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15

2013.12.02

핫바지 아닌 ‘충청벽해’ 시대

인구와 지역총생산 등 ‘영충호’로 그 비중과 위상 변화

  • 이기진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doyoce@donga.com

    입력2013-11-29 17: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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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핫바지 아닌 ‘충청벽해’ 시대

    2012년 7월 2일 충남 연기군 세종시민체육관에서 열린 세종특별자치시 출범식. 17번째 광역자치단체 출범과 정부청사 이전 등으로 충청권 인구유입이 가속화됐다.

    1995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대전 지역의 한 일간지 1면에 주목할 만한 머리기사가 실렸다. ‘김윤환 총장, 충청도 핫바지 발언 논란’이라는 내용이었다.

    1995년 1월 ‘김종필(JP) 신당설’이 나돌 무렵 김윤환 당시 정무장관은 한 기자가 “충청당이 생기면 보수적 정서로 볼 때 대구·경북과도 통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묻자, “대구·경북이 핫바지냐”고 받아넘겼다고 한다. 그런데 이 말이 대전의 한 지역 언론에 ‘김 장관 충청도 핫바지 발언 물의’라는 식으로 보도됐고, 이에 JP는 충청도민에게 “우리가 핫바지유?”라고 말했다. 분기탱천한 충청도민은 그해 지방선거와 96년 총선에서 자유민주연합(자민련)에 몰표를 던져 그 위력을 보여줬다는 게 정우택 새누리당 최고위원의 설명이다.

    이 말은 진위 여부와 상관없이 지역감정에 호소하는 정치인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며 충청도민의 공분을 샀다. 지역감정에 불이 붙었고 결국 민주자유당(민자당)은 그해 지방선거와 이듬해 총선 결과 특히 충청권에서 참패했다.

    통계로도 이미 영남>충청>호남

    당시 보도에 대해 김 총장은 왜곡됐다며 뒤늦게 해명에 나섰지만, 충청권에선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당시 상황을 지켜본 지역 정치부 기자들은 “지역 출신 정치인들이 충청도민의 감성에 호소해 상처가 더욱 깊어졌다”며 “자민련은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하는 분위기였다”고 회고했다.



    18년이 지난 지금은 어떨까. 누군가가 ‘충청도 핫바지’ 운운한다면 당시처럼 집단적으로 격앙하고 공분을 느낄까, 선거 향방을 가를 만큼 민심이 폭발할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당시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는 게 일반적 시각이다. 지역 대학의 한 정치학 교수는 “‘핫바지’를 ‘핫바지’라고 한다면 자존심이 상할지 모르지만 핫바지가 아닌데도 그런 표현을 쓴다면 그냥 웃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석했다.

    당시만 해도 충청권은 영호남에 비해 소외감과 홀대감이 워낙 높았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30년 이상의 ‘TK(대구·경북), PK(부산·경남)정권’에서 충청도는 한 번도 대접받아 본 적 없다는 게 일반적인 정서였다. “부산, 대구만 가면 도로가 팡팡 뚫렸더라. 그런데 충청도는 뭐냐”는 자조 섞인 목소리가 많았다. 그러니 ‘충청도도 독자정당을 꾸려 정치집단을 만들어보자’는 자민련 창당 움직임과 관련한 김윤환 전 장관의 ‘핫바지’ 발언은 그야말로 기름 위에 불쏘시개를 꽂은 격이었다. 이후 ‘충청도가 핫바지’라는 얘기는 딱 한 번 있었다.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던 신행정수도(세종시) 건설 계획이 이명박 정부 들어 백지화 또는 축소 방향으로 가닥이 잡히자 세종시를 비롯한 충청도민은 국회와 청와대 등에서 연일 시위를 벌였다. 당시 등장한 플래카드에 적힌 문구가 바로 ‘충청도 핫바지는 한 번으로 족하다’ ‘충청도민은 더는 핫바지 소리를 듣지 말자’였다. 이후 충청도는 핫바지는커녕 전국 지방에서 가장 비전 있고 꿈이 있는 땅으로 변신 중이다.

    수도권 소재 한 기획사 관계자는 “예전에는 외국 유명가수나 예술단이 방한하면 서울, 부산, 대구, 광주를 순회공연했는데 요즘에는 서울, 부산, 대전 또는 대구 공연을 기획한다”고 말했다. 광주보다 대전 인구가 많고, 모객(募客)도 훨씬 용이하기 때문이라는 것. 그는 “미처 서울 공연을 보지 못한 경기 남부와 충북, 전북 지역민이 거리가 가까운 대전 공연으로 몰리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요즘 대전 갤러리아, 롯데백화점은 명품 브랜드 판매율이 예전보다 훨씬 높아졌다. 미국 뉴욕과 유럽, 일본 등 다양한 국가의 패션브랜드를 접할 수 있는 브랜드도 주목받는다. 백화점 관계자들은 “정부대전청사와 정부세종청사 입주로 유명 브랜드 선호층이 늘어난 데다, 대전·충청 지역 주민의 소득 수준이 다른 곳보다 높아진 것도 한 원인”이라고 해석했다.

    세종시 출범, 지방 균형과 충청권 발전

    핫바지 아닌 ‘충청벽해’ 시대

    1996년 3월 29일 자유민주연합의 충북 제천시 정당연설회에서 김종필 당시 총재가 안영기 후보와 손을 마주 들고 청중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최근에는 ‘영충호’라는 말이 언론에 등장한다. 이시종 충북도지사는 8월 ‘이젠 영충호 시대’라는 보도자료를 통해 “5월 이후 충청권 인구가 호남권 인구를 추월해 과거 영호남 중심의 지방구도가 이젠 영충호(영남·충청·호남)로 바뀌게 됐다”고 말했다. 충청권의 비중과 구실이 그만큼 커졌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후 ‘영충호’라는 말은 네이버, 다음 등 주요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신조어로 등록되는 등 빠르게 확산됐다.

    ‘영충호’라는 말의 등장은 충청권 인구가 호남권 인구를 추월한 것이 가장 직접적인 발단이다. 안전행정부에 따르면 10월 말 기준 충청권 4개 시도 인구수(주민등록 기준)는 대전 153만2456명, 충남 204만5203명, 충북 157만1704명, 세종 11만8745명 등 526만8108명. 이는 광주 147만3576명, 전남 190만5627명, 전북 187만1776명 등 호남권 525만979명보다 1만7129명이나 많은 수다.

    건국 이래 충청권 인구가 호남을 처음 추월한 시점은 5월 말이었다. 당시 충청권 인구는 호남권보다 408명 많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격차가 빠른 속도로 벌어지고 있다.

    사실 대전 인구가 광주를 추월한 것은 이미 오래전이다. 하지만 광주가 지니는 역사적, 정치적 상징성과 비중 때문에 대전은 늘 광주 다음이었다. ‘영충호’라는 말은 어쩌면 인구뿐 아니라 경제적 비중에서도 비롯됐을지 모른다. 지역경제 수준의 차이가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호남권의 지역내총생산(GRDP)이 2003년 75조2970억 원에서 2011년 126조4990억 원으로 늘어난 사이, 충청권은 2003년 81조1030억 원에서 2011년 151조4400억 원으로 불어났다. 이 기간 충남의 지역경제성장률은 천안·아산 지역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부문의 성장, 서산·태안·당진 지역의 제철을 비롯한 굵직굵직한 기업들이 견인해 9.4%에 달했다. 2%대인 서울, 부산을 압도한 전국 최고 수준이며, 중국 경제성장률(10.0%)과도 비슷한 수준이다. 인구로나 경제적 비중으로나 충청권이 호남권을 앞지르는 것이다.

    세종시 출범은 ‘영충호’라는 말을 나오게 한 방점이다. 세종시에는 국무총리실과 기획재정부, 국토해양부, 농림축산부가 이전한 데 이어 12월부터 교육부, 산업통상자원부, 보건복지부, 문화체육관광부, 고용노동부, 국가보훈처 등 6개 정부부처와 한국개발연구원 등 국책연구기관이 2단계로 이전한다. 2단계 이전 공무원만 5000명이 넘는다.

    요즘 세종시에서는 “일주일 만에 집 밖으로 나오면 길을 잃는다”는 말까지 나온다. 그만큼 세종시에 집중 투자가 이뤄지고 사회기반시설이 빠르게 조성되면서 주변이 눈에 띄게 달라지고 있다는 뜻이다. 유한식 세종시장은 “세종시가 제2 행정수도로서의 면모를 나날이 갖춰간다”며 “세종시가 수도권 과밀 해소와 국가 균형발전을 이끄는 견인차 구실은 물론, 충청권 위상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고 말했다.

    세종시는 단지 중앙부처의 지방 이전이라는 측면을 넘어 충청권 파워에 엄청난 힘을 불어넣고 있다. 세종시와 가까운 대전 유성구 노은동과 지족동 일대 음식점은 연일 북새통을 이룬다. 세종시 주변인 옛 충남 연기군과 공주시 장기면 일대는 편의시설이 미흡하기 때문이다. 대전 유성구 도룡동의 대형 회의시설인 대전컨벤션센터는 이미 내년 상반기까지 예약이 마무리된 상태다. 평균투숙률 50% 안팎이던 유성구 지역 호텔 역시 80%를 넘어섰고 주말과 휴일에는 방을 구하기조차 힘들다.

    수요에 비해 공급이 모자라자 아파트 전월세와 물가도 치솟고 있다. 고속성장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회 전반의 ‘인플레이션’ 현상이 경제 분야는 물론, 사회·문화 부문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서울 강남권 학부모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P어학원은 최근 세종시 인근의 유성구 노은동에 새로운 지점을 냈다. 병·의원들도 세종시에 가까운 지역에 잇달아 개원하고 있다.

    세종시에서 승용차로 10분 거리인 유성구 지족동의 한 카페 여주인은 “예전 손님들 얘기를 귀동냥하면 사업 또는 직장, 가정 얘기가 많았지만 요즘에는 ‘예산’ ‘국회’ ‘청와대’ 같은 단어들도 들린다”며 “손님 물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즉, 정부세종청사 공무원들이 종종 가게에 들르면서 ‘노는 물’이 달라졌다는 것. 대전 한 중학교의 이모(31) 여교사는 “미혼인 친구들은 좋은 신랑감으로 공무원을 선호하는데, 그것도 지방공무원이 아닌 중앙부처 공무원”이라고 말했다.

    대전 유성문화원의 한 관계자는 “중앙부처 이전과 공무원 및 그 가족의 이전은 단지 인구증가뿐 아니라 지역 문화 수준과 생활, 사고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해석했다.

    염홍철 대전시장은 “이제 대전은 단순히 지방에 있는 광역시가 아니라 국토의 중심, 행정과 과학, 군사 중심도시로 우뚝 섰다”고 평가했다. 그는 또 “전국 시도지사 회의 등에 참석하면 ‘대전은 가질 것 다 가진 것 아니냐’는 부러움 섞인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고 했다.

    핫바지 아닌 ‘충청벽해’ 시대

    충남 아산시 탕정면 삼성전자 공단 전경.

    정치지형 변화에 촉각

    충청권 인구증가에 가장 먼저 정치권이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국회의원 정수다. 정우택 최고위원(충북 청주 상당)은 “충청권 인구가 호남권보다 많은데 국회의원 수는 5명이나 적다”며 헌법소원 심판청구를 냈다.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대전, 충남, 충북, 세종시 후보군들도 이 문제를 잇달아 제기한다. 박성효 새누리당 의원(대전 대덕) 등 충청권을 중심으로 한 국회의원 17명은 시도별 인구수에 따른 의원 배정 등을 담은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공동 발의하기도 했다.

    김영호 배재대 총장은 “충청권의 국회의원 증원 필요성은 인구수 등 등가성원칙에 의하면 그 근거가 충분하다”며 “나라 전체를 놓고 다시 획정하는 게 원칙에 맞는다”고 했다.

    충청권 광역자치단체장들도 과거와는 사뭇 다른 위상을 누리는 듯하다. 염홍철 대전시장, 안희정 충남도지사, 이시종 충북도지사, 유한식 세종시장은 충청권 행정협의회를 여느라 자주 만난다. 수도권 규제 완화 등에 공동 대응하는 모습을 취하지만 충청권을 새로운 국가 메트로폴리스로 꾸려가겠다는 속내가 있다. ‘충청도의 주인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생각으로 헤게모니를 쥐려는 것이다. 정우택 최고위원이 내년 6·4 지방선거 때 ‘소통령’인 서울시장 출마 가능성을 내비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충청권 광역자치단체장들은 충청권 국회의원 정수 문제도 거들며 현역의원들을 측면 지원하고 있다.

    염 대전시장은 “앞으론 영남, 호남, 충청이 3대 축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했고, 안 충남도지사도 “충청권이라는 큰 시야를 갖고 지역문제를 함께 해결하자”며 올해 안에 국회의원 정수 문제가 매듭되길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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