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00

2013.08.12

동북아 외톨이 아베 한중과 관계 개선 묘책 있나

아·태 갈등은 ‘오바마 구상’에도 걸림돌…한국도 마냥 방치 땐 국익 손해

  • 배극인 동아일보 도쿄특파원 bae2150@donga.com

    입력2013-08-12 09:59: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한국은 일본과 더불어 미국의 동맹국으로 지역 안보 토대를 이루는 관계며, 경제도, 문화도 함께 걸어가는 관계다. 정상 간, 외무부 장관 간 흉금을 터놓고 대화하길 염원한다.”

    “일본에게 중요한 이웃나라인 중국의 정상과 친근하게 대화할 날을 기대한다.”

    참의원(상원)선거에서 대승한 후 동남아 순방에 나섰던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7월 26일 싱가포르에서 한 말이다. 한국과 중국에 노골적으로 정상회담 희망을 피력한 것이다.

    아베 총리는 이튿날 동남아 순방의 마지막 방문국인 필리핀에서도 한국에 대해 “기본적인 가치와 이익을 공유하는 가장 중요한 이웃”이라고 치켜세웠다. 이어 “현재 외교당국 간 의사소통을 도모하고 있지만 차분하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통해 양국 관계를 꾸준히 발전시켜나가고 싶다. 정상회담이 가능하게 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미 보고서 “아베는 국수주의자”



    중국에 대해서도 “이웃나라일수록 다양한 문제가 생기지만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임을 인식하고 서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조건 없이 가능한 한 빨리 외무부 장관 또는 정상 수준의 회의를 갖고 싶다”고 말했다. 연 이틀 한중에 ‘러브 콜’을 보낸 것이다.

    아베 총리가 총선 후 곧바로 한일, 한중 정상회담을 촉구하고 나선 것은 복합적 이유가 있어서다. 먼저 아베 외교의 요체인 ‘미·일동맹’이 흔들리고 있다. 미국 처지에선 일본과 함께 아시아·태평양지역의 핵심 동맹국인 한국과 과거사 문제로 끊임없이 마찰을 빚는 아베 총리가 달가울 리 없다. 북핵 문제 처리, 경제협력 등을 둘러싸고 중국과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2기 정책 구상에도 일본은 걸림돌이 되고 있다.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등을 둘러싸고 일·중 마찰이 격화하면 미국 역시 갈등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 의회조사국(CRS)은 8월 2일 ‘미국·일본 관계 : 의회의 이슈’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아베 총리를 확고한 국수주의자라고 소개했다. 이어 아베 정권이 촉발한 역사 논쟁이 지역 내 긴장을 고조하고, 이는 결국 미국 이익을 해칠 것이라고 분석했다.

    보고서는 특히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언급하면서 “미국뿐 아니라 일본 주변국들은 아베 총리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일본군 성노예로 강제 동원된 여성 문제에 접근하는 방식을 예의주시한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은 미국, 일본, 한국 등 3국의 협조체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역사 인식 차이에 조용하게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덧붙였다.

    미·일 정상 간 개인적 관계도 예전 같지 않다. 오바마 대통령과 아베 총리와의 첫 회담은 1시간 남짓 만에 끝났다. 정상 간 단독 회담도 없었다. 반면 오바마 대통령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이틀에 걸쳐 회담했고,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이례적으로 미 의회에서 연설 기회까지 줬다.

    미·일 정상의 친분관계에 대한 의구심이 커지자 지난달 TV도쿄 참의원선거 특별 프로그램에서 한 패널이 아베 총리에게 “오바마 대통령이 총리를 싫어하지 않나”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러자 아베 총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미·일은 동맹국이어서 괜찮다”고 대답했다. 둘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 일화인 셈이다.

    미·일 동맹이 흔들리면 아베 총리가 헌법 개정에 앞서 선결 과제로 추진하는 집단적 자위권 확보도 쉽지 않다. 애초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는 재정 지출 삭감으로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의 전력 공백을 우려한 미국의 희망사항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국수주의 성향을 가진 아베 정권에서 추진하는 집단적 자위권 확보가 주변국을 필요 이상으로 자극할 경우 당장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는 듯하다.

    진창수 세종연구소 일본연구센터장은 “미국이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바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이 영토와 과거사 문제로 한국, 중국과 대립하는 상황에서 추가로 분쟁 소지를 만들 생각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베 정권 지지율의 기반인 아베노믹스의 성공을 위해서도 한중, 한일 관계 개선이 필수적이다. 아베노믹스는 지금까지는 무제한 금융 완화와 대대적인 재정 지출을 통해 주가 등 자산가치를 밀어올린 금융 버블 성격이 짙다. 앞으로의 성공 여부는 기업 구조조정, 수출 경쟁력 강화, 새로운 성장동력 확보 등 실물경제 부문에 달렸다는 게 정설이다. 이를 위해서도 한중과의 관계 안정화는 필수적이다.

    일본이 동북아의 외톨이로 남는 데 따른 불안감도 커진다. 역설적으로 일본 우익세력은 요즘 한국이 노골적으로 사대주의로 회귀하고 있다고 독설을 퍼붓는다. ‘산케이신문’이 발행하는 극우성향 월간지 ‘세이론(正論)’은 9월호에서 “한국은 일본에 대한 열등감으로 계속 자멸의 길을 달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 한국 정부가 일본과의 원·엔 통화스와프 계약을 연장하지 않기로 한 데 대해 “냉정을 잃은 한국 정부가 꼭 필요한 일을 중단했다. 실제로 한국에 통화위기가 닥치면 중국은 통화스와프를 거부할 것이다. 중국의 속국이 되고 있는 한국을 일본은 그냥 강 건너 불 보듯 하고 있으면 된다”고 덧붙였다.

    동북아 외톨이 아베 한중과 관계 개선 묘책 있나
    각료들 8·15에 야스쿠니 참배할까

    한국으로서도 일본과의 관계를 마냥 냉각시킨 채 방치할 수만은 없다. 경제적 이유도 있지만, 한국이 마냥 중국에 경사되는 것은 한일 동맹이라는 하나의 유효한 외교전략 카드를 버리는 셈이다. 외교가에서는 한국이 중국의 주머니 안에 들어간 게 확인되는 순간 한국을 대하는 중국 태도가 돌변하리라는 우려가 나온다.

    한 외교가 인사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중·일이 센카쿠 열도 문제를 동결하고 직접 손을 잡는 경우”라고 말했다. 시쳇말로 한국이 ‘낙동강 오리알’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종원 와세다대 교수는 “한국의 외교적 영향력은 미국은 물론 중국, 일본 등 주변국과 관계가 다 좋을 때 극대화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하반기 한일 관계의 첫 번째 바로미터는 역시 일본 각료들의 8월 15일 야스쿠니 신사 참배 여부다. 아베 총리는 늘 “내가 갈지 안 갈지 말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현재로서는 참배하지 않을 공산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다른 각료들의 참배에 대해서는 8월 6일 “각료가 개인적으로 참배할지 안 할지는 원래 마음의 문제로, 자유다. 내가 가라 마라 요구할 생각은 없으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고 본다”고 말했다.

    각료들의 참배 범위도 문제다. 중국은 아베 총리와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상 등 4대 각료의 참배는 용인할 수 없다는 방침을 밝혔다. 한국도 묵시적으로 4대 각료의 참배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현재로서는 4대 각료 모두 참배 의사를 보이고 있지 않다.

    8·15 문턱을 원만하게 넘는다면 하반기 한일 관계 개선 가능성은 다각도로 모색될 수 있다. 최선의 시나리오는 다자회담 무대에서 양국 정상이 따로 만나 신뢰를 쌓은 뒤 정상회담으로 이어가는 그림이다. 당장 다음 달 5일부터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한일 간 약식 정상회담이 이뤄지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일본 측은 이미 한국 측에 G20 정상회의에서 한일 정상회담이 이뤄지기를 바란다는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다자회담 신뢰 구축 보장 없어

    G20 무대를 놓친다면 9월 하순에 열리는 유엔 총회가 다음 무대가 된다. 이어 10월에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아세안+3 정상회의가 줄줄이 열린다. 이들 회의에 한중일 정상이 모두 참석할 예정이라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 양국 정상이 따로 만날 수 있다.

    연말에는 당초 5월에 열기로 했으나 연기된 한중일 정상회담이 서울에서 개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박 대통령은 6월 중국을 방문했을 때 시진핑 주석으로부터 한중일 정상회담 개최에 대해 긍정적인 답변을 이끌어낸 바 있다.

    문제는 다자회담에서의 만남이 곧바로 신뢰 구축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2012년 9월 9일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일본 총리의 만남이 단적인 사례다. 후 주석은 당시 APEC 정상회의가 열린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노다 총리와 만나 일본의 센카쿠 열도 국유화 추진에 대해 “일본 측은 반드시 사태의 엄중함을 충분히 인식해 잘못된 결정을 하지 마라”고 직접 경고했다. 하지만 노다 총리는 이튿날 국유화를 강행했고, 중·일 관계는 이후 최악의 빙하기에 접어들었다. 차라리 안 만나느니 못한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결국 앞으로의 한일 관계는 아베 총리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과 관련해 어떻게 성의 표시를 하느냐에 달렸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박 대통령은 7월 10일 언론사 논설위원실장 및 해설위원실장과의 오찬자리에서 한일 정상회담 개최 여부에 대해 “일본하고도 회담을 하고 그래야 될 것이다. 그걸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그 가능성을 닫지는 않았다. 그러면서 “지금도 일본은 독도며 위안부 문제며 계속 우리 국민의 상처를 건드리는데, 근본적으로 그런 데 대해 뭔가 미래지향적으로 가겠다는 분위기 속에서 하더라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의 많은 정치학자는 “보수를 대표하는 아베 총리야말로 일본 내 우익을 억누르고 한일 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다”고 말한다. 마침 내년은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이 되는 해다. 아베 총리의 잠재력이 한일 관계를 푸는 열쇠가 될지 주목된다.



    댓글 0
    닫기