인 경향을 띠었고 일반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했다. 하지만 ‘백년의 고독’과 함께 가보가 세계 문학 무대의 전면에 등장하자 그런 현상은 일시에 사라지고 만다. 즉 고전이나 대작이 어렵고 심각한 것만이 아니라, 진지함과 장난의 경계를 허물면서 정치, 사회, 경제 문제들을 문학적 상상력과 결합해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것임을 일깨워줬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토니 모리슨, 조제 사라마구, 귄터 그라스를 비롯해 살만 루슈디, 로버트 쿠버, 존 바스, 밀란 쿤데라 등은 바로 가보의 후계자다.

    상상이 때로는 현실보다 정확

    그의 ‘마술적 사실주의’는 현실이 상상을 뛰어넘고 상상이 때로는 알려진 현실보다 더 정확하다는 점에 바탕을 둔다. 세월호 침몰을 비롯해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등 일련의 사건은 우리 현실도 마술적 사실주의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가보는 3월 6일 자신의 87번째 생일에 집 앞으로 나와 기자들에게 인사하면서 생일 축하노래를 불렀다. 그게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가 자서전에서 말했듯, 삶은 한 사람의 생애 그 자체가 아니라, 현재 그 사람을 어떻게 기억하고 어떻게 이야기하느냐는 문제다. 이제 그의 육신은 사라졌지만, 우리가 그의 작품을 계속 읽고 그를 기억하며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는 언제까지나 살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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